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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16 경영자 리더십 분석-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다시 리더를 말한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이코노믹리뷰|기사입력 2008-01-10 05:45 |최종수정2008-01-10 05:51


◇ 실용정부‘간판 회장’…‘MB노믹스’꿈 이뤄낼까◇

효성그룹과 전경련을 움직이고 있는 조석래 회장. 이명박 당선자의 사돈이라는 사실에 그의 행보에 더 관심이 간다. 모든 조건이 갖춰진 지금, 그는 흥업보국(興業保國)의 사명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끊임없이 배우며 오늘의 효성그룹을 일군 조 회장의 ‘호학이재’ 행보는 자공(子貢)과 크게 닮아 있다. 실제로 조 회장은 지금도 바쁜 일정 속에서 수시로 짬을 내각계 전문가들과 만나 조언을 듣는 것을 즐긴다.”

●“친동생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아들이 이 후보의 셋째 딸과 결혼한 까닭에 그는 이명박 당선자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자 짐이다.”

전 경련은 대선을 1주일 앞둔 시점에 회관 1층 로비에서‘문화사랑 기업사랑 음악회’를 개최해 세인들의 눈길을 끈 바 있다. 평소 바쁜 생활에 젖어 있는 직장인들에게 문화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게 그 취지였으나 기획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새 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한 전경련의 비상한 활약상을 예감케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관측통들은 하나같이 재계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전경련의 역할이 대선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현재 전경련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이끌고 있다. 조 회장은 새해 신년사에서 새 정부가 추진해야 할 경제 과제의 기본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간 참여정부 하에서 현금을 쌓아 놓고도 투자를 머뭇거리고 있던 대기업들이 투자를 대폭 확대해 새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사실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재계가 먼저 손을 내밀어 새 정부와의‘밀월(蜜月)’을 적극 추구하고 나서는 셈이다.

당초 올해 초만 하더라도 참여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3번째 연임을 강력히 희망한 까닭에 조 회장이 새 회장직에 오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강 회장이 아들과 벌인 경영권 분쟁으로 회장단의 불신임을 받게 되자 이내 대안으로 급부상해 마침내 제31대 회장에 취임케 되었다. 당시 전경련은 회장단 내의 이견으로 신임 회장을 선출치 못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는 전경련 회장단이 만장일치로 신임 회장을 추대하는 관행을 유지한 지 4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 회장도 이를 의식한 듯 취임 일성으로 회장단의 단합을 강조했으나 취임 초기만 해도 그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취임 직후에 갖기로 한 첫 회장단 모임이 삼성과 LG 등 4대 메이저 그룹 총수들의 외면으로 무기 연기된 것이 그 실례이다. 그러나 조 회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름대로 소신행보를 계속했다. 그는 취임 직후에 가진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철폐를 과감히 요구하는 소신행보로 재계 안팎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투자방법’ 등을 묻는 질문에 이런 비유를 들어 참여정부를 비판했다.

“고요한 연못에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누군가 돌멩이 하나를 던지면 그 물고기는 이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참 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어 참여정부 하에서 만연한 반(反)기업 정서와 불안정한 노사관계 등을 투자침체의 원흉으로 지목하면서 노조가 경영에 간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토론회 말미에 이같이 덧붙였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기업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정부는 한미FTA로 늘어나는 세수를 이용해 농촌을 적극 도와야 하고, 농촌 역시 농산물 고급화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는 참여정부가 최대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한미FTA 타결’의 공을 한껏 높이면서도 재계의 주장을 가감 없이 전하는 절묘한 화술을 구사한 것이다. 재계와 참여정부의 불편한 관계를 감안할 때 전경련 회장으로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리더십을 보여준 셈이다.

그의 탁월한 리더십은 그룹 운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원래 효성그룹은 전 임직원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효 성그룹의 ‘주경야독’ 풍조는 기본적으로 조 회장이 견지하고 있는 소위 ‘호학이재(好學理財)’의 행보에서 나온 것이다. 조 회장은 공부하는 재벌총수로 유명하다. 그는 끊임없이 배워야만 무한경쟁의 글로벌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룹 내에‘배우고 익혀야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격언이 불문율로 자리 잡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학이재(好學理財), 공부하는 재벌 총수

동 양의 전통에서 볼 때‘호학’과 ‘이재’는 동떨어진 개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는 성리학(性理學)이 만연된 이후에 빚어진 일이다. ‘호학’을 자부한 공자는 결코 ‘이재’를 사갈시(蛇蝎視)한 적이 없다. ‘호학’을 군자의 기본 덕목으로 제시한 공자는 《논어, 양화》편’에서‘호학’의 효능을 이같이 풀이한 바 있다.

“인(仁: 어짊)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지(知: 지식)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방자하게 되고, 신(信: 신의)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기강을 해치게 되고, 직(直: 정직)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옹졸하게 되고, 용(勇: 용맹)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어지럽게 되고, 강(剛: 굳셈)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경솔하게 된다.”

공자는 사람이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지(知)·인(仁)·용(勇)등의 덕목이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공자의 초기 제자 중 ‘호학’의 대표적 인물로 안회(顔回)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호학’에서 안회와 쌍벽을 이룬 제자가 한 사람 더 있었다. 그가 바로 자공(子貢)이다.

훗날 송대의 유자들은‘호학’과 ‘이재’를 철저히 분리한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나머지 ‘이재’에 실패한 안회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재’에 성공한 자공을 크게 폄하했다. 그러나 이는 공자의 기본 취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당시 자공은 공자의 제자들 중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총명한 인물이었다. 《논어, 자장》편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하루는 자공의 제자인 진항(陳亢)이 스승에게 말하기를,‘선생이 공손해서 그렇지 공자가 어찌 선생보다 현명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자공은 제자의 이런 발언에 펄쩍 뛰었으나 그는 사실 원칙을 포기하지 않고도 능히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당대의 기남(奇男)이었다. 그가 세 치 혀로 전국시대를 풍미한 소위 종횡가(縱橫家)의 효시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훗 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 중니제자열전》에서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할애해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당시 자공은 패권을 다투던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 사이를 오가며 현란한 유세를 펼쳐 노나라를 제나라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낸 것은 물론 구천의 패천하(覇天下)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를 두고 사마천은 《중니제자열전》에서 이같이 평해 놓았다.

“자 공이 한 번 나서자 노나라가 존속되고, 제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오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강국이 되고, 월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다.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자 국제 간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각 큰 변동이 생긴 것이다.”

《논 어》에는 안회와 자공이 병칭되어 나타나는 대목이 제법 많다. 이는 두 사람의 나이가 비슷한 데다가 여러모로 대비된 데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공자는 자공이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날로 성장하고 있는 데 반해 안회는 명성도 얻지 못한 채 가난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적잖이 우울해했다. 《논어, 공야장》편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공자가 자공에게 묻기를, ‘너와 안회 중 누가 나은가’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했다.”

자 공의 대답이 참으로 교묘하기 그지없다. 그는 스승이 질문하는 의도를 미리 간파하고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낮추면서 안회를 극찬하는 화술을 구사한 것이다. 공자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자공으로부터 이런 절묘한 대답을 듣고는 적잖이 심란했을 것이다. 자공이‘호학’은 물론 ‘이재’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도 이런 언변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사기, 화식열전》은 자공의 ‘이재’ 능력을 이같이 극찬해 놓았다.

“공자의 제자 중 자공이 가장 풍요로워 말 네 필을 연결해 타고 다녔고, 비단 등의 폐백으로 제후들에게 빙례(聘禮: 초빙에 응하는 예)를 갖췄다. 이르는 곳마다 그곳 군주들과 대등한 예로 대접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자의 명예를 널리 드날리는 데 자공이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훗날 송나라 유자들은 거만의 재산을 모은 자공의 ‘이재’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호학’마저 크게 폄하해 놓은 것이다. 이들의 왜곡된 평가를 계기로 ‘호학’과 ‘이재’를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그릇된 풍조가 조성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자공은 공자 사후 상례(喪禮)를 주재한 것은 물론 3년상이 끝난 뒤에도 계속 3년이나 더 공자묘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한 유일한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재’에도 밝았지만 안회 못지않게 ‘호학’에도 뛰어났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노나라에서 최초의 《논어》인 소위 《노론(魯論)》이 나온 직후 제나라에서 이에 대응하는 《제론(齊論)》이 편제된 데에는 제나라에 처음으로 유학을 전한 그의 공이 컸다.

그런 점에서 끊임없이 배우며 오늘의 효성그룹을 일군 조 회장의 ‘호학이재’ 행보는 자공과 크게 닮아 있다. 실제로 조 회장은 지금도 바쁜 일정 속에서 수시로 짬을 내 각계 전문가들과 만나 조언을 듣는 것을 즐긴다. 관계 서적을 부지런히 읽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임직원들에게 늘 기업CEO로서의 ‘프로정신’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프로정신’을 이같이 풀이하고 있다.

“임직원 모두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항상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생각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하는 개척정신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프로정신이다.”

그가 말하는 프로정신은 바로 끊임없이 스스로 연찬(硏鑽)하며 새로운 분야에 과감히 도전하는 ‘호학이재’ 행보를 달리 표현한 셈이다. 실제로 조 회장을 만나본 사람들은 첨단과학 분야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두른다.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끊임없는 독서, 첨단 과학 지식 해박해

그 의 ‘호학이재’ 행보는 기본적으로 부전자전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경남 함안군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6·10만세 사건 때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중앙고보 4학년을 중퇴했던 조홍제 전 회장은 나이 30에 일본대 독일경제학과를 졸업한 ‘호학’ 기업인이었다. 그는 일제 때 고향 친구인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1000만 원을 빌려주었다가 대부금의 주식 전환을 조건으로 동업 제안을 받으면서 사업에 투신했다.

이후 삼성물산의 부사장직을 맡아 외부영업을 전담케 된 그는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삼성물산이 한창 호조를 보이던 1960년 3월에 ‘동업관계의 청산’ 통보를 받게 된 그는 언젠가는 독립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지분배분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결국 그는 1962년 9월에 지분문제를 포기한 채 56세의 나이에 기왕에 설립한 효성물산을 재정비해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첫 번째 품목으로 나일론을 선택한 그는 1966년에 과감히 울산에 공장을 지었다. 그는 불과 수년 만에 동양나일론이 나일론업계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여세를 몰아 동생이 운영하는 대전피혁과 뒤늦게 삼성에서 지분 몫으로 건네 받은 한국타이어를 합병해 회사의 덩치를 비약적으로 키웠다. 그는 사업이 한창 확장되던 1970년대 초에 세 아들에게 기업을 나눠주어 경영을 책임지게 했다. 지분배분 문제로 삼성물산과 힘겹게 싸웠던 일을 거울삼아 형제 간의 지분분쟁을 미연에 방지키 위한 배려였다. 이에 장남인 조 회장은 효성물산 계열을, 차남인 조양래는 한국타이어 계열, 막내인 조욱래는 대전피혁 계열을 떠맡게 되었다.

조 전 회장은 1978년에 스스로 경영일선에서 퇴진하면서 세 아들에게 각기 다른 내용의 좌우명을 써 주었다. 장남에게는‘숭덕광업(崇德廣業: 덕을 숭상하며 사업을 넓힘)’차남에게는 ‘자강불식(自强不息: 쉼 없이 노력함)’막내에게는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대비해 환란이 없게 함)’이라는 글을 주었다. 이후 3형제는 부친의 좌우명 아래‘한 지붕 3가족’이라는 평을 들으며 일치단결 해 효성그룹의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이들 3형제가 이끄는 3개 계열사는 지난 1980년에 주거래 은행을 달리 하면서 완전한 독립체제로 탈바꿈했다.

효성물산을 떠맡아 오늘의 효성그룹을 이룬 조 회장은 1935년 11월에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릴 때 꿈은 이공계 대학 교수였다. 그가 경기고를 나와 곧바로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로 진학해 화공학을 전공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리노이 대학원에서 화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내친김에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던 중 1966년 초에 갑작스레 부친으로부터 급거 귀국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이는 당시 부친이 동양나일론 공장 건설을 서두르면서 화공학을 전공한 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관리부장직을 시작으로 계열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된 그는 주변으로부터 ‘재벌 2세’라는 평가 대신 ‘전문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듣기 위해‘주경야독’의 자세로 부단히 노력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훗날 그에게‘학자풍의 재벌총수’라는 닉네임을 안겨주었다. 그의 학자풍 행보는 자식들에 대한 성공적인 교육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재 예일대를 졸업한 뒤 게이오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장남 조현준은 지난 1997년에 입사해 그룹 부사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1998년에 하버드대에서 법학박사를 받고 뉴욕주의 변호사로 활동하던 차남 조현문은 이듬해에 그룹의 경영전략 2팀장으로 합류했다. 명문 브라운대를 졸업한 막내 조현상은 미국의 컨설팅업체 등을 거쳐 지난 2000년 경영에 참여했다. 현재 이들 3형제는 효성그룹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불철주야로 뛰고 있다. 효성그룹은 지난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재계 서열 4위에 랭크된 바 있다. 효성그룹이 최근 제2의 도약을 기치로 내건 것도 이들의 눈부신 활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와 사돈… 행보에 주목

그러나 조 회장이 시종 견지해 온 ‘호학이재’ 행보가 늘 성공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지난 7월의 ‘CEO 하계포럼’에 행한 부적절한 발언이 그 실례이다.

“우리 경제가 짧은 시간에 성장하다보니 적잖은 부작용이 있었다. 무균으로 자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제를 최우선시하는 경제대통령이다.”

그의 이런 발언은 당시 한창 경선이 진행 중인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지원 사격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컸다. 그는 친동생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아들이 최근 이 후보의 셋째 딸과 결혼한 까닭에 당시 이 후보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정계는 물론 재계 안팎으로부터 적잖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이후 조 회장은 대선이 가까워 올수록 언행을 조심하며 극도로 신중한 행보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의외의 일로 또 다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친동생이 운영하는 한국타이어가 최근 직원들의 잇단 돌연사로 커다란 물의를 빚은 데 이어 해외지사의 부당노동행위로 여타 한국 기업들까지 곤경에 빠뜨린 것이 배경이었다.

재계 관측통들은 한국타이어가 비록 법적으로는 효성그룹과는 별개로 존재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그의 영향권 내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호학이재’의 행보로 호평을 받고 있는 그가 ‘흥업보국(興業報國)’의 상징인 전경련 회장으로서 향후 어떤 조치를 취할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신동준 고전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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