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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13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김근태 전 열우당 의장
 
다시 리더를 말한다 ⑧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코노믹리뷰 2007-05-09 13:21]

“決을 缺한 관용의 리더
君道냐 臣道냐 선택 갈림길에”

손학규 전 지사와 함께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그는 선량(善良)과 관용(寬容)이라는 뛰어난 리더십을 갖고 있지만 난세에는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데…

덩샤오핑(鄧小平)은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결단력을 갖고 ‘카이팡(開方)’을 강력히 밀어붙임으로써 마오쩌둥을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이 됐다. 우유부단한 김 전 의장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때 정동영 전 의장과 더불어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손꼽힌 인물이다. 그러나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후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 느낌을 주고 있다. 실제로 그의 행보를 보면 강력한 경쟁자인 손 전 지사에게 ‘중도개혁’의 대표주자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초조감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다.

원래 두 사람은 경기고와 서울대 동기로 오랫동안 절친한 친구로 지내왔다. 학창 시절에는 오히려 손 전 지사가 훨씬 강경한 노선을 걸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입장은 경원(敬遠)이다. 상호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비록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기는 했으나 서로 뿌리가 다르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김 전 의장이 밝힌 다음과 같은 소회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손 전 지사와 나는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선택을 달리 했다. 지난 1980년의 군부 쿠데타 때 나는 국민 속으로, 그는 공부하러 영국으로 갔다. 이후 그는 민자당에, 나는 정통야당인 민주당에 참여했다.”

민주화운동 도중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손 전 지사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삶으로 일관한 자신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취지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오랫동안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거론된 자신의 입지를 보다 강화하겠다는 속셈이 선명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자칫 민주화 투사의 경력을 구실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옹졸한 협량(狹量)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크다.

인권운동가 출신인 김 전 의장은 정치인으로의 변신에 크게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까지 1% 안팎의 지지율밖에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그 증거이다. 이는 정치 초년생에 해당하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에게 이보다 더 치명적인 지적은 상황 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다. 실제로 적잖은 사람들은 현재 노정되고 있는 범여권의 지지부진한 신당통합 논의를 두고 그에게 책임의 일단을 묻고 있다. 정계개편을 주도할 만한 혜안과 결단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나름대로 매우 뛰어난 리더십을 갖추고 있다. 선량(善良)과 관용(寬容)의 덕목이 그 것이다. 치세는 성군의 칭송을 받을 만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상황이 그의 이러한 덕목을 용납지 않고 있는 데 있다.

때 못 만난 선량과 관용의 리더십
난세에는 ‘선량’과 ‘관용’이 오히려 약이 아닌 독이 될 수도 있다. 《춘추좌전》(노소공 20년 B.C. 52))조에 이를 뒷받침할 만한 대목이 나온다. 당시 가장 탁월한 정치가로 소문난 정(鄭)나라 재상 자산(子産)은 임종 전에 후임자인 유길(游吉)에게 이같이 당부한 바 있다.

“내가 죽게 되면 그대가 틀림없이 집정(執政)이 될 것이오. 진정한 유덕자(有德者)만이 관정(寬政)으로 백성을 복종시킬 수 있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맹정(猛政)으로 다스리느니만 못하오. 무릇 불은 맹렬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를 두려워하므로 불에 타 죽는 사람이 많지 않소. 그러나 물은 유약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겨 쉽게 가지고 놀다가 이로 인해 매우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되오. 그래서 관정을 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오.”

자산이 몇 달 동안 앓다가 죽자 이내 유길이 집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맹정을 펴지 못하고 관정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정나라에는 도둑이 기승해 마침내 환부지택(  之澤: 갈대가 무성한 못)에 무리 지어 살게 되었다. 유길이 크게 후회했다.

“내가 일찍이 자산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보병을 출동시켜 환부지택에 숨어 지내는 도둑들을 토벌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러자 도둑이 점차 뜸해졌다. 이를 두고 훗날 공자는 이같이 평했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정치가 관대해지면 백성이 태만해진다. 태만해지면 엄히 다스려 바르게 고쳐놓아야 한다. 정치가 엄하면 백성이 상해를 입게 된다. 상해를 입게 되면 관대함으로 이를 어루만져야 한다. 관이제맹(寬以濟猛: 관대함으로 백성들이 상처 입는 것을 막음)과 맹이제관(猛以濟寬: 엄정함으로 백성들의 태만함을 고침)으로 정치는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백성들이 이미 크게 지쳐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는 것이 거의 가하다네. 중원에 은혜를 베풀어 4방을 안무해야 하리”라고 했다. 이는 관정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또 “궤수(詭隨: 간사한 거짓말로 속이는 사람)를 좇지 말고 조심하여 사악한 자 경계하세. 응당 구학(寇虐: 약탈하며 잔혹한 자)을 막아야 하니 그들은 일찍이 법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라네”라고 했다. 이는 맹정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어‘“먼 곳을 안무하고 이웃과 가까이 하여 우리 국왕을 편안케 하리”라고 했다. 이는 화목으로 나라를 편히 할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다투거나 조급하지 않고, 강하지도 유하지도 않네. 정사가 뛰어나니 백록(百祿)이 모여드네”라고 했다. 이는 관정과 맹정이 잘 조화된 지극한 정치를 말한 것이다.

자산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공자는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같이 말하기도 했다.

“그는 고인(古人)의 자혜(慈惠)를 이은 사람이었다.”

자산은 공자사상의 형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공자는 생전에 그를 만나지는 못했으나 깊이 사숙(私淑)했다. 자산이 공자에게 끼친 사상적 영향은 《논어》가 4개장에 걸쳐 공자가 자산을 극찬한 대목을 수록해 놓은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우유부단은 위정자의 치명적 약점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위정자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우유부단(優柔不斷)에 있다. 김 전 의장이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극히 치명적이다. 실제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관용이 열린우리당 내에서 친노세력의 발호와 사이비 개혁세력의 득세를 불러왔고, 이는 참여정권의 오만을 부추겨 마침내 지금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고금동서의 역사를 개관할 때 지도자에게 ‘우유부단’만큼 나쁜 것은 없다. 안타깝게도 김 전 의장은 바로 이런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대권에 대한 욕심을 거두고 뛰어난 최고통치권자를 만나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는 신도(臣道)의 길을 걸을 요량이면 이는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범여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의 일원으로 거론되어 왔다. 대권을 거머쥐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는 보다 과감한 군도(君道)의 길을 걸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2월 당대표로 있던 시절에 전당대회를 치른 뒤 이를 무사히 치른 사실 자체에 감격해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못했다. 천하대사를 읽는 그의 식견에 의문이 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많은 의원들의 탈당 러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의 해체까지 점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와해 직전에 있는 열린우리당의 대표가 되어 전당대회를 무사히 치른 사실에 자못 감격해 한 나머지 기자들 앞에서 이같이 소회를 밝혔다.

“성원이 안 돼 당이 난관에 부딪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지난 며칠 밤 오금이 저렸다. 전당대회장인 체육관이 텅 비는 꿈을 꿔 자다가 깨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대로 해석할 경우 그가 얼마나 소심한 인물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지난해 6월 당의장에 취임할 때 ‘독배’를 마시겠다는 각오로 임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대표를 마친 뒤 기자들 앞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런 소어(笑語)로 대신한 바 있다.

“독배를 실제로 마셔보니 참으로 썼다.”

그가 비록 우스갯소리로 이같이 말하기는 했으나 당시 그의 각오는 처절한 바가 있었다. 의장직 사퇴서를 양복 안주머니에 늘 넣고 다닌 것이 그 실례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한 성실한 인물이다. 비록 지도력 부재라는 지적을 받기는 했으나 당의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향후 그의 행보는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그는 대선에 임하는 자신의 기본입장을 이같이 피력한 바 있다.

“민주주의 가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현재 나의 지지율은 매우 낮지만 모든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것을 기약해 줄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으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식의 무모한 대선 행보는 결코 취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고고한 선비정신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축록전(逐鹿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자칫 삼국시대 당시의 원소(袁紹)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를 일이다.

본래 원소는 명문 출신인 데다가 용자(容姿)가 수려하고 나름대로 관인(寬仁)한 풍모까지 갖춰 그야말로 천하인의 신망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대의 모든 인사들이 원소에게 끈을 대기 위해 안달을 했다. 그야말로 모든 점에 한 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조조에게 무참히 패해 분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삼국지》‘위서?원소전’에 그 해답이 나온다.

“원소는 위용(威容)과 기관(器觀: 그릇과 식견)이 있어 당세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관대해 보였으나 내심 능력 있는 사람을 미워했고, 일을 꾸미기만 좋아할 뿐 결단력이 없었다.”

이 기록은 일면 높이면서도 일면 폄하하는 소위 ‘일포일폄(一褒一貶)’의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삼국지》의 이런 평가는 포(褒)보다는 폄(貶)에 무게를 두었다고 보아야 한다. 원소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호모무결(好謀無決)’에 있었다. 일을 꾸미기만 좋아할 뿐 결단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난세를 구제코자 하는 사람으로 가장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호모무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의장의 트레이드 마크인 ‘선량’과 ‘관용’이 난세에서는 오히려 족쇄로 작용할 소지가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도자의 결단력 부족은 마치 전쟁터에 군사들을 이끌고 가 마침내 적군이 코앞에까지 닥치는 데에도 가장 좋은 상황이 도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전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휘하 장졸들의 궤멸을 의미한다. 난세의 상황에서 통치자가 결단력을 결여하면 수많은 인민들이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설령 잘못된 결단을 내릴지언정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제2공화국 당시 장면(張勉) 총리는 도처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나 자칫 나라가 전복될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데도 이를 만연히 대처하다가 끝내 패퇴하고 말았다. 그는 훗날 권좌에서 물러난 뒤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라는 자서전을 통해 이같이 변명한 바 있다.

“국민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는 것은 민주당의 기본정책이었다. 국민이 혼돈을 미워하고 자유의 부산물을 미워하게 될 때 건전한 자유는 가능한 것이다.”

그의 말은 원론적으로 보면 나무랄 수 없다. 전 국민이 혼돈을 미워하여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게 될 때 사실 ‘건전한 자유’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나라가 결단나게 되는 것은 어찌할 것인가. 모든 통치행위는 당시의 상황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국민 전체의 삶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소위 ‘족식(足食)’의 문제가 일차적으로 해결되어야만 한다. ‘족식’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예절도 알고 문화도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 및 자유와 같은 이념도 그 이후에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족식’의 당장 급한 상황에서 민주와 자유 자체가 국민들의 삶을 보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래 원소는 소위 ‘풍도(風度)’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지녔다. ‘풍도’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통치자에게는 ‘신언서판’보다도 더욱 중요한 덕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결(決)’이다. ‘결’은 난세의 상황에서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풍도’가 뛰어난 인물을 들라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들 수 있다. 그는 뛰어난 외교가이자 재상이었다. 저우언라이를 삼국시대의 인물에 비유하면 제갈량에 가장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의 뛰어난 ‘풍도’는 강력한 결단력을 지닌 마오쩌둥(毛澤東)이 있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풍도’ 면에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결단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결합이 오늘의 중국을 만든 결정적인 배경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이 죽은 후 현대 중국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을 들라면 덩샤오핑(鄧小平)을 들 수 있다. 덩샤오핑의 경우는 사실 ‘풍도’ 면에서 보면 볼품이 없었다. 그는 ‘풍도’면에서 볼 때 결코 정상에 오를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존의 자리에 올라 소위 ‘카이팡(開方)’을 강력히 밀어붙임으로써 현대 중국사에서 마오쩌둥을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이는 바로 그의 결단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경우 ‘풍도’는 저우언라이에 미치지 못하지만 결단력만큼은 뛰어났던 것이다. 이는 삼국시대 당시 사마의(司馬懿)의 모습을 닮은 것이기도 하다. ‘풍도’ 면에서 볼품이 없었던 사마의는 칭병(稱病)하여 몸을 낮추고 있다가 당대의 권신인 조상(曹爽)의 전횡이 극에 이르렀을 때 일거에 반격을 가해 조씨 일당을 궤멸시킨 뒤 권력을 틀어쥐었다.

덩샤오핑 역시 소위 ‘샤팡(下方)’으로 인해 한때 시골의 공장에서 공원으로 근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때를 기다리며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장칭(江靑)을 위시한 사인방(四人幇)의 전횡이 극에 이르렀을 때 일거에 사인방을 때려눕히고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리더는 신언서판과 결(決)을 겸비해야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무리 뛰어난 ‘풍도’를 갖춘 인물일지라도 ‘결’을 갖추지 못할 경우 난세에서는 결국 패배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신언서판’과 ‘결’을 동시에 구비한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김 전 의장의 행태를 보면 여러 면에서 원소와 사뭇 닮아 있다. 그는 지나치게 ‘올바른 정치’라는 명분에 얽매여 있다. 그가 현재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는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범여권의 대통합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4·25재보선에서 드러났듯이 열린우리당의 해체가 대세로 굳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것은 김 전 의장이 하기에 달려 있다. 나름대로 결단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난세에 ‘선량’과 ‘관인’을 시종 자신의 미덕으로 삼고자 하면 군도(君道) 대신 신도(臣道)를 취하는 게 타당하다. 신도의 길을 걸으면서 대선 레이스에 참여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가 끝내 본선에 나서게 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최소한 이번 대선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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