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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은 병든 것처럼 걷는다

Management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도 배우는 고전경영

[이코노믹리뷰 2006-06-20 17:24] (하버드비즈니스 리뷰를 읽다보면 놀라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내로라하는 경영 구루들이 꾸준히 글을 기고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들의 명성에 비춰볼 때 보잘것 없어 보이는 소재의 글들을 쓸 때가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국내 처세 서적에서나 등장할 법한 낙오한 경영자의 재기 노하우를 다루거나, 상사와 잘 지내는 법을 제시한 글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번 글도 크게 다르지느 않습니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점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걸까요. 하버드비즈니스 리뷰는 최고경영자의 비전에 스스로를 동화시키라고 말하는군요. 아마도 진리라는 것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채근담에서 修身 비결을
정관정요서 人事 배웠다”

믿지 못하면 쓰지를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疑人不用 用而不疑·정관정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매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범은 병든 것처럼 걷는다
(鷹立如睡 虎行似病·채근담 )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욕망을 안고 걸음을 걸으면 눈앞은 모두 가시덤불 뿐이다
(人欲路上甚窄 眼前俱是荊棘 塗·채근담)
이승보팬택씨엔아이 사장

지난 2000년, 세계적 데이터베이스 기업인 미국 오라클(Oracle)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괴팍하기로 소문난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래리 앨리슨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2인자 ‘레이 래인(Ray Lane)’ 최고운영책임자(COO)의 급작스러운 사퇴가 빌미가 됐다.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던 그가 회사를 떠나자 자발적인 사퇴인지, 아니면 해고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것.전제군주 래리 앨리슨이 컨설팅 기업 부즈 앨런 해밀턴에서 영입한 그는 8년간의 재임기간에 매출은 무려 10배, 순이익은 3배를 각각 올려놓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창업자와 밀월관계를 유지해 온 터였다.

동양의 정신세계 탐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듯한 ‘보스’에게 전권을 위임받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해 온 그는, 하지만 최고경영자의 비전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이른바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실수를 범하며 분노를 산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 래인의 낙마는 뛰어난 능력이 꼭 성공의 보증수표는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최고경영자의 비전에 스스로를 동화시켜야 한다(You have to get in sync with the CEO). ”경영자들의 바이블이자, 첨단 경영 이론의 보고로 유명한 <하버드 비지니스 리뷰>가 최신호에서 한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꼽은 2인자의 사내 생존 비결의 하나다.

이 경영 월간지는 올해 5월호 표지글(2인자.Second In Command)에서 2인자(COO)의 성공과 실패의 방정식을 분석하며 오라클의 사례를 다시 끄집어 내 관심을 불러일으켰는 데, 이 기사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미국에서도 이른바 인간관계 맺기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온정주의적 정서가 여전히 강하고, 기업 오너들의 영향력 또한 절대적인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 가신을 키우지 않는 특유의 인사 스타일로 역풍을 맞은 현대자동차 그룹 정몽구 회장의 사례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래서일까. 국내에서는 오너 혹은 전문경영인을 막론하고 최첨단의 경영 이론 못지 않게 동양의 오랜 고전에서 가르침을 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그룹도 동양고전의 백미(白眉)로 불리는 《정관정요》에서 지혜를 빌린 대표적인 사례.


정관정요, 채근담 인기 얻어

‘정관의 치’를 활짝 열며 중국 역사 최대의 성군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당 태종의 수성의 노하우를 다룬 이 책은 인재 활용의 보고(寶庫)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창업군주에게 나라를 물려받은 후계자가 수성에 참조해야 할 부국강병의 묘를 제시하고 있어 중국·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폭넓은 인기를 얻어왔다.

‘믿지 못하면 쓰지를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疑人不用 用而不疑)’는 삼성그룹 이병철 선대 회장의 인사원칙도 《정관정요》에 실려 있는 한 대목.

당 태종 이세민과 명재상인 위징이 나눈 이 대화에 등장하는 용인의 법칙이 무려 1000여 년이 넘는 세월을 훌쩍 건너 뛰어 국내 기업의 인사 원칙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것.

‘아시아 제일의 자산운용사 도약’이라는 기치를 걸고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떠오르는 아시아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는 미래에셋그룹의 박현주 회장도 ‘동양의 탈무드’로 불리는 《채근담(採根談)》을 자신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 현장 경영에 접목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영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채근담》은 조일전쟁 당시 20만명에 가까운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던 명나라 신종 대의 홍자성이라는 인물이 저술한 동양 고전. 인생 수양서의 백미로 꼽히는 이 책에서 박 회장이 즐겨 인용하는 문구가 바로 ‘매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범은 병든 것처럼 걷는다(鷹立如睡 虎行似病)’는 대목.

매가 평소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조는 듯 하고, 범의 걸음은 힘이 없어 보인다는 의미인 데,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인사의 원칙이자, 함부로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처세술로도 풀이할 수 있다. 물론 허허실실의 묘를 중시하는 대목으로도 읽힌다.

국내에서 돈이 오가는 길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올해 국가 예산의 20%가 넘는 돈(45조원)을 굴리는 그의 경영 철학을 가늠하게 하는 부분이다. ‘홍초도사’로 불리던 홍자성이 저술한 이 책도 《정관정요》와 더불어 국내 경영자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는 고전이다.

모토로라 코리아·팬택·큐리텔 등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거쳐 팬택씨앤아이 대표에 오른 이승보 사장도 《채근담》을 늘 가까이 두고 즐겨 읽는 대표적인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선호하는 대목은 《채근담》의 여러 경구들 중 주로 ‘욕심과 집착을 줄이라’는 메시지들이다.

‘욕망을 안고 걸음을 걸으면 눈앞은 모두 가시덤불뿐이다(人欲路上甚窄 眼前俱是荊棘 塗)’ 등이 대표적인 문구. 한국전기안전공사의 송인회 사장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고전 마니아.

송 사장은 분열과 혼란을 거듭하던 춘추 전국시대를 비롯해 수·당· 송. 그리고 명·청대 중국인들의 삶의 지혜를 모아놓은 《지전(智典)》을 선호한다.지전은 국내에서 모두 20만여 권이 팔려나간 이 부문 최고의 베스트셀러(박스기사 참조).

범양상선에 근무하다 정치권을 거쳐 이 회사 사장으로 부임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는 특히 자신의 취임에 반대하는 노조를 설득하고, 사내에 정도경영을 뿌리내리는 데 고전의 지혜를 빌렸다고 <이코노믹리뷰>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선인자동차의 배기영 사장도 평소 《책략》 등을 비롯한 고전을 즐겨 인용하는 대표적인 경영자다. 이 밖에 기업 경영자는 아니지만, CEO를 자처하는 손학규 경기도지사도 당나라대의 문헌인 《임제록》에 실린 수처작주(隋處作主)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고전 독법 지나치게 실용적 비판도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진리가 된다’는 의미. 그는 집무실에 이 사자성어를 걸어놓고 매사에 소극적이던 공무원들이 주인의식을 지니고 업무를 처리할 것을 독려했다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수처작주는 재임시절, 경기도의 변화를 이끌어낸 도정운영의 핵심 철학이었던 셈이다.

고전이 꾸준히 인기를 얻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사례는 아니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을 다룬 처세서나 경영서, 그리고 중국의 《사기》 등이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사기혐의로 수감중인 호리에 전 라이브 도어 사장도 감옥에서 한나라의 사가인 사마천의 《사기》를 숙독하고 있다고 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천재 전략가 손자의 병법은 미 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의 군사학 참고 교재로 사용되며 지금도 각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권에서 특히 고전물이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은 물론‘유교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아시아권의 독자들은, 화장실과 곡식창고에 기거하는 쥐들을 비교하며 사람의 잘나고 못난 처지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비롯된다고 독백하는 통일제국 진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사’의 목소리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상의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주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경영 이론을 일방적으로 수입해 오던 국내에서 동양의 고전으로도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면이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고전 텍스트에 자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고전이 지닌 더 큰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일각에서 있는 것도 사실. 한정주 고전 연구회장은 “여불위는 자신의 자식을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의 왕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목숨을 잃는 우를 범했다”며 “국내 경영자들은 장사꾼 여불위의 상술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이러한 교훈은 놓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고전 독법도 이제 좀 더 치밀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동양 고전서 왜 인기 있나

“책 읽는 CEO, 주 고객층 정착”

국내에서 이른바 고전물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는 지난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영웅들의 인재 활용술을 소개한 《변경》은 고전서를 출판부문의 효자부문으로 자리잡게 했다. 발행 첫달에 팔린 3만부를 포함해 지금까지 10만여 권 정도가 판매된 《변경》은 치인의 노하우를 담고 있다.

같은 해 선을 보인 《지전》도 지금까지 20만여 권 정도가 판매되면서 고전 열풍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책. 이달 초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도서전에서도 8만원을 훌쩍 넘는 4권짜리 세트를 찾는 방문객들이 적지 않았다는 게 이 회사 이은정 편집자의 설명이다.

동양 고전서들은 올 들어서는 샤무엘슨의 《자조론》 등 서양의 처세서 등에 밀리며 인기가 주춤하긴 했지만, 여전히 꾸준한 수요가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전언. 특히 경영자들 사이에서 동양 고전물의 인기가 적지 않다 보니, 매년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이들을 타깃으로 한 고전서 발행이 트렌드로 정착해 나가고 있을 정도라는 게 박정하 더난출판 편집주간의 설명이다.

실제로 이 회사는 올 여름 휴가시즌을 겨냥해 인간이 살면서 꼭 지켜야 할 28가지 규칙을 담고 있는 동양고전서 《천규》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이 밖에 김영사에서도 올 가을 출판을 목표로 동양고전서를 준비하고 있다.


고전 연구가가 추천하는 동양 고전

“안씨 가훈, 채근담 놓치지 말아라”

한정주 고전연구회장은 《채근담》과 더불어 법가사상가인 한비자의 사상을 다룬《한비자》,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 그리고 중국 육조 말기 명문가의 가훈인 《안씨 가훈》 등을 추천도서로 꼽았다.

그는 특히 한비자는 읽기에 따라서 독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있는 책이라며 주의깊은 독법을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채근담에 실려 있는 몇몇 경구들을 발췌해 실었다. (편집자 주)

풀밭을 맨발로 거닐면 들새도 경계심을 풀고 다가온다
(철리간행 야조망기시작반. 撤履間行 野鳥忘機時作泮)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말며, 어두운 곳에서도 속이지 말라
(소처불삼루 암중불기은. 小處不渗漏 中不欺隱)

남에게 베푼 일은 잊어버리고, 신세진 일은 잊지 말라
(아유공어인불가념 이과즉불가불념. 我有攻於人不可念 而過則不可不念)

큰 공을 세웠을지라도 자랑을 하면 허사가 된다
(개세공로 당부득일개긍자. 蓋世攻勞 當不得一個矜字)

악행을 너무 엄하게 책망하지 말고, 선행을 지나치게 권하지 말라
(공인지악 무태엄 요사기감수. 攻人之惡 毋太儼 要使基堪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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