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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⑤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이코노믹리뷰 2007-03-27 22:36] (고전전문가인 신동준씨가 이코노믹리뷰에 기고한 손학규전 경기지사의 리더십 분석 칼럼입니다. )


飛龍의 고육책인가
보따리장수의 궁여지책인가

탈당이 과연‘비룡재천’의 고육책이 될지, 아니면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궁여지책이 될지는 전적으로 그의 행보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한나라당의 관계는‘계륵(鷄肋)’에 비유할 수 있다.
버리기는 아까우나 이내 버려도 아무 탈이 없는 관계인 셈이다.

한나라당이 자랑하는‘빅3’ 중 한 사람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마침내 탈당을 결행했다. 나흘간에 걸친 ‘산사(山寺)구상’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무능한 진보’와 ‘수구 보수’를 혁파키 위한 ‘중도개혁’ 세력의 결집이다. 그는 백범기념관에서 가진 탈당 기자회견에서 “현 상태로는 정당의 건강한 자기혁신과 미래지향적인 정치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그 이유를 이같이 밝혔다.

“한나라당은 원래 민주화세력과 근대화세력이 30년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 만든 정당의 후신이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은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지난 14년 동안 몸을 담고 있었던 친정에 거친 독설(毒舌)을 퍼부은 셈이다. 그는 자신의 탈당행보를 두고 최근의 인기드라마 ‘주몽’을 예로 들어 주몽의 고구려 건국 행보에 비유했으나 설득력이 부족하다. 탈당 시기 등을 감안할 때 “정치의 기본 틀을 바꾸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그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탈당을 선택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것이다.

중도개혁 세력 정치세력화 가능할까
그럼에도 정작 문제는 손 전 지사의 행보를 단순히 궁여지책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다는 데 있다. 우선 그의 탈당을 계기로 대선 정국이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의 경선이 반쪽짜리로 치러질 공산이 커졌다.

이는 한나라당의 집권가도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아직도 한나라당은 압도적인 국민지지율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빅2’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경선을 무사히 치를 경우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아무리 열린우리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새롭게 단장하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위기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손 전 지사가 기대하는 중도개혁 세력의 정치세력화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탈당 직전에 손 전 지사는 국민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2위인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크게 밀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일각에서 손 전 지사의 ‘리더십 부재’를 운위한 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그의 성향이 한나라당의 보수성향과 잘 부합하지 않는 사실과 결코 무관치 않다. 이는 최근 한 논객이 한나라당 내에 머물고 있던 손 전 지사를 두고 ‘금의야행(錦衣夜行)’으로 평가한 사실을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금의야행’은 말 그대로 ‘밤에 비단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이는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로 원문에는 ‘의수야행(衣繡夜行)’으로 되어 있다.

일찍이 초한전(楚漢戰) 당시 항우는 유방에 앞서 진(秦)제국의 도성인 함양(咸陽)으로 쳐들어가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하여 모든 궁전을 불사른 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부하 한 사람이 이같이 간했다.

“이곳 진나라 땅은 사방이 험한 산으로 막히고 땅이 기름지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잿더미로 변한 함양에 더 이상 머물기가 싫었던 항우는 속히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고 싶은 나머지 이같이 일갈했다.

“부귀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리하면 과연 그 누가 나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한서(漢書)》는 《사기》의 이 대목을 그대로 옮기면서 ‘의수(衣繡)’를 ‘의금(衣錦)’으로 바꿔 놓았다. 이것이 훗날 바뀌어 ‘금의야행’이라는 성어로 굳어진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 있는 손 전 지사의 존재의미를‘금의야행’으로 표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에 머무는 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 전 지사의 탈당은 ‘금의야행’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의사인 셈이다.

원래 손 전 지사로서는 경선 룰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지 않는 영남을 중심으로 한 당내 보수세력의 협조를 기대키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10% 미만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손 전 지사는 이 전시장과 박 전 대표 등의 소위 ‘빅2’에게 결코 위협요인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손 전 지사가 ‘빅2’로부터 끊임없는 구애를 받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빅2’의 입장에서 볼 때 손 전 지사를 자신들의 ‘러닝메이트’로 삼을 경우 보수세력의 표를 확고히 다진 가운데 중도세력의 표까지 유인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원래 손 전 지사는 비록 일반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지지도 조사에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전문가 그룹인 기자들과 중소기업인의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늘 1위를 차지해 왔다. 그는 비록 젊은 날에 극좌이론에 함몰된 것이 사실이나 훗날 이를 모두 학문과 경국(經國)의 이론으로 승화시킨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치인에 가깝다. 그는 지난 2000년에 펴낸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에서 이같이 술회한 바 있다.

“나는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시절에 급진적인 이념과 사고를 지녔다. 정부홍보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경제도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망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북한까지도 정부가 선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악독하고 처참한 사회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의 통치리더십과 관련한 혜안은 지난 대선 때 이회창 후보는 촛불시위에 참석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는 오히려 미군을 위문하러 간 대목에서 약여하게 드러나고 있다.

폭넓은 시야와 탁월한 분석능력을 겸비한 ‘안보리더십’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좌우를 넘나들며 다양한 삶을 체득한 손 전 지사의 역정을 고려할 때 그가 지닌 경륜은 매우 소중할 수밖에 없다.

특히 교육자 집안 출신인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회창 후보와 같은 귀족적인 냄새가 전혀 없다. 기자들을 포함한 전문가들이 그를 두고 ‘꿈과 현실이 조화를 이룬 인물’로 평가하며 선호하는 대선 주자 1위로 꼽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본래 모습에 가까운 장(場)을 찾아낼 경우 얼마든지 새로운 상황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엘리트지만 귀족적인 냄새는 안나
만일 손 전 지사가 중도개혁 세력의 세 결집에 성공할 경우 이번 대선은 기본적으로 보수-중도개혁-진보의 대결구도로 치러질 공산이 크다.

이는 한나라당-중도개혁 세력 중심의 범여권-민주노동당 및 친노계열 간의 대결을 의미한다. 현재 적잖은 사람들은 손 전 지사가 중도개혁을 기치로 제3의 길을 선택할 경우 중도를 선호하는 여러 세력들의 화학적 대결집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나라당 수뇌부가 손 전 지사의 이탈을 계기로 자칫 보수-중도개혁-진보의 대결구도가 형성될까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우려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지난 1997년의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는 조순 씨와의 통합을 계기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으나 결전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박찬종 씨의 반발을 막지 못해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2002년의 대선에서 이 후보는 또다시 주변의 만류에 귀가 솔깃한 나머지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연대를 포기함으로써 충청권의 이탈을 막지 못해 패배를 자초하고 말았다. 손 전 지사의 탈당 행보는 한나라당 수뇌부로 하여금 과거의 악몽을 상기토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엄밀히 볼 때 이번 대선 정국은 손 전 지사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이 이론과 실천, 보수와 개혁, 좌파와 우파, 이상과 현실, 지조와 타협이 하나로 통합돼 있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현재 그의 지지율은 극히 낮지만 ‘중도개혁’의 상징으로 부상한 그가 흡인해낼 수 있는 잠재적인 지지층은 결코 간단치 않은 것이다. 그가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대권을 거머쥘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손 전 지사와 한나라당의 결별은 일찍이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이는 ‘계륵(鷄肋)’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버리기는 아까우나 이내 버려도 아무 탈이 없는 관계를 뜻한다.

삼국시대 당시 조조(曹操)는 서촉(西蜀)의 유비(劉備)를 제압한 뒤 이내 서촉에서 발원하는 장강(長江)을 따라 강남으로 쳐내려가 손권(孫權)마저 굴복시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서촉의 관문인 한중(漢中)으로 쳐들어갔으나 의외로 유비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중을 포기하고 철수하자니 애석하기 그지없고, 한중을 차지하기 위해 전진하자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조조는 이내 결단하여 한중의 군사를 모두 거두어 장안(長安)으로 철군키로 했다. 그는 드디어 철군의 결심이 서자 야간의 군호(軍號)를 ‘계륵’으로 정했다. 《삼국지》무제기(武帝紀)의 주(注)에 인용된 ‘구주춘추(九州春秋)’는 ‘계륵’이라는 군호가 결정된 당시의 배경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위왕(魏王) 조조가 환군할 생각으로 군호를 ‘계륵’으로 정했다. 관속(官屬)들은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이때 행군주부(行軍主簿) 양수(楊修)가 곧 행장을 수습해 돌아갈 준비를 하자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묻기를, ‘어떻게 환군할 것을 알았소’라고 했다. 이에 양수가 대답키를,‘무릇 계륵이란 것은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맛이 없는 것이오. 이는 한중을 비유한 것이오. 군호를 보고 대왕이 환군코자 하는 것을 알게 되었소’라고 했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조조의 심중을 헤아린 양수가 이내 죽음을 당한 것으로 그려져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삼국시대 당시 조조는 버리기 아까운 한중을 과감히 포기하고 철군을 결정했다. 그의 이런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손 전 지사 역시‘계륵’에 해당하는 한나라당을 과감히 이탈하는 결정을 내린 셈이다.

손 전 지사에게 한나라당은 계륵?
그의 결단은 《주역》건괘(乾卦)의 구사(九四) 효사(爻辭)에 비춰볼 때 시의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주역》은 비룡(飛龍)이 되기 직전 단계에 있는 용이 모습을 ‘혹약재연(或躍在淵) 진무구(進无咎)’로 표현해 놓았다.

‘혹약재연’은 용이 연못 위로 뛰어오르거나 연못 속으로 물러나기를 거듭하면서 하늘로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연못 속으로 깊이 숨지도 못하는 불안한 상황을 지칭한 것이다. ‘진무구’는 전진을 결행해도 허물이 없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공자는 이같이 풀이했다.

“현자(賢者)의 지위가 오르내림이 무상한 것은 사악(邪惡)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진퇴(進退)가 일정치 않은 것 또한 무리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군자의 진덕수업(進德修業)은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는데 있다. 그래서 ‘무구’라고 한 것이다.”

‘혹약재연’의 ‘혹(或)’은 위로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래로 지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가운데로 인간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을 말한 것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의혹(疑惑)이 뒤따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과 맺은‘계륵’의 관계는 바로 ‘혹약재연’에 비유할 수 있다. ‘진무구’는 어떤 길을 선택할지라도 험로(險路)를 걸을 수밖에 없으나 큰 허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고래로 ‘비룡재천(飛龍在天)’으로 나아간 모든 인물은 결정적인 시기에 결단을 유예(猶豫)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주역》은 이를 ‘진무구’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비룡재천’을 꿈꾸고 있는 손 전 지사 역시 나름대로 ‘진무구’의 노선을 선택한 셈이다. 실제로 그는 탈당 기자회견에서 ‘진무구’를 선택한 자신의 심경을 이같이 밝힌 바 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심정으로 새로운 정치질서 창조의 길에 저 자신을 던지고자 한다.”

이는 한나라당을 새 정당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던 당초의 의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자인한 것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현을 위해 온 몸을 내던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의지는 탈당 직전에 언급한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이 말은 뜻을 이루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정진한다는 불가(佛家)의 화두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통상 ‘백척간두, 갱진일보(更進一步)’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이미 충분히 향상했으나 다시 더욱 분발하여 앞으로 나아가다’의 뜻으로 불가 화두의 원의에 가깝다. 우리말의 ‘백척간두’가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로 올라가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과는 정반대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으나 단지 시기의 선택을 놓고 고민했다는 뜻으로 이 말을 한 셈이 되었다.

현재 손 전 지사의 탈당에 대한 찬반여론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비룡재천’의 뜻을 세운 사람에게 탈당에 따른 비난은 큰 문제가 아니다. 잠룡(潛龍)이 그 모습을 드러낸 현룡(見龍)이 된 뒤 ‘비룡’이 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은 법이다.

‘비룡재천’의 관건은 결정적인 시기에 결단을 내리는 데 있다. 결단을 유예할 경우 ‘비룡재천’의 기회를 다시 만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손 전 지사의 탈당은 일단 ‘비룡재천’의 기회를 잡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평가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질서 실현 여부 미지수
현재로서는 손 전 지사가 범여권의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가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이는 그가 탈당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조’를 화두로 내세운 사실을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겠다’며 기존의 정당과 정파를 ‘낡고 무능한 집단’으로 싸잡아 비판한 그가 그들에게 구애의 손짓을 보내는 것은 곧 탈당의 취지를 무색케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반 정황을 감안할 때 대략 그는 일단 시민사회세력과 손을 잡는 방식을 통해 중도개혁 세력의 입지를 서서히 확보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탈당 직전에 중도개혁성향의 제3정치세력인 ‘전진코리아’의 창립대회에 참석해 “새로운 정치질서의 출현을 위해 그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역설한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말한 ‘새로운 정치질서’는 말할 것도 없이 중도개혁 세력의 대통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손 전 지사가 기대하는 ‘새로운 정치질서’가 그의 구상대로 실현될지 여부를 점치기가 힘들다. 그가 ‘드림팀’의 일원으로 언급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모두 현재까지는 손 전 지사의 이런 구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걸림돌이다.

잠재적인 우군인 범여권의 반응이 환영일색인 것만도 아니다. 나아가 소위‘이인제 학습효과’등을 감안할 때 10% 미만의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한 그의 탈당이 중도개혁 세력 결집의 기폭제로 작용키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관측 또한 만만치 않다.

그의 탈당이 과연‘비룡재천’의 고육책이 될지, 아니면‘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궁여지책이 될지 여부는 전적으로 그가 앞으로 어떻게 행보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 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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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④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코노믹리뷰 2007-03-15 17:48](고전 전문가인 신동준씨가 이코노믹리뷰에 기고한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 시리즈 '다시 리더를 말한다' 의 하나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신동준씨는 한겨레신문, 조선일보 등에서 정치부 기자생활을 했으며, 지금은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때 장학퀴즈를 석권한 수재이기도 한데, 참고로 신동준씨의 주장은 이코노믹리뷰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

“수신제가는 이뤘는데 치국평천하는 과연…”

강력한 대권주자 중 한 명인 박근혜 전 대표. 여론지지도는 이명박 전 시장보다 뒤지고 있으나 당심(黨心)만큼은 앞서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신뢰’와‘원칙’을 내세워 수신제가에는 성공한 것 같은데, 과연 사생활이 깨끗한 지도자는 응당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사상 최초로 부녀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수신제가 차원의 덕목인 ‘신뢰’와 ‘원칙’ 이외에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차원의 덕목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더불어 한나라당의 자랑이다.

현재 박 전 대표 측은 비록 여론지지도에서는 이 전 시장에게 뒤지고 있으나 당심만큼은 이 전 시장을 10% 넘게 앞서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는 2∼3주 간격으로 실시하는 대의원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 전 시장 측도 결코 경선 승리를 낙관할 수만도 없다. 이 전 시장 측이 일반인들의 참여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신실한 사람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 지녀
사실 박 전 대표 측이 당심의 우위를 주장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박 전 대표는 신실(信實)한 사람을 능히 알아보는 특유의‘지인지감(知人之鑑)’을 지니고 있다. 그는 사람을 쓸 때 섣불리 판단하거나 선입견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당사자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관찰한 뒤 나름대로 판단이 섰을 때 비로소 손을 내민다. 또한 일단 신뢰를 보낸 사람에게는 결코 도중에 그 신뢰를 거둬들이는 일이 없다.

박 전 대표가 구사하는 용인술의 특징은 대략 ‘신뢰’와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박 전 대표가 주변에 자신이 ‘신뢰’하는 인재를 포진시켜 수시로 자문을 받고, ‘원칙’에 입각해 자신에게 불리할지도 모를 조기경선에 동의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박 전 대표가 배신자에 대한 응징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신뢰’와 ‘원칙’에 대한 신념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괴한의 피습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와중에 “대전은요?”라고 물은 뒤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대전으로 내려가 역전승을 일궈 냄으로써 한나라당을 배반한 염홍철 전 시장을 응징한 것이 그 실례이다.

박 전 대표가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부친이 최측근이었던 김재규의 돌연한 배신으로 급서하고 자신 또한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등의 뼈저린 경험이 이런 용인술의 근인(根因)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곧 ‘신뢰’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교언영색(巧言令色)’과 ‘면종복배(面從腹背)’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그의 한 측근은 “얄팍한 수를 쓰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는 이들의 속셈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말로 그 특징을 요약한 바 있다.

용인술은 신뢰·원칙…선덕여왕과 흡사
이제마(李濟馬)의 사상론(四象論)에 비춰볼 때 박 전 대표의 이런 용인술은 그가 전형적인 소음(少陰)체질인 사실과 무관치 않다. 소음체질은 본래 ‘당여(黨與)’에 능하다. ‘당여’는 사석에서의 담론을 즐기며 주변에 자신이 신뢰하는 인물을 포진시키는 일련의 행보를 말한다.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 형의 인물은 대개 소음인이다. 이들은 머리가 총명하고 판단력이 빨라 조직을 만드는 데 장기를 발휘한다. 박 전 대표가 바로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당여’에 능한 대표적인 인물로 삼국시대의 제갈량(諸葛亮)을 들 수 있다. 제갈량은 ‘지감’에 뛰어나 사람의 현부(賢否)를 잘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사적인 자문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병법에 조예가 깊었던 마속(馬謖)을 곁에 두고 늘 병법과 관련한 사담을 즐기며 총애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그는 마속이 군령(君令)을 어겨 패배를 자초했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리며 소위 ‘읍참마속(泣斬馬謖)’을 단행했다. 자신이 내세운 ‘원칙’을 어긴 데 따른 가차없는 응징을 가한 것이다. 그가 오장원(五丈原)에서 진몰(陣沒)하기 직전에 위연(魏延)의 배반 가능성을 예상하고 강유(姜維)에게 미리 대비책을 일러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시대 당시 진수(陳壽)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이런 행보를 두고 이같이 평해 놓았다.

“공명(孔明)의 위정(爲政)과 형벌은 준엄했지만 촉나라 백성은 아무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공평하고 상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는 제갈량이 뛰어난 인재에 대해서는 늘 자신의 곁에 두고 자문을 구하는 등 한없는 ‘신뢰’를 보내지만 일단 자신이 내세운 ‘원칙’을 어길 경우 가차없이 베어버린 것을 칭송한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주변에 자신이 대표로 있던 시절에 기용한 인물을 포진시켜 끝없는 ‘신뢰’를 확인시키면서 ‘원칙’에 입각해 조기경선의 결단을 내린 것도 제갈량의 이런 행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의 신분으로 지존의 자리에 올라 ‘신뢰’와 ‘원칙’의 용인술을 구사한 인물로 신라시대 중기의 선덕여왕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재위 16년 동안 안팎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해내 마침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는 점에서 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 등이 모두 그녀의 치세 하에서 입신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선덕여왕이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한 기본철학이 바로 ‘신뢰’와 ‘원칙’ 이었다.

선덕여왕이 보위에 오를 당시만 하더라도 신라의 귀족들은 물론 중국의 당나라조차 여왕의 존재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삼국사기》‘선덕왕본기 12년조’에 따르면 당시 신라 사신을 맞은 당태종(唐太宗)은 거만하게도 이같이 말한 바 있다.

“너의 나라는 부인을 군주로 삼은 까닭에 주위 나라들이 무시하고 있다. 이는 군주 없이 적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내가 장차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신라왕을 삼고자 하나 그가 홀로 가서 신라왕 노릇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보호하고자 한다.”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명군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당태종도 군사출동을 간청하는 선덕여왕의 ‘걸사(乞師)’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 군왕에 대한 폄하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은 당시까지 여황제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당태종 사후 그의 후궁 출신이 전무후무한 여황제인 즉천무후(則天武后)로 즉위해 당태종 자신도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복의 대업을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당태종은 선덕여왕을 얕볼 입장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신라는 선덕여왕이 보위에 오를 당시 안팎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이 선왕 때 잃은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연계해 신라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때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 등을 적극 활용해 이 위기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훗날 김춘추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도록 만드는 디딤돌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는 박 전 대표가 지난 2004년 초 탄핵역풍 속에서 난파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을 떠맡아 그해 5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이끌어냄으로써 한나라당을 기사회생시킨 일에 비유할 수 있다. 당시 한나라당의 의원 및 당원들은 박 전 대표로부터 크고 작은 은덕을 입은 셈이다. 만일 한나라당이 올해 말에 치러지는 대선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이는 박 전 대표의 전공(前功)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가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선덕여왕과 사뭇 닮아 있다.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 중 결국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설령 결혼을 했을지라도 남편이 일찍 죽어 이후 재혼치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리더십 면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선덕여왕의 리더십을 두고 《삼국사기》는 ‘관인명민(寬仁明敏)’으로 규정해 놓았다. 이는 너그럽고 인자하면서도 현명하다는 뜻이다. 선덕여왕의 ‘관인명민’한 리더십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소위 ‘지기삼사(知幾三事)’의 고사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선덕여왕이 재위 당시 당나라에서 보낸 족자를 보고 이내 3가지 기미(機微)를 알아차린 것을 말한다. 모란꽃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울자 백제 군사가 여근곡(女根谷)에 쳐들어온 것을 알았고, 임종 전에 본인이 언제 죽을지를 미리 알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당부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는 물론 설화이기는 하나 그녀의 ‘관인명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크게 공감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박 전 대표 역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인명민’하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원래 ‘관인명민’은 무사무욕(無私無欲)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욕(私欲)이 앞서는 사람은 인색한 까닭에 결코 관인(寬仁)할 수 없다. ‘관인’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까닭에 암우(暗愚)할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의 ‘무사무욕’한 행보는 그의 에세이집인 《결국 한 줌, 결국 한 줌》의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은 결코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그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바라보게 한다. 모든 만남은 이별로서 끝이 나고 모든 소유는 상실로서 끝이 난다. 이승은 영혼을 닦는 유일한 도장이라고나 할까.’

박 전 대표는 관세음보살과 같이 사물을 관조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무사무욕’에 입각한 순정(純正)한 구도자의 자세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여승(女僧) 묘심화가 《대한민국과 결혼한 박근혜》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소회가 뒷받침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하얀 연꽃이 핀 줄 알았다”
‘박 의원을 처음 만났을 때 하얀 연꽃이 핀 줄 알았다. 어쩌면 하얀 목련 같기도 하고, 그러나 여자라는 느낌은 없었다. 성의 구별을 초월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랬다. 처음 보는 순간 박 의원은 관세음보살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 미혼으로 있는 박 전 대표를 보고 묘한 동질감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구도(求道) 의지를 투영시켜 구세(救世)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의 현현(顯現)으로 간주했을 공산이 크다.

원래 불가에는 수많은 보살이 있으나 관세음보살만큼 중생제도(衆生濟度)의 취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보살은 없다. 관세음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발로키테슈 바라(Avalokite vara)’이다. 이는 우주 삼라만상을 자유자재한 입장에서 관조(觀照)하여 살핀다는 뜻으로 ‘관자재(觀自在)’가 원의에 가깝다. 그러나 ‘관세음’ 역시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관자재’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보면 관세음보살의 ‘중생제도’ 행보와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이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뒷받침한다.

‘곧 사라질 그것들을 위해 정신을 쏟다보니 정말 세상에 온 나그네의 참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닦고 잠시 머물다 가는 그 동안이라도 이 세상을 사람들이 살기에, 아니 머물기에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다 가는 인생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이는 온 세상의 중생이 제도될 때까지 헌신할 것을 다짐한 관세음보살의 서원(誓願)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의 대권 도전은 관세음보살의 서원을 현실 속에 구현코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실제로 박 전 대표의 대권 행보는 이런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결국 한 줌, 결국 한 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위대한 일, 명예와 공이 따르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는 우선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속적인 권력과 공명(功名) 등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무사무욕’의 자세가 약여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가 얼마나 이상적인 통치관을 갖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맹자는 이같이 설파한 바 있다.

‘군자에게는 3가지 낙(樂)이 있다. 부모구존(父母俱存: 양친 모두 생존해 있음)·형제무고(兄弟無故: 형제가 아무 탈이 없음)가 일락( 一樂)이고,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음)·부부작어인(俯不 於人: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음)이 이락(二樂)이고, 득천하영재이교육(得天下英才而敎育: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함)이 삼락(三樂)이다. 군자에게는 이 세 가지 ‘낙’이 있을 뿐이다.’

박 전 대표가 언급한 내용은 맹자가 말한 ‘군자삼락’ 중 이락(二樂)에 해당한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용인술이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차원의 덕목일 뿐이다. ‘수신제가’의 덕목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인의 장막’에 갇혀 있지는 않는가
격동의 세월인 난세에는 힘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통치가 요망된다. 춘추전국시대에 법가(法家)와 병가(兵家) 등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역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많은 국민들은 여론조사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강력한 ‘경제리더십’을 원하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이 지지율에서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게 그 증거이다. 이는 결코 ‘앙불괴어천·부부작어인’ 등의 개인적인 덕목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는 최근 개그맨 유재석 씨를 예로 들어 이같이 언급한 바 있다.

“유씨의 인기 비결은 무엇보다 가식이 없고, 진실되고, 사생활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진실되게 국민을 대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면 강력한 리더십을 가질 수 있고 나라의 선진화도 앞당길 수 있다.”

과연 박 전 대표가 주장하듯이 사생활이 깨끗한 지도자는 응당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미·일·중·러 등 4강국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과연 이런 자세로 4강국과의 외교협상을 제대로 전개할 수 있을까. ‘사생활이 깨끗한 리더십’은 개인 차원의 수제(修齊)논리를 치평(治平)의 논리로 확대 해석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특히 박 전 대표의 이런 논리는 ‘신뢰’와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참모와의 관계를 주군과 가신의 관계로 변질시킬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적잖은 문제가 있다. 실제로 박 전 대표는 대표 시절에 주변으로부터 이런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신뢰하는 몇몇 사람에 둘러싸여 그들을 중심으로 일을 하는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

‘관인명민’의 리더십을 발휘한 선덕여왕도 재위 기간 중 자신의 등극에 반대하거나 주저했던 많은 사람들을 적극 포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 바 있다. 당태종이 노골적으로 선덕여왕을 폄하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박 전 대표가 ‘인의 장막’에 가려 있다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넓은 도량으로 사방의 인재들을 두루 포용할 필요가 있다. 선덕여왕의 협애(狹隘)한 ‘관인(寬仁)’이 아닌 즉천무후의 굉활(宏闊)한 ‘관인’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대권주자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가 장차 사상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수신제가 차원의 덕목인 ‘신뢰’와 ‘원칙’ 이외에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차원의 덕목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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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③ 이명박 전 서울시장

[이코노믹리뷰 2007-02-27 21:09](기자출신의 신동준씨가 이코노믹리뷰에 기고한 리더십 관련 글입니다. 신동준씨는 한겨레와 조선일보 정치부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지금은 21세기 정치연구소 소장을 지내고 있습니다. 순자, 맹자, 춘추좌전 등을 편역한 국내에서 몇 손가락안에 꼽히는 고전 전문가이기도한 그가 분석한 이명박 리더십을 한번 음미해보시죠 .) 

天時만난 경제 리더십 …
‘후보검증’관문 통과가 관건

“정주영과 이명박의 만남은 춘추시대 말기 월왕 구천과 범리를 떠오르게 한다. 범리의 계책으로 천하를 제패한 구천은 패업에 도취한 나머지 범리를 제거코자 했다.”

“이 전 시장의 용인술은 ‘아무나 쓰지는 않지만 누구나 쓴다’는 말로 요약된다. 사람을 들이기 전에 철저히 검증하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함께 일해 보자는 말로 일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는 용인술의 요체를 꿴 것이다.

“최고 통치권자에게는 국가대사와 세계정세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복잡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안목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주장 속에는 전 국민을 격동시키는 역동적인 비전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유 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 측이 최근 소위 ‘후보검증’ 논란에 휩싸여 적잖이 곤혹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최근의 그에 대한 ‘후보검증’ 공세는 전방위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의 지지율이 연일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데 따른 후유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두주자에 대한 강한 견제심리가 작동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전 시장 측이 드러내고 있는 불만 역시 일종의 '행복한 비명'에 가깝다.

현재 한나라당 내에서는 범여권이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큼 장차 외부 인사를 영입해 후보로 내세울지라도 한나라당 후보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 시장 측이 ‘후보검증’ 논란에 시종 차분한 대응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후보 검증’ 처음 제기한 사람은 노 대통령

당 초 이 전 시장에 대한 ‘후보검증’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는 올해 초의 신년회견에서 직설어법을 구사해 “실물경제를 좀 안다고 경제를 잘하는 게 아니다”며 이 전 시장을 정면으로 겨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이 전 시장의 고공행진을 돕는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부동산문제를 포함한 노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가 워낙 극명하게 드러난 데 따른 것이었다.

이 전 시장의 지지율이 지난해 말부터 연일 고공행진을 한 데에는 바로 노 정권의 경제실패가 이 전 시장의 '경제전문가' 이미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 사실과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최 근의 여론흐름을 보면 경제문제가 이슈화되면 될수록 노 정권의 실정과 이 전 시장의 ‘경제전문가’ 이미지가 더욱 대비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될 경우 이 전 시장에 대한 지지구조가 더욱 확고해질 공산이 크다. 이는 노 정권의 경제실패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 전 시장 측 역시 노 정권의 경제실패를 집중 부각시켜 이 전 시장의 ‘경제전문가’ 이미지를 극대화하려는 속셈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내 경선은 물론 올해 말의 대선에서도 ‘경제리더십’을 둘러싼 대선주자들 간의 불꽃 튀는 설전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 전 시장으로서는 일종의 천시(天時)를 만난 셈이다.

이 전 시장은 천시뿐만 아니라 인화(人和)도 얻은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지난 1999년에 《신화는 없다》는 자서전을 펴낸 바 있다. 이 책에는 한 가난한 노점상 소년이 고학으로 고려대에 입학해 6·3시위의 주동자가 되어 감옥에 갔다가 현대건설에 들어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회장이 된 후 정계에 성공적으로 입문하기까지의 역정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 책을 보면 오늘의 이 전 시장은 고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전 시장이 인화를 얻은 구체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경제실패 집중 부각시켜 지지율 올려

이 전 시장과 정 전 회장의 만남은 춘추시대 말기에 천하를 제패했던 월왕(越王) 구천(句踐)과 범리를 연상시킨다. 이 전 시장이 학창시절의 수옥(囚獄) 경력에도 불구하고 현대건설에 무난히 입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는 정 전 회장의 지감(知鑑)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범리가 월왕 구천의 신임을 얻어 핵심 가신(家臣)으로 등용된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월 왕 구천은 일시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격파하고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를 장악했으나 이내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부왕 합려의 패사(敗死)를 설원(雪寃)코자 한 오왕 부차(夫差)와의 회계(會稽) 대회전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구천은 부차의 시종이 되어 수년 동안 간고(艱苦)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때 구천은 범리의 계책을 받아들여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끝에 은밀히 세력을 길러 마침내 부차를 제압하고 장강 일대를 제패하게 되었다. 이는 정 전 회장이 태국 건설현장에서 커다란 손실을 보았다가 이후 이 전 시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아파트 건설을 전담하는 한국도시개발주식회사 등을 설립해 비약적인 발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제압한 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던 진(晉)나라와 자웅을 겨뤄 마침내 천하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이룬 패업에 도취한 나머지 자신의 패업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대부 문종(文種)과 범리를 제거코자 했다. 《사기》 ‘월왕구천세가’에 따르면 당시 이를 눈치 챈 범리는 재빨리 구천의 곁을 떠난 뒤 이름을 ‘치이자피’로 바꿔 큰 재부(財富)를 쌓았다. 당시 범리의 말을 듣지 않은 문종은 끝내 구천 곁에 남아 있다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정 전 회장이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에 만족치 않고 마침내 대권에 뜻을 품고 국민당을 창당할 당시 이 전 시장이 전정 회장과 결별한 뒤 독자행보를 걸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신화는 없다》에 따르면 당시 이 전 시장은 정 전회장의 정계진출을 적극 만류하며 김영삼 후보를 도와줄 것을 권했다고 한다.

결국 전 정회장의 대권도전은 좌절된 데 반해 이 전 회장은 정치1번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에 김영삼 대통령의 민자당 후보로 나와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범리가 정치인에서 경제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과 달리 이 전 시장은 당대의 경제인에서 일약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 무난히 성공한 셈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전 시장의 경제인으로서의 화려한 역정은 현대그룹 및 한국경제의 초고속 성장과정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여기에는 오너로서의 정 전 회장과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이 전 시장의 초상이 뚜렷이 각인돼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계입문 이후의 역정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정 전 회장은 수십 년 동안 정치권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여러 차례 대권에 도전했던 김영삼 및 김대중 후보에게 무모하게 도전장을 냈다가 이내 좌절하고 말았다.

현 재 이 전 시장은 비록 정치권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고는 하나 또 하나의 신화를 쓰기 위해 험난한 대권고지에 도전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전 시장은 정 전 회장과 달리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이는 전 세계 CEO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가 박 전 대표를 누르고 경선에 승리한 뒤 마침내 본선에서마저 범여권 후보를 제압하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 여부가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전 시장에게는 이를 낙관케 하는 몇 가지 뛰어난 장점이 있다. 우선 그가 철저히 일 중심의 인사원칙을 고수하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캠프에 합류한 정치권 인사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짧게 “열심히 잘 하자”는 말로 환영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만을 말하는 정 전회장의 리더십을 배운 듯하다.

아무나 쓰지 않지만 누구나 쓴다

이 전 시장의 캠프 사람들은 그가 보여주는 용인술(用人術)을 두고 ‘아무나 쓰지는 않지만 누구나 쓴다’는 말로 그 특징을 요약하고 있다. 사람을 들이기 전에 철저히 검증하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함께 일해 보자는 말로 일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는 용인술의 요체를 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춘추시대 초기에 활약한 관중(管仲)은 주군인 제환공(齊桓公)을 첫 패자(覇者)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제환공에게 이같이 건의한 바 있다.

“먼저 현자(賢者)를 몰라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자를 알았다고 해도 그를 등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현자를 등용할지라도 아무런 임무를 주지 않으면 등용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등용하여 임무를 주었을지라도 그를 믿지 않으면 결코 패업(覇業)을 이룰 수 없습니다.”

관중은 바로 용인술의 극치인 ‘지용임신(知用任信)’의 이치를 밝힌 것이다. 관중은 본래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을 쓸 때 믿지 못할 자는 아예 선발하지 않고, 일단 선발한 후에는 전적으로 일을 맡기면서 신뢰했다. 제환공이 관중의 도움을 얻어 첫 패업을 이룬 것도 이런 용인술과 무관치 않았다.

‘지용임신’의 원칙은 원인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현장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전 시장이 실무와 현장 중심으로 사람을 기용하면서 일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찾아서 하는 개척 정신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지용임신’의 용인술은 이 전 시장이 지닌 여러 덕목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용임신’의 원칙이 주효키 위해서는 반드시 일을 잘한 사람을 포상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토록 고취하는 방책이 필요하다. 한비자(韓非子)는 이를 소위 ‘신상진능(信賞盡能)’으로 표현했다. 이 전 시장은 묵묵히 일하면서 성과를 내는 사람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칭송하거나 캠프에 새로 합류한 신참자와 함께 행사에 참여하는 등의 용인술을 구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최근에 펴낸 《온 몸으로 부딪쳐라》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회의에서 너무 결론이 빤하게 흐르면 CEO는 일부러라도 딴죽을 걸어야 한다. 핵심 인재에게만 신경 쓰고 중위권 그룹에 신경 쓰지 않는 리더는 일류 감독이 아니다.”

이 는 ‘신상진능’ 원칙의 현대적 적용으로 볼 수 있다. 능력 위주의 ‘지용임신’ 원칙과 경쟁원리를 도입한 ‘신상진능’의 원칙은 이 전 시장이 지닌 뛰어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대권도전에 성공할 경우 이는 ‘지용임신’ 및 ‘신상진능’ 원칙의 개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 시장에게는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우선 그의 통치에 관한 기본 입장이 너무 소략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신화는 없다》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통 치라는 개념 아래에서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공복(公僕)이라는 말은 이론일 뿐이다. 통치 아래에서 공직자들은 국민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경영개념을 도입한 정치는 그렇지 않다. 자치지역 혹은 국가를 위해 더 많이 벌고, 벌어들인 것을 국민이라는 고객에게 환원해야 한다는 인식을 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통치를 일종의 억압개념으로 파악한 것부터 잘못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통치를 기업경영으로 환원시키는 단순논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이는 국가기관을 사회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는 서양의 개인주의적 접근방법에서는 가능한 것이기는 하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 전래의 역사문화적 전통과는 괴리된 인식이다. 동양에서는 국가를 사회의 일부분으로 상정한 적이 없다.

통치는 기업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여 국민이라는 고객에게 환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고 통치권자에게는 자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대사와 세계정세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보다 복잡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안목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주장 속에는 전 국민을 격동시키는 역동적인 비전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신화는 없다》에서는 통치차원의 비전은 잘 보이지 않고 ‘경제전문가’도 아닌 ‘경영전문가’의 이미지만이 크게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통치차원의 비전은 잘 안 보여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비록 세계 경제 10대국에 들어간다고는 하나 그 내막을 보면 속빈 강정에 가깝다. 국내적으로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고 국외적으로는 기술과 노임 면에서 일본 및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 상황에 안주했다가는 IMF 못지 않은 위기상황이 초래될 공산이 큰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전 시장이 내세우는 ‘경제리더십’에는 남북운하개통과 같은 토목공사 차원의 마스터플랜만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그 의 ‘경제리더십’에 대해 박 전 대표가 “경제전문가가 아니라 경제지도자가 필요하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나,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반드시 경제를 직접 해봐야 경제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며 직격탄을 날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실제로 이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전 시장의‘경제리더십’은 아직 정밀하게 검증받은 바가 없다. 과연 그가 ‘경제대통령’의 자격이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인 것이다.

이 전 시장이 최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제시한 소위 ‘MB독트린’ 역시 같은 차원의 지적을 면키 어렵다. 그는 북핵문제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을 촉구하면서 북한이 핵을 폐기할 경우 적극적인 대북지원에 나서 1인당 국민소득을 10년 내에 3000달러로 높이겠다는 추상적인 제안을 하는 데 그쳤다. 국가안보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차기 대권주자의 비전으로는 너무 허술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경제리더십’ 및 ‘안보리더십’ 등에 관한 정밀한 검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전 시장이 과연 경선에서 승리한 뒤 본선에서마저 범여권 후보를 누르고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을지 여부는 일련의 ‘후보검증’ 관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통과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 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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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의 인재등용 노하우

“말을 대신해 달리지 말고, 새를 대신해 날지 말라”

길고 긴 번역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스승인 고 권우 홍찬유 선생은 뜻밖에도 ‘관중’을 공부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주군인 제환공을 패자 지위에 올려놓고 춘추시대 열국을 평정한 사나이. 유학을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아온 스승의 입에서, 유가에서 전통적으로 배격하는 관중이라니….

고개를 갸웃했다. 노자, 장자, 묵가까지 제자백가 사상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하지만 읽으면 읽어볼수록 원전의 문장 하나 하나가 가슴에서 꿈틀거렸다. 매주 서울역 인근에 있는 대우학술재단에 모여 유학 사상을 집대성한 ‘성리대전’을 강독하던 학자 네 명이 전격 의기투합했다.

번역은 마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작업에 비유할 정도로 고단했다. 무엇보다, 문장이 난삽했다. 각자의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지만, 의미가 턱하니 막힐 때에는 한학자들을 찾았다. 초역에만 2년 이상이 걸렸고, 작년 말 관중은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무려 7년여의 길고 긴 작업이었다. 그동안 스승은 타계하고, 정부는 국민의정부에서 참여정부로 바뀌었다.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값만 무려 5만원. 사실, 잘 팔리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에나 등장하는 패도 정치가로 알려진 관중에 누가 관심이 있으랴.

하지만 ‘관중’은 뜻밖에도 출판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서울시내 주요 대형 서적의 고전 부문에서 상위권에 올라있다. 정해년 새해, 수천년 전 중국 대륙을 풍미하던 이 남자가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경은 무엇일까. 지난 17일 오후 인천 경인교대에서 만난 공동번역자 고대혁 교수에게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했다. 우리말로 풀어보자면 먹고 살 기반이 있어야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긴다는 뜻이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수출 3000억달러를 돌파했지만, 체감 경기는 여전히 바닥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춥고 어둡다.

“관자에게서 21세기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의 원형을 본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 교수는 기자의 이러한 가설에 순순히 동의를 한다. 관중은 말 그대로 민생문제 해결을 가장 중시하던 정치가였다.

간웅으로 널리 알려진 조조가 관중의 사상에 심취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젊은 시절, 조조는 첫 임지에 부임해 일을 낸다. 당시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던 수백여 개의 사당을 모조리 허물어버리는 대담한 행동을 했는데, 미신보다는 백성들의 민생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사고 덕분이었다.

관중은 특히 갈등을 풀어내고, 비전을 제시하며, 인재를 발탁하는 일에 발군이었다. ‘말을 대신해 달리지 말고, 새를 대신해 날지 마라.’ 관중이 남긴 인재 운용의 첫 번째 원칙이다. 지도자가 일을 맡기고도 시시콜콜 간섭하며 달리는 말에 발길질을 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뜻이라고 고 교수는 지적한다.

관중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다른 인재를 추천하는 데 결코 망설임이 없던 배경이다. 진시황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동문 한비자를 모함해 죽여버렸으나, 자신도 훗날 비슷한 운명에 처하는 이사는 관중을 배웠어야 했다.


일을 맡기고 시시콜콜 간섭하면 득보다 실 많아

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원칙을 견지하기란 때로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 국내 일부 대기업그룹 오너들은 내로라하는 인재를 발탁하고도, 수시로 갈아치우거나 작은 실수를 빌미 삼아 옷을 벗긴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첨단 경영기법을 이식했지만, 회사별로 명암이 엇갈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이명환 전 동부그룹 부회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이른바 ‘시스템 경영’의 성패는 경영자의 용인관(用人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고 토로한 바 있다. 제환공은 관중 사후에 간신들을 등용했다 결국 죽어서도 한동안 관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했다.

관중에게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리더십은 시스템의 중시다. 문제를 푸는 데 한 사람의 독단을 배제하고, 많은 사람이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의견을 보탤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유가에서 이상향으로 통하는 요순시대를 보자. 당시에도 후계자 그룹간의 암투, 가뭄이나 홍수로 인한 민생고는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문제를 푸는 방식에서 요순임금이나, 관중은 여느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 원탁회의를 열어 참석자들과 머리를 모았다. 특히 공은 언제나 자신이 발탁한 인재에게 돌렸으며, 과는 자신의 몫이었다. 구성원의 장점을 중시했으며, 한 가지 단점으로 섣불리 이들의 능력을 폄하하지 않았다.

관중은 천하에 신하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신하를 적절히 쓰는 군주가 없는 것을 걱정하라고 했다. “사실, 너무 이상적인 얘기들이 아닐까요” 고 교수가 제자들에게서 자주 받는 질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관중의 리더십이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것일까. 세계적인 검색 기업인 구글은 조그만 벤처기업 시절부터, 사내 인사평가위원회를 통해 인재를 발탁했다. 사내추천에만 의지하다, 자신의 입지를 우선시해 A급 인재를 추천하지 않는 직원들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관중은 마굿간 우리를 구성하는 목재의 사례를 들며 이러한 이치를 이미 설파한 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400여 년 전이다.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았다. “대선 주자로 부상하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현대판 관중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있겠습니까. ”고 교수는 재치 있게 비켜간다. “인재는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관중 만한 인물이 없겠습니까. 다만 이들을 알아볼 수 있는 국민들의 역량이 문제가 되겠지요.”

관중은 누구인가

“제갈량이 흠모한 춘추시대 대정치가”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로 널리 알려진 춘추시대의 정치가 관중. 훗날 춘추시대 열국의 정치무대를 좌우하는 대정치가로 성장하지만, 그도 젊은 시절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군주의 마음을 사로잡아 입신양명을 꾀하던 숱한 제자 백가 지식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금처럼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외무고시가 없던 춘추전국시대의 유가, 종횡가, 법가 등은 자신들의 부국강병 이론이나, 치도를 앞세워 군주들에게 지식을 세일즈하는 지식보부상이었다. 자신의 이론이 받아들여지면 경륜을 펼칠 기회를 제공받았으나, 이는 드문 경우에 불과했다.

공자나 맹자도 평생을 떠돌며 자신을 채용해줄 주군을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관중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대단한 행운아였다. 그는 제나라의 왕권을 다투는 여러 공자들 가운데 공자 규의 참모 노릇을 하면서 입신양명을 꿈꾸었다.

흥미로운 점은 절친한 친구인 포숙아가 공자 규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훗날 왕위에 오르는 제환공의 참모를 담당하게 되면서, 두 사람이 정치적인 라이벌로 부상하게 된다는 점이다. 관중은 제환공의 배에 화살을 날리며 목숨을 노리는 승부수를 띄우지만, 거사는 실패하고 포숙아가 지지한 제환공이 제나라의 왕위를 잇게 된다.

하지만 그의 진가를 알고 있는 포숙아의 천거로 왕위에 오른 제환공을 보필하는 재상자리에 오르게 되고, 자신의 경륜을 펼쳐 그를 패자 자리에 올려놓게 된다. 관중은 흔히 법가 사상의 시조 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중국 최고의 기재로 통하는 제갈공명이 융중에 머물던 무명시절에 자신을 관중에 비유하곤 할 정도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대정치 사상가로 인정받아 왔다. 재상 자리를 자신의 친구에게 양보한 포숙아, 자신의 목숨을 노린 자객을 재상자리에 발탁한 제환공 모두 관중 못지않게 대단한 인물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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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전총리, 전장서 예를 찾다

다시 리더를 말한다 ② 고건 전 총리

[이코노믹리뷰 2007-02-15 07:42] (송 양지도. 전쟁터에서 도를 찾다가 결국 적에게 패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인 송양을 비꼬는 고사성어입니다. 고건 전 총리도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한때 주변의 높은 기대를 모았으나, 결국 후보 대열에서 스스로 탈락하고 말았지요. 혹시 적군이 강을 다 건널때까지 기다리던 송양의 우를 되풀이한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직접 쓴 기사는 아니고, 고전연구가인 신동준씨가 풍요로운 고전 지식을 활용해 저술한 글이지요.


신동준씨는 한겨레와 조선일보 등에서 정치부 생활을 오래 했는 데,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전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성악설로 널리 알려진 순자를 국내에 평역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분석한 고건 전총리의 리더십을 한번 보시죠:)



“시대 거부한‘愼獨 리더십’…
臣道의 길을 이탈하지 못했다”

“고 전 총리는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결단을 내린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의 행보는 현실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역대 대통령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행보와 대조를 이룬다”

다산 정약용
“고 전 총리는 다산 정약용의 저서《목민심서》에서‘현명한 사람은 청렴을 이롭게 여긴다’는 뜻의‘지자이렴(知者利廉)’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때문에 그가 취한 행보는 《중용》에서 말하는‘신독(愼獨)’에 가깝다.”

조조“난세에 천하를 놓고 다툴 때는‘신독(愼獨)의 리더십’이 어울리지 않는다. 조조처럼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재능만 있으면 과감히 발탁해 쓰는 유재시거(惟才是擧)의 용인술이 필요하다.”

최근 범여권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거론되던 고건(高建) 전 총리가 문득 대선 불출마를 선언해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유력한 대권후보로 거론된 인물이 중도에 불출마선언을 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특히 고 전 총리는 지난해 중반기까지만 해도 줄곧 각종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려온 까닭에 그를 잠재적인 대통령 감으로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던진 충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대선 경쟁은 기병술이 동원되는 野戰
본래 대선 경쟁은 온갖 기병술(奇兵術)이 동원되는 야전(野戰)에 비유할 수 있다. 야전을 지휘하는 장수는 결코 일시적인 승패에 희비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전투를 하다 보면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대병(大兵)을 잃고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크고 작은 전투에서 줄지어 승리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상승무적(常勝無敵)의 기세를 자랑할지라도 마지막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승리를 거머쥐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대선의 최종 회전에서 승리키 위해서는 먼저 출마자 스스로 필승의 신념을 지니고 도중의 모든 난관을 기필코 돌파해 나가겠다는 남다른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 전 총리는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결단을 내린 적이 없었던 듯하다. 이러한 관측이 맞는다면 고 전 총리의 행보는 현실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역대 대통령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행보와 커다란 대조를 이루는 셈이다.


큰 틀에서 보면 고 전 총리의 하마(下馬) 선언은 기본적으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그의 조심스런 행보와 무관치 않다. 고 전 총리가 존경한 역사적 인물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라고 한다. 정조(正祖)의 총임(寵任)을 받았던 다산은 순조(純祖) 연간에 노론의 견제에 걸려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무수한 역저(力著)를 남겼다. 고 전 총리가 주목한 다산의 저서는 공직자의 직무수행 교범이라고 할 수 있는 《목민심서(牧民心書)》였다. 그는 《목민심서》에서 ‘현명한 사람은 청렴을 이롭게 여긴다’는 뜻의 ‘지자이렴(知者利廉)’이라는 구절을 찾아내 자신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 전 총리가 취한 행보는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신독(愼獨)’에 가깝다. ‘신독’은 말 그대로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신중한 사려와 행보를 취하는 군자의 기본자세를 말한다. ‘신독’을 두고 다산은 《중용자잠(中庸自箴)》에서 ‘신독은 성(誠)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성’은 ‘성신(誠信)’을 뜻한다. ‘중용’이 곧 ‘성’이고, ‘성’은 곧 ‘신독’에 의해 이뤄진다는 게 다산의 논리였다.



40년 화려한 官歷…깨끗한 사생활
고 전 총리는 다산의 이런 논리를 적극 수용한 듯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확실히 ‘중용’에 입각한 ‘신독’의 길이었다. 그가 제3공화국 이래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선을 포함한 서울시장을 2번 역임하고 총리직을 중임하는 등 40여 년에 달하는 고위 관직 생활 중 단 한 번도 금전과 여인 등으로 인한 스캔들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독’을 삶의 기본철학으로 삼은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조 중기의 명신인 김집(金集)을 들 수 있다. 그의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다. 김집은 조선조 예학(禮學)의 조종인 김장생(金長生)의 아들로 효종 때 이조판서가 되어 북벌(北伐)을 계획하다가 김자점(金自點) 등의 방해로 이내 관직을 사임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조선조 예학의 태두가 된 인물이다. 김집과 고 전 총리는 평생 ‘신독’을 기본철학으로 삼아 여기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그러나 ‘신독’은 비록 군자의 길이기는 하나 원래 청관(淸官)에게 어울리는 신도(臣道)의 길이다. 난세에 천하를 놓고 다투는 소위 ‘축록전(逐鹿戰)’은 신도가 아닌 군도(君道)의 길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역대 대선전은 말 그대로 ‘군웅축록(群雄逐鹿)’의 각축전이었다. ‘축록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물의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재능 있는 자를 과감히 발탁하는 소위 ‘유재시거(惟才是擧)’의 용인술(用人術)이 필요하다. 이는 평생을 ‘신독’의 청관으로 살아 온 고 전 총리에게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愼獨의 행보… 조조의 리더십과 상반돼
군웅축록’의 난세에 ‘유재시거’의 용인술을 절묘하게 구사한 대표적인 인물로 조조(曹操)를 들 수 있다. 그는 형수를 취하고 뇌물을 받은 소위 ‘도수수금(盜嫂收金)’의 인물일지라도 재능만 있다면 과감히 발탁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쟁천하(爭天下)의 요체가 오직 재능만 있으면 과감히 발탁하는 소위 ‘유재시거’에 있다는 사실을 통찰한 데 따른 것이었다. ‘유재시거’는 《목민심서》의 ‘지자이렴’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신독’의 행보를 취해 온 고 전 총리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원래 ‘도수수금’은 《사기》‘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찍이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치러 갔다가 대패하여 정신 없이 도주하던 중 흩어진 군사를 간신히 수습해 형양(滎陽) 땅에서 진평(陳平)을 아장(亞將)으로 삼아 한왕(韓王) 한신(韓信) 밑에 예속시킨 바 있다. 이때 휘하 장수인 주발(周勃)과 관영이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진평을 이같이 헐뜯고 나섰다.


진평은 집에 있을 때는 형수와 사통했고, 위(魏)나라를 섬겼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하여 초나라에 귀순했고, 초나라에 귀순하여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도망하여 우리 한나라에 귀순한 자입니다. 그는 여러 장수들로부터 금품을 받으면서 금품을 많이 준 자는 후대하고, 금품을 적게 준 자는 박대했습니다. 진평은 반복 무상한 역신(逆臣)일 뿐입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곧 진평을 천거한 위무지(魏無知)를 불러 질책했다. 그러자 위무지가 유방에게 이같이 대꾸했다.


신이 응답한 것은 그의 능력이고, 대왕이 물은 것은 그의 행동입니다. 지금 만일 그에게 미생(尾生) 및 효기(孝己)와 같은 행실이 있다 할지라도 승부를 다투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초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대항하고 있는 까닭에 신은 기모지사(奇謀之士: 기이한 계책을 내는 뛰어난 책사)를 천거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계책이 나라에 이로운지만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도수수금’이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의 ‘미생’은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나는데도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남의 장소인 다리 밑에서 한없이 기다리다 물에 빠져 죽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효기’는 뛰어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던 은(殷)나라의 중흥군주인 고종(高宗)의 아들이다. 위무지는 잘못된 천거를 나무라는 유방에게 아무리 효성과 신의가 뛰어난 인물일지라도 난세를 타개한 지략(智略)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일갈(一喝)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방은 위무지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도 못내 안심이 안 되어 당사자인 진평을 불러 반복무상한 행보를 하게 된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진평이 이같이 응답했다.


당초 신은 위왕(魏王)을 섬겼으나 위왕은 신의 말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왕을 떠나 항왕(項王:항우)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항왕은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면서 오직 항씨 일가와 처남들만을 총신(寵信)했습니다. 설령 뛰어난 책사가 있다 한들 중용될 여지가 없기에 저는 초나라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대왕이 사람을 잘 가려 쓴다는 얘기를 듣고 대왕에게 귀의케 된 것입니다. 신은 빈손으로 온 까닭에 여러 장군들이 보내준 황금을 받지 않고서는 쓸 돈이 없었습니다. 만일 신의 계책 중 쓸 만한 것이 있으면 저를 채용하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황금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잘 봉하여 관청으로 보내고 저를 사직시키십시오.”


이에 유방이 진평에게 사과하고 후한 상을 내린 뒤 호군중위(護軍中尉)에 임명해 제장들을 지휘케 했다. 그러자 제장들이 더 이상 진평을 헐뜯지 못했다. 유방이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데에는‘유재시거’의 대원칙에 입각해 진평을 과감히 기용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삼국시대의 조조가 동탁(董卓)과 이각, 장수(張繡) 등에게 차례로 몸을 의탁하며 반복무상한 행보를 보인 책사 가후를 자신의 군사(軍師)로 과감히 발탁한 것은 유방의 ‘유재시거’ 행보를 흉내낸 것이다. 조조의 이런 선택은 전적으로 옳았다. 북방의 맹주 자리를 놓고 원소(袁紹)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을 벌인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가후의 계책이 결정적인 승인(勝因)으로 작용한 사실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공직생활 내내 ‘신독’의 행보를 보여 온 고 전 총리에게는 ‘유재시거’와 같은 과감한 인사를 기대키가 쉽지 않다. 고 전 총리가 오랫동안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참모들을 적극 활용해 이를 하나의 대세로 연결시키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고 전 총리는 비록 관원의 최고직위를 뜻하는 극품(極品)의 자리를 2번이나 역임하는 등 화려한 관력을 보유키는 했으나 극상(極上)의 자리인 군위(君位)와는 인연이 멀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본래 군위는 지존무비(至尊無比)인 까닭에 품계가 없다. 아무리 극품의 자리에 여러 차례 오를지라도 군위에 비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선이 있을 때마다 극품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들이 대권에 강한 의욕을 내비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동양 3국의 역대 인물 중 고 전 총리와 유사한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을 고르라면 단연 5대10국(五代十國)의 시대에 활약한 풍도(馮道)를 들 수 있다. 풍도는 특이하게도 불과 채 10년도 안 되는 왕조가 명멸하는 와중에 재상을 연거푸 역임했다. 이는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제3공화국에서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고위직을 역임한 고 전 총리의 관력 역시 전무후무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풍도는 당(唐)제국이 무너진 후 60여 년 동안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된 소위 5대10국(五代十國)의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당시 황하 중하류 북쪽에서는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등 5왕조가 명멸했다. 장강 중하류 남쪽에서는 오(吳)와 남당(南唐), 오월(吳越), 초(楚), 민(??), 남한(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 형남(荊南), 북한(北漢) 등 10국이 난립했다. 남쪽은 여러 나라가 난립해 병존한 데 반해 북쪽에서는 5왕조가 차례로 명멸한 점에 차이가 있다. 이들 왕조를 흔히 ‘5대10국’으로 통칭한다.


5대10국 시대에 활약한 풍도와 닮아
당시 5대10국 중 가장 짧은 왕조는 후한으로 만 4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이는 중국사는 물론 전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짧은 왕조에 속한다. 후량은 만 7년, 후주는 만 9년, 후진은 만 10년밖에 존재하지 못했다. 가장 긴 후당의 경우도 겨우 만 14년에 불과했다.


10년 안팎의 5왕조가 난립한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로 5년마다 되풀이 된 6공화국 역대 정권의 파행(跛行)과 사뭇 닮아 있다. 그러나 5왕조는 6공화국보다 오히려 나은 면이 있었다. 5왕조는 최고 권력자의 교체로 끝난 데 반해 6공화국은 하부 인사들까지 일거에 교체되는 격변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5왕조가 왕조교체로 명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면 평온을 유지한 데에는 풍도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고 전 총리가 전대미문의 ‘탄핵정국’ 속에서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끈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풍도는 5왕조에서 8성(姓)의 11명에 달하는 천자를 잇달아 섬기면서 고위 관리로 30년, 재상으로만 20여 년을 지냈다. 이는 고 전 총리가 총리직을 포함한 고위관원으로 40여 년을 살아온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풍도가 여러 왕조에 걸쳐 오래도록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청렴한 자세와 뛰어난 자질 때문이었다. 만 4년짜리 왕조가 명멸하는 미증유의 혼란 속에서 그나마 백성들이 큰 어려움 없이 난세를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풍도와 같은 현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명대 말기의 이탁오(李卓吾)는 ≪장서(藏書)≫의 마지막 장에서 풍도를 이같이 평한 바 있다.


맹자는 사직이 소중하고 군주는 가볍다고 말한 바 있다. 풍도는 이 말을 참으로 잘 이해한 사람이다. 백성들이 창끝과 살촉을 맞는 고통에서 벗어난 것은 바로 풍도가 백성들을 편안하게 부양하는 데 힘쓴 결과이다.”


풍도는 자신이 다섯 왕조를 두루 섬겼다는 지적을 받을지언정 차마 무고한 백성이 날마다 도탄에 빠져 있게 할 수는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탁오가 풍도를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풍도가 백성의 존망을 자신의 영욕(榮辱)보다 위에 둔 데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풍도는 평생을 두고 정당치 못한 재화는 집안에 쌓아 두지 않았다. 또한 질박하고 검소한 옷과 음식에 만족했다. 특히 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했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출신 가문을 따지지 않고 재능 있는 사람을 누구보다 아꼈다. 고 전 총리 역시 청렴한 삶을 살아오면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풍도는 훗날 자서전인 《장락로자서(長樂老自序)》에서 자신은 집안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키 위해 헌신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여러 면에서 풍도와 유사한 삶을 살아온 고 전 총리가 훗날 자서전을 쓰면 《장락로자서》와 유사한 내용을 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한 번도 국민들의 박수 속에 퇴임하는 대통령을 가져보지 못했다. 특히 5년 단임제를 채택한 이후 정권교체의 시기가 빨라져 마치 5대10국 당시에 단임 왕조가 명멸하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풍도를 닮은 고 전 총리가 당선될 경우 나라를 보다 안정되면서도 중도 통합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갈 공산이 컸다.


그러나 풍도가 비록 지존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을지라도 5대10국의 난세에 찬연한 빛을 발했듯이 고 전 총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는 하나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고 전 총리가 앞으로도 계속 국가원로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 갈 것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 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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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리더십 분석



①노무현 대통령의 통치리더십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공언했듯이 소위 ‘역발상’의 대가이다. 신년 벽두부터 아무도 예상치 못한 4년 연임제의 개헌을 문득 제의하고 나선 것이 그 실례이다. 노 대통령은 전에 문득 한나라당에 대연정(大聯政)을 제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제의는 노 대통령이 소위 ‘역발상’을 통해 최고 통치권자의 자리에 오른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발상’은 어디까지나 득천하(得天下)의 방략에 불과할 뿐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역발상으로 치천하(治天下)에 성공한 제왕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일찍이 전한(前漢)제국 초기에 육가(陸賈)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게 이같이 헌책(獻策)한 바 있다.

“마상(馬上)에서는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필히 마하(馬下)로 내려와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자칫 후대의 사가에 의해 득천하에 필요한 마상(馬上)의 전술(戰術)과 치천하에 필요한 마하(馬下)의 치술(治術)을 구분치 못한 대통령으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마상의 전술은 군웅(群雄)이 천하의 우이(牛耳: 주도권)를 놓고 다툴 때 쓰는 것으로 현대의 선거전에 비유할 수 있다. 원래 출마(出馬)한 적장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기습전(奇襲戰)과 복병전(伏兵戰), 공성전(空城戰) 등 다양한 기병술(奇兵術)이 필요하다. 특히 세가 불리할 때 이런 기병술이 필수적이다. 여기에는 ‘역발상’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병술을 구사한 인물로 삼국시대의 조조(曹操)를 들 수 있다. 조조는 짐짓 약병(弱兵 : 짐짓 미약한 모습을 보임)으로 적장의 교만을 부추겨 방심케 만들거나, 요병(耀兵 : 무력시위)으로 적을 지레 겁먹게 만들거나, 의병(疑兵 : 허수아비 등을 이용한 거짓 용병)으로 적이 착각토록 만들거나, 기병(奇兵 : 예상외의 용병)으로 적이 예상치 못한 시점을 택해 출기불의(出其不意 : 뜻밖에 나섬)로 적의 허점을 찌르거나 하는 등의 기막힌 기병술을 구사했다. 이는 상식을 뛰어 넘는 ‘역발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 등의 기막힌 역발상을 통해 단일후보가 된 뒤 충청도민에게는 ‘행정수도이전’을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수도권 주민에게는 ‘불편하고 시끄러운 것의 이전’을 내세워 표를 긁어모았다. 그는 역발상의 기병술로 득천하에 성공한 셈이다.

이회창 후보, 정병술(正兵術)만 고집하다 낙마
당시 대병(大兵)의 위용을 과신한 이회창 후보는 승패의 분수령이 충청 회전(會戰)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제휴마저 뿌리친 채 정병술(正兵術)만을 고집하다가 참패를 자초했다. 그는 비록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영남을 근거로 대병을 모아 권토중래(捲土重來)의 호기를 맞이했으나 결국 노 후보의 기습공격을 받고 낙마(落馬)하고 만 것이다.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지라도 ‘역발상’의 당사자인 자신의 주착(籌策)에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그러나 청와대에 입성 한 노 대통령은 응당 역발상의 유혹을 단호히 끊고 만민을 위해 고루 덕을 베푸는 황도무친(皇道無親)의 대정(大政)을 펼쳐야만 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치천하에 임하면서도 시종 역발상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최고 통치권자의 ‘역발상’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 최고 통치권자가 국가대사를 결정할 때 늘 좌우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들은 뒤 신중한 사려를 거쳐 결단을 내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천하를 거머쥔 뒤에는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말 위에서 호령할 일이 없는 법이다. 쟁천하(爭天下)의 회전(會戰)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말 위에서 내려와 천하에 임해야만 한다. 더 이상 싸울 대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말 위에서 진두지휘할 경우 공연히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노 대통령의 출신배경과 입신과정은 여러 면에서 한고조 유방(劉邦)과 닮아 있다. 유방 역시 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자랑하는 천하의 웅걸(雄傑) 항우(項羽)를 패퇴시키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출신배경·입신과정 한고조 유방과 닮아
진시황의 급서로 군웅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당시 천하인은 모두 항우의 천하평정을 의심치 않았다. 당시 항우는 누대에 걸쳐 장군을 배출한 명족 출신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각종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당대 최고의 무용(武勇)을 자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싸움은 일개 농부 출신인 유방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항우가 자신의 출신배경과 무용을 과신한 나머지 소위 대세론에 입각해 姑息的(고식적)인 방법으로 천하를 차지하려고 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이를 두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항우본기’에서 항우의 패망원인을 이같이 분석한 바 있다.

‘항우는 패왕(覇王)의 업을 이룬다는 명목을 내세워 오직 힘만으로 천하를 정복하려고 했다.’

항우는 여러 면에서 이회창 후보와 닮았다. 당시 이 후보는 대선예비전으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의 대승에 도취한 나머지 무명의 노 후보가 적장으로 발탁된 것을 보고 고식적인 대세몰이에 안주한 나머지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이는 삼국시대 당시 천하의 효장(驍將) 관우(關羽)가 오나라의 어린 장수 육손(陸遜)을 업신여기다가 패퇴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후보는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병가의 기본원칙을 무시함으로써 두 번에 걸쳐 통한의 분루를 삼켜야만 했다.

유방은 젊은 시절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유방은 현재의 역장(驛長)에 해당하는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법을 어겨 처형을 당하게 되자 이내 비적(匪賊)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진시황의 죽음을 계기로 천하가 혼란스럽게 되자 이를 틈타 한 지역의 반군(叛軍)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는 노 대통령이 젊은 시절 상고를 졸업한 뒤 별다른 직업을 갖지 못하다가 토방 속의 독공(獨功)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세인의 이목을 끈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원래 평민 출신인 유방은 귀족 출신인 항우와 달리 민심을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진제국의 도성인 함양(咸陽)을 점거했을 때 장로들을 불러 놓고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한 사실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 3개의 조항으로 이뤄진 ‘법삼장’은 진제국의 혹법(酷法) 하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신민들에게는 해방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민심 잡는 법 숙지한 ‘5공 청문회’ 스타
이는 노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여의도로 입성한 뒤 마침 세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모은 소위 ‘5공 청문회’에서 거침없는 논변과 격정적인 몸짓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어 열렬한 지지층을 확보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민심을 잡는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막강한 항우를 패퇴시키고 천하를 거머쥔 유방은 보위에 오른 뒤 자신과 전혀 다른 출신배경을 가진 유자(儒者)들을 크게 경멸했다. 《사기》‘고조본기’에 따르면 유방은 건국공신인 역이기( 食其)를 공개적인 석상에서 ‘우유(愚儒)’로 비난하는가 하면 유자들이 쓰는 유관(儒冠)에 방뇨키도 했다. 이는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후 ‘잘 배운 사람’ 운운하며 서울의 강남 지역민과 조선일보, 삼성그룹, 서울대 출신 등을 특권층으로 몰아가며 적대감을 드러낸 것과 닮아 있다.

유방과 노 대통령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이런 모습은 별다른 기반도 없이 자력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사람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들만을 탓할 것도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력으로 입신양명한 자들의 공업(功業)이 굉대(宏大)한데도 불구하고 세인들의 이들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비록 충절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것도 한미한 가문출신인 이성계의 전력(前歷)을 천시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전대의 명족 출신이 한미한 출신의 개업과 개국을 있는 그대로 평가한 적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세인들이 자력으로 입신양명한 사람을 추앙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역대 모든 왕조의 개국조가 소위 하나 같이 위보(僞譜)를 만들어 조상을 미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보를 만들어 조상을 미화하는 전래의 방안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당사자 스스로 자신이 이룬 굉대한 공업에 대한 만족감으로 한미한 출신 및 전력으로 인한 허전함을 메우거나, 자신의 전력에 대한 세인들의 낮은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그리 쉽지 않은 데 있다. 당사자의 자부심과 세인의 인색한 평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갭이 존재키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자칫 예상치 못한 화난(禍難)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대표적인 예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주원장 역시 유방과 마찬가지로 탁발승과 비적 등의 행각을 벌이다가 ‘역발상’을 통해 원대 말기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일약 몸을 일으켜 천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원래 그는 천하에 보기 드문 추남(醜男)이었다. 그러나 영정(影幀)에 그려진 그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로 현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위보(僞譜)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성이 주씨인 점에 착안해 사대부들이 공자 다음으로 존숭한 남송대의 주희(朱熹)를 자신의 조상으로 꾸미려고 시도키도 했다.

자격지심 때문에 폭군이 된 명태조 주원장
주원장은 보위에 오른 뒤 자신의 한미한 출신배경과 불미한 전력으로 인해 늘 자신의 출신 및 전력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병적인 반응을 보였다. 명나라 개국 초에 빚어진 수많은 筆禍事件(필화사건)은 모두 이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력을 연상시키는 모든 글을 보면 곧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여겨 당사자를 가차없이 혹형으로 다스렸다. 그가 후대에 폭군으로 비난받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원장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한미한 출신배경과 불미한 전력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인해 세인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전력을 연상시키는 글만 보면 병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는 유방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점이다.

유방은 주원장과 달리 재위 도중에 육가(陸賈)를 비롯한 유자들의 간언을 전격 수용했다. 당시 육가는 유방을 계도하기 위해 12편에 달하는 책을 지어 시간을 두고 한 편씩 유방에게 바치며 군왕의 길을 가르쳤다. 유방은 열린 마음으로 육가의 가르침을 흔쾌히 받아들여 이내 군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주원장과 달리 보위에 오른 뒤 이내 육가 등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역발상’의 유혹에서 벗어난 셈이다.

이는 스스로를 구시대의 평민이 아니라 새 시대에 부응하는 명족의 일원으로 간주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방의 일거수일투족은 군신(群臣)들의 모범이 되었다. 황제는 일상적인 업무에 간섭하지 않고 대신 이를 직접 처리하는 대신들을 선임하고 감독한다는 군도(君道)의 대원칙이 성립된 것은 바로 유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원칙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수천 년 동안 그대로 이어졌다.

유방과 주원장의 엇갈린 행보는 두 사람의 이질적인 성정과 무관치 않았다. 유방은 음습(陰濕)한 습기를 띠고 있는 주원장과 달리 밝은 면의 양성(陽性)의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스스로 이룬 공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유방은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도량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이 희대의 폭군이라는 오명을 얻은 데 반해 유방이 후대인의 칭송을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 역시 성정 면에서 주원장보다는 유방에 가깝다.

전형적 소양체질… 책략 부족하나 소신 뚜렷
일찍이 구한말의 위대한 사상가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는 사람의 체질을 사상론(四象論)에 입각해 4개의 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유방과 노 대통령은 전형적인 소양(少陽)체질에 속한다. 이에 반해 주원장은 장막 뒤에서 계책을 짜는 데 능한 책사 유형의 소음(少陰)체질에 속한다.

소양인은 소음체질에 비해 책략이 부족하기는 하나 소신이 뚜렷하고 일 처리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현우(賢愚)를 아주 잘 파악한다. 노 대통령의 확신에 찬 조리 있는 언변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양인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발 벗고 나서기 때문에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원한을 살 여지가 많다. 자신의 재주에 대한 신념이 지나치고 사사로움에 치우친 나머지 자칫 경박한 사람으로 몰릴 위험이 크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격정을 여과 없이 토로하면서 코드 인사를 계속하는 것도 이런 체질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소양인은 특히 자기가 현재 지니고 있는 부와 명예 등을 가볍게 보는 까닭에 이를 노리는 밑의 사람들로부터 늘 모함을 당할 소지가 크다. 소양인이 자주 폭발적인 슬픔에 잠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소양인이 남의 일에 희생적이고 대의명분 앞에서 비분강개하는 전형적인 무인(武人)의 기질인 데 따른 것이다. 눈물을 잘 흘리는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고 운운하며 걸핏하면 지존의 자리인 대통령직을 내걸고 승부수를 던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성정을 지닌 사람이 가장 주의할 대목은 신중한 대처를 요하는 외치분야이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심경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바람에 대미관계와 북핵문제 등에서 우리의 입지가 협소해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에 터져 나온 ‘평화의 바다’ 파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말 ‘교수신문’의 설문조사에서 전국 각 대학의 교수들이 지난 한 해의 의미를 한마디로 압축한 사자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를 선택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 대통령에 대해 충정 어린 고언에 해당한다.

원래 ‘밀운불우’는 《주역》의 《소축괘》(小畜卦)와 《소과괘》(小過卦)의 괘효사(卦爻辭)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비를 만들기 위한 전 단계로 구름이 꽉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를 전혀 만들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상을 말한다. 현재까지 《주역》에 관한 최고의 주석가로 알려진 삼국시대 위나라의 王弼(왕필)은 이를 두고 이같이 풀이해 놓았다.

“《소과괘》에서는 음기가 위에서 성한 기세를 하고 있음에도 전혀 베풀지 못하고 있어 ‘밀운불우’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소축괘》에서는 오히려 양기가 강한 까닭에 음기가 위로 더 올라가지 못해 ‘밀운불우’라고 한 것이다.”

《소과괘》의 ‘밀운불우’는 음기의 인물이 군주의 자리에 앉아 아래의 신민(臣民)들과 제대로 호응하지 못하는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 주원장의 등극이 이에 해당한다. 《소축괘》의 ‘밀운불우’는 덕이 매우 작아 대덕(大德)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덕(小德)에 그치고 있는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

현재 노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최하의 지지도를 기록 중인 것은 시종 민심과 괴리된 코드인사와 오기정치를 계속한 데 따른 후과로 보아야 한다. 노 대통령은 이제라도 특단의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개헌 등으로 불리한 국면을 반전시키려는 역발상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다행히 노 대통령은 유방과 같이 밝은 면의 성정을 지니고 있다. 《소과괘》의 ‘밀운불우’처럼 주원장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아니면 《소축괘》의 ‘밀운불우’처럼 유방의 길을 따를 것인지는 전적으로 노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노 대통령이 결심하기에 따라서는 잔여 임기 1년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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