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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이코노믹리뷰|기사입력 2007-12-20 00:03 |최종수정2007-12-20 00:12


◇공격경영으로 그룹 일궈… 글로벌 리더 도약은 진행 중◇

약관(弱冠)의 나이에 기업을 맡아 그룹으로 키운 김준기 회장. 그는 요즘 최고 경쟁력을 갖춘'글로벌 기업'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시스템 경영'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등 난관도 많은데….

                                                                  

●"고려대 경제과에 재학 중 자원 입대했던 김 회장이 제대할 무렵 부친의 회사는 자금난으로 큰 위기에 몰려 있었다. 김 회장은 이내 자신의 전공을 살려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동부건설의 전신인 미륭건설은 이런 과정을 통해 1969년 1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동부그룹이 최근 동부제강의 당진아산만 제철공장 기공식을 계기로 포스코 및 현대제철 등과 더불어 철강업계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날 기공식에서 김준기 회장은 감격 어린 어조로 그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20대 때 꿈꾸었던 오랜 소망을 이뤘습니다."

김 회장의 제철에 대한 열정은 최근 세계 6위 웨이퍼 제조업체인 실트론의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매각 대금을 거의 모두 제철공장 전기로 건설비용에 쏟아 부은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부제강의 본격 가동은 그가 그룹의 미래상을 '초우량 글로벌기업'으로 상정하고 있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그는 최근 '도전정신'을 주제로 한 사내 경영 메시지에서 이같이 역설한 바 있다.

"모든 임직원은 회사의 비전과 전략, 혁신이 모두 어우러진 성장 경영 계획을 도전적으로 설정하고 나아가야만 한다."

계열사 모두 국내 제일의 차원을 뛰어넘어 세계 제일과 경쟁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는 이를'기업가정신'으로 요약하고 있다.

"기업가정신은 새로운 제품과 혁신적인 기술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대담하게 도전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혁신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글로벌기업 도전은 《주역》에서 말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요체를 통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사실 김 회장이 걸어 온 길은 줄기찬 '도전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맨몸으로 기업을 세워 창업 20년 만에 회사를 유수 재벌그룹으로 도약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에 해당한다. 그는 1944년에 강원도 동해시에서 부친 김진만 씨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동해시 일대에서 세거(世居)해 온 토호(土豪)였다. 제헌국회의원과 참의원을 지낸 백부에 이어 정계에 진출한 부친은 공화당 시절 무려 7번에 걸쳐 내리 당선돼 국회 부의장을 지낸 당대의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경기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 경제과에 재학 중 자원 입대했던 김 회장이 제대할 무렵 부친의 회사는 자금난으로 큰 위기에 몰려 있었다. 김 회장은 이내 자신의 전공을 살려 기업다운 기업을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약관의 나이에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그룹의 주력사인 동부건설의 전신인 미륭건설은 이런 과정을 통해 1969년 1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약관 나이에 건설업에 뛰어들어

미륭건설 설립 당시 그의 출사표는 간단명료했다.

"기업은 자본주주의 꽃이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이다."

오늘의 동부그룹은 바로 그의 이런 탁견(卓見)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당시 건설업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미8군 공사를 따내기 위해 먼저 회사 내에 국제부를 설치했다. 아무도 국제부를 생각지도 못한 시절에 그가 이런 부서를 설치해 놓고 먼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부건설은 1971년에 미8군사령부 내의 군인 숙소와 대형 식당 건설 공사를 수주하면서 국제수준의 건설역량과 노하우를 쌓게 되었다. 당시 건설 현장을 뛰어다니며 임직원을 독려하는 김 회장을 유심히 지켜본 미8군은 동부건설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공식 추천했다. 사우디에는 이미 동아건설과 대림산업 등 유수한 국내 건설업체들이 모두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업체 모두 도로공사와 터파기 등 단순공사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더구나 입찰과 수송 등을 모두 외국 회사에 하청을 주어 소요 자재를 조달하고 있었다. 자재 반입의 지연에 따른 공기 차질로 엄청난 손실을 빚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한마디로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었다.

중동건설의 적자공사 사례를 통찰한 김 회장은 우선 항만사정과 식수사정, 해상운송 경로 등 대형 복합공사를 수주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사를 마친 뒤 1975년 4월에 쥬베일 해군기지 건설 공사에 응찰했다. 동부건설이 한국 건설업체로는 사상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급공사를 따내는 쾌거를 이룬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치밀한 준비가 있기에 가능했다.

당시 김 회장은 공사 과정에서 무서울 정도로 원가를 절감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질 좋고 가격이 적절한 자재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였다. 그는 미국 상공회의소와 건설협회 등을 수시로 방문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유럽과 중동의 거래처와 상담하기 위해 1주일에 무려 50시간 가까이 비행기 안에서 지낼 때도 있었다. 훗날 김 회장은 공사에 임할 당시의 심경을 이같이 술회한 바 있다.

"우리가 1달러라도 낭비하면 이는 곧 그만큼 조국을 배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부건설이 쥬베일 공사 이후 제2∼3의 대형 복합공사를 손쉽게 따낼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후 동부건설은 미 국방성의 파트너가 된 것을 계기로 1980년에 사우디 국방성 청사공사, 1982년에 사우디 외무성 본청공사 등을 차례로 따냈다. 당시 동부건설의 자자한 명성을 익히 들은 외국의 거래처는 사주가 나이 많은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다가 김 회장이 29세의 젊은 사람인 사실을 알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삼국시대 오나라 손견(孫堅) 떠올라

역사상 김 회장과 같은 약관의 나이에 천하를 호령하며 기업(起業)한 대표적인 인물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견(孫堅)을 들 수 있다. 《삼국연의》는 황건적과 동탁(董卓)의 난이 일어났을 때 촉나라의 유비(劉備)와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가장 먼저 기의(起義)한 것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손견은 어릴 때부터 담략(膽略)이 뛰어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7세 때 부친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해적 10여 명이 상인들의 재물을 빼앗아 강 언덕 위에서 나누는 것을 보고 곧바로 칼을 빼들고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이쪽저쪽을 가리키는 손짓을 해댔다. 이에 놀란 해적들은 관군이 온 줄 알고 황급히 도주했다. 이 소문이 인근에 널리 알려지자 그는 곧 오군(吳郡)의 교위(校尉)로 천거되었다.

그가 반적의 소탕전에 나선 것은 회계(會稽)에서 허생(許生)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였다. 허생의 무리가 회남(淮南) 일대를 진동시킬 당시 조정의 명을 받은 양주(揚州)자사는 2년 가까이 허생의 무리와 대치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때 손견이 양주자사의 허락을 받고 참전해 허생의 영채를 하나씩 점거해 나가자 반적들은 손견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로써 2년간에 걸쳐 회남 일대를 진동시킨 허생의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손견은 하비현 현승(縣丞)으로 있을 당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곧바로 무리를 이끌고 가 인근 마을의 황건적을 소탕했다. 이는 조조와 유비가 기의한 것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다. 이때의 공으로 그는 별군사마(別軍司馬)에 제수되어 낙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황건적이 궤멸될 즈음 거기장군(車騎將軍) 장온(張溫)이 휘하 장수 주신(周愼)에게 보기 3만 명을 이끌고 가 잔당을 치게 하자 손견이 주신에게 이같이 건의했다.

"제가 보기(步騎) 1만 명을 이끌고 가 그들의 양도(糧道)를 끊을 터이니 장군은 대병을 몰아 그 뒤를 치십시오. 그러면 적들이 반드시 피로와 기아로 감히 싸우지 못하고 도주할 것이니 이때 다시 힘을 합쳐 그들을 토벌하면 양주(凉州)는 곧 평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이 이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게 움직이다 역습을 받고 이내 치중(輜重)을 버린 채 황급히 도주했다. 장온이 다시 동탁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 잔당을 치게 했으나 동탁의 진군 행로를 알아 챈 잔당은 오히려 동탁군을 포위해 버렸다. 장온이 속수무책으로 철군한 동탁을 꾸짖었으나 동탁의 응답하는 태도가 매우 불손했다. 이때 손견이 장온에게 이같이 건의했다.

"마땅히 장군의 소환에 즉시 응하지 않은 죄목으로 참수(斬首)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온은 우유부단했다.

"동탁은 황하 일대에서 위명(威名)을 날리고 있는데 지금 그를 죽이면 서정(西征)할 때 기댈 곳이 없게 되오."

그러자 손견이 반박했다.

"명공(明公)은 친히 조정의 군사를 이끌면서 왜 동탁에게 기대려는 것입니까. 동탁은 상관을 무시하고 예를 갖추지 않았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목입니다. 적들이 발호한 지 오래되어 응당 때에 맞춰 토벌해야 함에도 동탁은 안 된다고 하여 출병을 저지하며 군심을 동요시켰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목입니다. 동탁은 명을 받아 출전하고도 전공이 없는 데다 명공의 부름을 받고도 멋대로 늦게 오고 태도 또한 불손하니 이것이 세 번째 죄목입니다. 고래로 명장들 치고 군사를 통솔하면서 참수의 결단을 내리지 않고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온은 끝내 손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만일 장온이 손견의 말을 들었다면 후한의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손견은 무략(武略)도 뛰어났지만 난세에 절실히 필요한 단호한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는 훗날 동부그룹이 영남화학을 인수할 당시 삼성과 효성의 응찰가격보다 무려 170여 억 원이나 높은 응찰가격을 써내 재계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것에 비유할 만하다.

결단력 돋보인 영남화학 인수

손견은 동탁이 태사(太師)가 되어 전횡하자 이내 군사를 이끌고 동탁토벌군에 가담했다. 동탁은 휘하 장수 호진(胡軫)에게 명하여 손견을 치도록 하면서 여포(呂布)를 기독(騎督: 기병대장)으로 삼았다. 손견은 호진이 여포와 불목(不睦)해 동탁군의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노려 동탁군을 대파했다. 얼마 후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던 동탁군의 화웅(華雄)이 야음을 틈타 손견의 영채를 급습했다. 이를 미리 알아낸 손견은 곧 퇴로를 차단한 뒤 매복전술로 이들을 엄살(掩殺)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시석(矢石)을 피해 달아나려던 화웅은 이내 비시(飛矢)를 맞고 말에서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다.

당시 동탁의 대장 화웅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삼국연의》는 이를 멋대로 개작해 관우(關羽)가 화웅의 목을 벤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화웅 못지않게 무용을 자랑했던 동탁군의 여포를 무찌르고 처음으로 낙양을 수복한 것도 손견의 공이었다. 당시 손견은 매복전술로 여포군을 대파하고 낙양으로 입성한 뒤 동탁이 도굴한 능침(陵寢)을 모두 복구하고 종묘 터를 깨끗이 소제했다. 천하인이 손견을 칭송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손견의 탁월한 무략은 당시 동탁의 언급에 잘 나타나 있다.

"주신과 장온 같은 자들이 만일 손견의 계책을 이용했다면 양주(凉州)도 능히 평정했을 것이다. 손견이 비록 지위는 낮으나 식견만큼은 그들을 뛰어넘으니 참으로 인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동탁을 토벌키 위해 기의한 군웅들 중 동탁군을 유일하게 무너뜨린 사람은 손견뿐이었다. 훗날 그의 아들 손권(孫權)이 강동을 기반으로 오나라를 건국해 촉의 유비 및 위의 조조와 더불어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뤄 천하를 호령케 된 것도 바로 손견의 기업(起業)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김 회장이 약관의 나이에 탁월한 지략과 과단으로 오늘의 동부그룹을 기업(起業)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김 회장은 1970년대부터 10년 동안 중동 건설시장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토대로 오늘의 동부그룹을 형성했다. 당시 그가 동원한 기법은 과감한 투자를 통한 적극적인 M&A 접근법이었다. 덩치가 큰 삼척산업과 한국자동차보험, 동진제강, 울산석유화학, 영남화학 등을 차례로 인수한 것은 공격적인 M&A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에 속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약관의 나이에 탁월한 기업관을 세우고, 남다른 발상을 토대로 치밀하게 대비하고, 열정적으로 사업에 임한 데서 가능했다. 그는 이를 소위 '3다(三多)'로 요약하고 있다. 다사(多思 : 많이 생각함) 다학(多學 : 많이 공부함) 다로(多勞 : 많이 일함)가 그것이다.

이 중 '다학'은 '3다' 정신의 정수(精髓)에 해당한다. 이는 당초 쥬베일 공사 당시 김 회장이 현장에서 근로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작업을 독려할 때 내세운 것이었다. 당시 김 회장은 현장을 지휘하며 모든 문제를 기존의 노가다식 경험에 의존해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노동자들이 공사장 주변의 작은 토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하는 것을 뜻하는 일본어 '도카타'에서 나온 '노가다'는 우리말의 '주먹구구 공사'에 해당한다. 그가 볼 때 공사에 참여한 모든 임직원이 학구열에 불타는 학자처럼 겸허한 자세로 당면한 과제를 하나씩 풀어 가는 지혜를 발휘해야만 했다. 김 회장은 곧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김 회장은 '노가다' 로 통하는 공사판에서 나이 많은 기능 사원에게는 경어를 쓰고, 기능 사원과 간부사원의 식탁 구분을 없애는 등 가족적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다. 이는 '노가다' 공사판을 일종의 공부하는 '연구실' 분위기로 바꾸기 위한 심려(深慮)의 소산이었다. "

노가다 공사판을 연구실 분위기로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공부하는 자세로 일해 나갑시다."

'노가다'로 통하는 공사판에서 김 회장은 나이 많은 기능 사원에게는 경어를 쓰고, 식당에서 기능 사원과 간부사원의 식탁 구분을 없애는 등 가족적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다. 이는 '노가다' 공사판을 일종의 공부하는 '연구실' 분위기로 바꾸기 위한 심려(深慮)의 소산이었다.

동부라는 운명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구성원의 자격이 있다는 그의 이런 언급은 정실인사를 극도로 배격하는 그의 용인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부그룹의 임직원이 여타 회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애사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지난 2001년에 삼성이 내세운 소위 '시스템경영'을 적극 도입하기 위해 삼성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한 바 있다. '시스템경영'은 그의 평소 지론이다. 실제로 그는 창업 초기부터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영입하는 용인술을 발휘해 왔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시스템경영'의 궁극적인 성패도 결국 인재의 유무에 의해 결판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근 김 회장은 소위 '동부 미션'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이는 동부그룹의 각 계열사가 참여하는 모든 사업 부문에서 최고의 이익률과 성장률을 달성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 회장이 보여준 그간의 행보에도 적잖은 문제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는 지난 2004년 말에 동부건설의 자회사인 동부월드가 짓고 있는 골프장을 주당 1원에 사들여 인수하려다가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곧바로 계획을 철회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동부건설과 김 회장의 신용도와 명예가 크게 추락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간 김 회장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향후 이와 유사한 행보가 계속 불거져 나올 경우 그가 시종여일하게 내세우고 있는 '흥업보국(興業報國)'의 기치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보다 신중하면서도 사려 깊은 행보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 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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