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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07 "톰피터스는 그 피터스가 맞는걸까"
 
“저질 번역은 지식인 직무유기”

[이코노믹리뷰 2006-02-17 09:48](국내에 번역된 일부 경제경영서들을 읽다보면 종종 갑갑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략 가늠할 수는 있지만,문장이 난삽해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량급 저자의 책을 이런 정도의 번역자에게 맡겼는지 납득하기가 어렵죠.

출판가 분들도 아마도 할말은 많을 겁니다. 전문성과 더불어 글을 풀어내는 역량을 두루 갖춘 이들을 찾기가 어려울겁니다. 괜찮다 싶은 역자라면 아마도 몸값이 맞지 않는 경우도 꽤 있지 않을까요. 총체적인 역량의 한계이지요.
저자인 박상익씨는 아마도 저처럼 간혹 속이 뒤집히는 정도가 아닌가봅니다.

국내 번역 수준의 한계를 질타하는 서적을 내놓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볼테르가 살던 시절에도 번역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것을 보면, 근원적인 해결책은 역시 각자가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닐까요 :) 박씨가 현미경을 들이댄 국내 번역문화의 수준을 확인해보시죠.




《번역은 반역인가》
박상익 지음/푸른역사/275쪽/12,000원

프랑스의 작가이자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번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작품 - 사상이든 문학이든 - 하나 하나에는 저자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 태어난 배경, 그의 오감, 그의 학습, 그가 속한 문화·정치에서 집단의 의식·무의식, 그리고 언어의 유희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한 충족 없이는 그의 말대로 작품의 흠이 늘어나고 아름다움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한국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박경리의 《토지》나 김훈의 《칼의 노래》 혹은 윤동주나 김소월의 시에 대해 한국인 만큼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볼테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외국에서 당신 이름 석자가 알려진 데는 그나마 번역의 공이 컸노라고’ ‘번역이 없었다면 만국의 사상가가 아닌 일국의 사상가였을 뿐이라고’. 더 나아가 ‘번역을 통해 인류에게 가치있는 텍스트들이 전파되고 더 가치 있게 발전할 수 있다’고 말이다.

잘난 저자들이 아무리 볼멘 소리를 해도, 인류의 지적 성과를 모두가 열람할 수 있게 하는 것, 문화의 전파와 교환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 그것이 바로 번역이다. 그런데 이 말은 번역이 잘 되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있어 우리나라는 어떨까? 교수이자 오랜 기간 번역 활동을 해 온 박상익 교수는 에누리없이 ‘아니올시다’라고 못 박는다.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는 우리나라의 번역문화에 대한 박상익 교수의 현장 비판 보고서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번역서들이 쏟아져 나오는 번역출간물 대국 대한민국에 던지는 직격탄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지적하는 내용은 우리도 익히 경험한 것들이다. 바로 ‘오역(誤譯)’과 ‘ 비문(非文)’의 양산 수준이 아무 심각하다는 것. 오역은 말 그대로 틀린 번역, 비문은 ‘읽고 이해하는 데 문제가 있을 만한’ 엉터리 문장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전체 번역 내용 중에 오역이 하나도 없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오역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큰 흐름에 지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번역의 오역과 비문 수준은 마지노선을 넘어 거의 반역의 단계라는 게 문제다. 저자의 말을 잠깐 들어보자.

“영국 작가 웰즈가 쓴 역사책을 원서로 구입했는데, 마친 이 책이 당시 어느 명문 대학에서 강의하시던 저명 언론인에 의해 번역된 것을 알고 번역서도 구입했다. 그러나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해 읽으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개 대학생이 더듬더듬 사전을 찾아가며 읽는 중에도 숱한 오역과 비문들이 발견된 것이다.”

저자는 대학생 시설 고전독서 모임에서 읽은 단테의 《신곡》 - 이탈리아어의 영역본 - 에 대해서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에 띄는 무수한 오역들 때문에 도저히 내용 파악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숱한 오역·졸역·비문을 발견한 느낌은 ‘충격과 경악’이었고 그 속에서 소위 ‘명사(名士)들의 마각(馬脚)’을 봤다고 토로한다.

원문과 번역문을 견줘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대목이다. 이해가 안 되어 머리를 쥐어뜯고 자신의 무지를 한탄하고, 원래 어려운 책이라서 번역한 내용도 그럴 것이라고 자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것이 과연 한글이란 말인가’ 하면서 의심해보지 않았던가 말이다.

저자는 저질 번역 텍스트가 양산되는 이유를 번역의 경험을 통해 고발한다. 첫 번째는 교수로 대변되는 지식인들의 직무유기다. 이것은 다시 ‘교수들의 본역량 부족’과 ‘대학원생 번역하청’으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대학원생에게 돌아가는 형편없는 번역료, 여러 사람이 나누어 번역한 탓에 더 문제가 크다. 두 번째는 심각한 중역(重譯) 문제다. 동화 《파랑새》의 주인공 찌루찌루와 미찌루는 일본어 번역판을 한국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나타난 단어다. 이러한 중역 문제는 어린이 교재부터 학술서, 단행본까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저자는 이렇게 엉망으로 번역된 책들이 범람하고 그 중에서 ‘이 달의 책’이나 ‘학술상’ 혹은 ‘10선’ ‘100선’이 선정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물론 번역의 문제는 번역자 외에도 우리 번역문화의 구조적인 탓도 있다. 즉 번역이 힘든 정신적 노동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번역물을 연구업적에 포함시켜 주지 않는 학계 풍토와 형편없는 번역료로 인해 양질의 번역과 번역자가 양산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어, 번역에 관한 사회·문화적 인프라가 제대로 구현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번역이란 저자의 말대로 ‘번역’이 아니라 ‘반역’이 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한국어로 번역되어야 할 텍스트들은 넘쳐흐르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한국의 번역문화가 나아질 길은 없을까? 저자는 선진국의 사례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유럽과 미국의 대학처럼 우리도 번역을 연구업적에 포함시켜 줘야 한다. 특히 인문학의 경우,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시작할 때 올바른 번역이야말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번역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번역국을 설치하여 국가 주도하에 수천·수만 종의 서양 학술서를 번역했고, 그것이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가 되었다’는 것은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유럽의 중세만 보더라도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번역에 대한 지원은 학문과 문화를 꽃피우고 자국 문화를 더욱 심오하게 발전시키는 필수 자양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제 우리도 그래야 한다.

“번역이 없다면 자국어로 쓰이지 않은 인류의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텍스트들은 사장되고 만다”는 거창한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우수한 인적 자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나라 살림을 꾸려가야만 하는 우리 처지를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 힘은 정보의 질과 양에 있고, 그 출발점은 다른 나라의 수준 높은 지식의 번역에 있다는 게 자명해진다. 더군다나 번역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 그 어깨 위에 올라 더 멀리 많은 사물들을 볼 수 있다.

한국 번역문화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분석한 이 책. 속이 쓰리고 얼굴을 뜨겁게 한다. 몇 번이나 웃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 차원의 자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만큼 문제가 심각하기에.

권춘오
네오넷 코리아 편집장(www.summa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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