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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시계바늘을 지난 1999년 10월로 돌려보자. 당시 국민의 정부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 간 ‘빅딜’을 압박하고 있었다.

국내 재계의 맏형격인 두 회사는 합병비율 산정을 둘러싸고 밀고 당기기를 거듭했으나, 공동경영을 요구하는 LG반도체와 70% 이상의 지분을 요구하는 현대전자의 주장이 맞서며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판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1999년은 아파트 분양가가 자율화되고, 신용카드 사용이 권장되는 등 정부가 본격적으로 내수경기 회복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해이기도 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양측간의 협상은 미 컨설팅 기관인 ADL(아서 디 리틀)의 양사 평가를 거쳐 현대전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15개 평가항목 가운데 현대측 우세가 8개 항목이었고, LG가 우세한 항목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시 합병승리의 일등공신이 작년 말 화려하게 컴백한 전인백 현대그룹 기획총괄본부 사장이다. 그는 현대전자 시절, 승리를 보증하는 기획통으로 유명했다.

#장면 2.지난 2000년 8월. 미국의 IT거품이 꺼지면서 반도체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당시 16달러였던 128메가 D램은 연말이 되자 3분의 1 수준인 5.76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더욱이 LG반도체가 외환위기 때 발행한 회사채의 만기가 속속 돌아오며 자금난을 가중시켰다. 합병 후 총 부채는 무려 11조원이 넘었다.

씨티은행이 현대전자에 1조원 규모의 신디케이트론(은행공동 융자)을 추진해 8000억원 가량을 조달해 줬지만, ‘언 발에 오줌누기’격이었다.

정부는 금융시장의 혼란을 염려해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를 도입해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의 80% 가량을 인수했다. 법정관리 카드를 꺼내들며 승부수를 던진 그의 모험은 주효했던 것.

현대전자는 다음해인 2001년 해외 투자자를 상대로 주식예탁증서 발행에 나서 1조6000억원 규모의 GDR(주식 예탁증서) 발행에 성공한다. 그는 당시 자본조달, 그리고 정부와의 협상을 주도하며 살얼음 같은 정국을 헤쳐나간 주역이었다.

#장면 3.지난 2001년 반도체 값이 계속 하락하면서 하이닉스는 채권단에 다시 자금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채권은행단은 매각 쪽으로 결론을 내고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이 도미(渡美)해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협상에 나서게 된다.오랜 협상 끝에 MOU를 체결했으나, 협상 조건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마이크론 주식을 주당 35달러로 쳐서 매각대금이 38억 달러라고 발표했으나, 실제로 들어오는 돈은 32억달러에 불과했다. 때마침 반도체 값이 오르면서 독자생존론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매각 승인 이사회가 열린 2002년 4월 30일, 이사들은 만장일치로 매각안을 부결시키며 정부 관계자들을 경악시켰다.

전 부사장을 비롯한 9명 이사들의 반란이 하이닉스 매각을 좌절시킨 것. 하지만 대가는 컸다.

그는 매각안이 통과된 다음달 회사에서 물러났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지난해 4분기에만 7000억여 원의 순이익을 내며 당시 경영진의 결단이 옳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현대건설 인수 중책 맡아

정부와 채권단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으니, 마땅히 갈 곳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난 2004년 4월에는 디지털 TV·셋톱박스 등에 쓰이는 인터페이스 반도체 전문기업 실리콘이미지(CEO 데이비드 리)의 고문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지난 2003년, 포스코 유병창 전 전무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며 행복한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서울대 동문회 게시판은 지금도 미국 유학 중 교제를 하다 결혼에 이른 이들 커플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신앙생활에도 충실하던 그는, 작년 말 화려하게 컴백했다.

현대그룹의 구조조정본부격인 기획총괄본부 사장이 그의 직함이다. 정보통신 자회사인 현대 U&I의 사장도 겸직하게 됐다. 현대건설을 잠시 거쳐 현대전자에서 잔뼈가 굵은 그의 이력은 발탁 배경을 가늠하게 한다.

국제 통화기금 체제 이후, LG반도체의 빅딜 협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신디케이트론 조달과 더불어 해외투자자를 상대로 1조8000억원 규모의 ADR 발행에 성공했다.

하이닉스반도체 매각을 막는 데도 일조했다. 이러한 승리경험은 가장 큰 자산인 셈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현대건설 확보전에 나설 것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지난 2003년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한 금강고려화학이 현대엘리베이터 물량을 여전히 지니고 있어 경영권 분쟁이 재연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

더욱이 현대인들에게 현대건설은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다. 채권단 관계자들을 회사에서 내보내는 게 당면과제라는 이지송 현대건설 사장은, 기자들과 만날 때마다 정주영 전 회장에 얽힌 추억을 털어놓는다. 현대건설은 현대가 적통의 증표인 셈이다.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다. 현대건설은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인 3238억원 규모의 흑자를 냈다. 매각가가 천정부지로 뛸 가능성이 큰 데다, 금호그룹·군인공제조합 등 인수합병시장의 큰손들도 관심을 표시, 상황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이나 현대산업개발 등의 움직임도 또 다른 변수다. 전 사장은 곧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인수전에 대비할 예정이다.

오랜 공백을 딛고 복귀한 그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경기고등학교, 그리고 서울대 경영학과라는 화려한 학맥, 강원도 출신, 그리고 영어능력, 정몽헌 회장이 땀방울로 일궈낸 현대전자 근무경험 등은 분명 그의 강점이다.

하지만 가장 큰 자산은 승부사적인 기질이다. 빅딜, 하이닉스 매각 부결 등 피가 마르는 순간순간을 항상 승리로 장식했다.

현대건설 인수, 그룹 구조조정을 비롯해 풀어나가야 할 만만치 않은 과제를 앞두고 있는 최고 경영자에게 사실 그보다 더 매력적인 카드도 흔하지 않은 셈이다. 전 사장에게 현대건설 인수는 오히려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