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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소장의 휴넷 강의

“성공한 군주들 지식 경영 대가였다”

2010년 12월 14일 11시 18분

정조는 ‘을시(오후 10시 이후) 부터 경서, 역사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독서광이었다

지난 12월7일 휴넷이 주최하고 아시아미디어그룹이 후원하는 제35회 CEO월례 조찬모임에서는 역사대중화 작업에 앞장서온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소장의 강연이 있었다. ‘역사에서 배우는 리더십’을 주제로 열린 이날 세미나에서 이 소장은 개명군주의 대명사인 정조와, 망국의 군주 고종 등 조선시대 군왕들의 리더십을 집중 분석했다. <편집자주>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북촌 마을은 조선시대 노론들이 주로 거주하던 고급 주택가였다. 권세가들은 경복궁 임금 가까운 곳에 살았고, 출사하지 못한 이들은 남산골에 머물렀다. 조선시대 최고 권부인 경복궁과 지척인 북촌은 정보전의 전진기지였다.

최고 권력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세도가들의 주요 관심사다.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정조의 취임 일성은 북촌의 노론들을 집단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 살려 달라 울부짖던 아버지, 자신을 핍박한 노론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던 것.

노론 대신들은 정조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세력마저 포용한다. “정조는 부친이 사망하던 13년 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부친을 죽인 적당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노론을 포용한 이덕일 소장의 평가다. 품에 않은 호학(好學)의 군주인 그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 당장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처량한 신세였다. 그를 폐세자하려는 노론의 핍박과 음모는 그칠 줄 몰랐다.

영조가 대리청정과 군사지휘권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왕위 등극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이 소장의 분석이다. 그런 정조에게 ‘회환’이 없을 리 없었다. 이 소장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서는 밀려오는 슬픔에 풀을 뜯다가 손톱이 죽어 까맣게 변할 지경이었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그는 결코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돌리지 않았다. 정조가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정조는 왕이 독서를 하는 시간대를 뜻하는 ‘을시(오후 10시 이후)부터 경서, 역사서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은 독서광이었다. 그는 새벽 4시경이면 잠에서 깨어나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하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결코 아니었다. 청요직까지 장악한 노론 세력의 손과 발을 묶기 위한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약용을 비롯한 규장각 개혁 세력을 양성하고, 금위군 격인 장용영을 설치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천주교를 사실상 용인했다. 노론 견제의 트로이카다. 주자학, 군권을 장악한 노론 세력의 사상 공세와 군사력에 맞서기 위한 심모원려였다.

실패한 군주였던 고종은 정사를 논하는 경연이나 백성의 안위는 도외시했다

정조, 아버지 죽인 노론마저 포용

정조는 현실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그가 추구한 대도무문의 길이 꽃을 피운 것이 바로 경기도 수원의 화성 축조였다.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급했으며, 근대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이 신도시를 조성한 정조는 부국강병의 길을 걷고자 했다.

“화성 축성의 정치적 의미보다는 이러한 경제적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조는 이 지역에 만석거라는 저수지를 조성했으며, 거대한 황무지도 소출이 많은 토지로 개간했습니다.” 대유둔으로 불린 이 토지는 단위면적당 소출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는 것이 이 소장의 설명이다.

한양 경복궁 좌우로 흐르는 도로를 본따, 십자형 도로도 닦았다. 비극의 삶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정조가 세상을 뜬 후 전국에는 백성들이 쟁기를 드는 민란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 소장의 설명이다.

조선은 정조 사후 안동 김씨, 달성 서씨, 풍양 조씨 등 소수의 가문이 전권을 휘두르며 쇠락의 길로 빠져든다. 정조에게는 공신들을 제거해 아들의 치세를 뒷받침할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없었다. 조선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마지막 왕족 대원군을 내쫓은 패륜의 군왕이 바로 고종이었다는 것이 이 소장의 설명.

고종, 경복궁에 전기 설치해 밤새 가무

개혁군주 정조와 대비되는 군왕이 조선의 고종이었다. 44년간 재위에 있던 그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일본 부국강병의 길을 연 메이지 천황과도 비교되는 최악의 군주였다. 절대 권력의 유지에 몰두하던 그는 자신의 지원 세력마저 하나둘씩 제거하며 자멸의 길을 걷는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혁파를 제거한 이 군주는 온건개혁파의 몰락도 외면한다. 청일 양국의 협공으로 동학 농민군도 잃게 된 고종이 기댈 인물은 매국노 이완용뿐이었다.

고종이 급진개혁파, 온건개혁파, 동학농민군을 차례로 제거한 이면에는 강력한 권력욕이 있었다는 것이 이 소장의 분석.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은 이러한 권력욕의 정점이었다. 이 소장은 “아관파천은 대한제국의 헌정을 무력화하고, 절대 군주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진단한다.

그런 고종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에도 이완용을 극진히 대우했다. 자신의 좌우익을 다 쳐내고 왕위에서도 쫓겨난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 바로 일본과 가까운 이 권신이었던 것. 고종을 재조명하는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데, 저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아는지 의문이라고 이 소장은 되묻는다.

정조와 고종이 걸었던 길은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린다. “고종은 전깃불을 설치하고, 경복궁에 밤새 불을 밝히고, 기생들과 놀다가 다음날 정오가 돼서야 일어나 정사를 살폈어요. 이런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겠지요.”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는 경연이나, 백성의 안위 따위는 고종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운명이 후학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덕일 소장은 “과거사에 매달린 군주들 가운데 성공한 이들은 결코 없었다”며 “현실의 권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라고 강조한다. 역사학은 과거를 거울삼아 오늘과 내일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미래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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