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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2107&idxno=568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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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은 1990년대 이후 ‘좌우’로 흔들려온 간판 공기업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부침(浮沈’)을 겪어온 이 공룡기업은 현 정부 들어서도 다시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민간 경영인 출신 CEO를 맞아들인 가운데 ‘좌파 정부’가 쪼갠 자회사들을 재통합하는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라 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는 이 공룡기업을 분할하며 자회 사간 ‘경쟁의 효율성’을 내세웠다. 반면 현 정부 들어 재통합 논의가 고개를 들면서 이번에는 ‘규모의 경제’ 이론이 득세한다.

덩지를 다시 키워야 연료의 대량 구매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강동원 전 농수산물 유통공사 감사는 하지만 공기업 개혁의 문제는 결국 사람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참여정부 당시 공기업 수장 일부는 인사권자를 ‘고졸’이라고 비하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감사활동을 방해하는 구태를 거듭했다.

그리고 현 정부 들어서는 한동안 사라졌던 군장성 출신의 감사들이 재등장하며 공기업 운영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강동원 전 감사를 지난 8일 인터뷰했다.



감사실장이 하루는 제게 와서는 조언을 하더군요. 사장이 의견이 있냐고 물으면 ‘가만히 있다 이의 없다고만 말하면 된다’는 게 요지였습니다. 사장을 대할 때는 어떤 말투로 얘기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었어요.


다들 편히 있다 가는 자리가 공기업의 ‘감사’인데요. 그때는 왜 그렇게 각박하게 구셨습니까.
농수산물유통공사의 최고경영자가 정치권 거물의 후원으로 이 공기업에 입성한 분이었습니다. 국내 최고 학부 출신의 명망가가 운영을 하는 공기업의 운영 실태가 가히 충격적이었어요.


공기업의 방만한 운영 실태야 공공연한 비밀이 아닙니까. 다들 알고서 부임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임 감사가) 인수인계를 좀 해줄 줄 알았는데…. 감사실도 문패만 내걸고 있었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전체 직원이 6명에 불과했어요. 간부를 빼면 4명에 불과했죠.


IMF 이전에는 노량진 수산시장, 매일우유 등이 모두 공사 소속이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 인원으로 감사업무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합니다.(웃음) 감사실장은 자꾸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하구요. 저녁 회식을 하자고 했더니 그의 답변이 놀라웠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그런 전례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웃음) 전임 감사들이 감사실 직원들과 저녁 식사 한번 한 적이 없었다는 얘깁니다. 지금이야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웃기도 합니다만, 당시에는 정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해 보시지 그랬습니까.
부임 열흘 만에 이사회가 열렸는데, 감사실장이 제게 조언을 하더군요. 사장이 의견이 있냐고 물으면 ‘가만히 있다 이의 없다고만 말하면 된다’는 게 요지였습니다. 사장을 대할 때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말투’까지도 일일이 알려주더군요.(웃음)


‘감사’를 거의 왕따로 만드는 분위기였나 봅니다.
사장 중심의 집행부가 감사실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어요. 해외 지사는 3년, 지사는 2년마다 감사를 했는데, 그나마 (직원들이) 지사 감사를 나가면 그냥 놀다가 왔어요. 고스톱 치고 향응도 받고, 그러다 돌아온 거죠. 본사는 감사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경영진을 견제할 감사 자리에 기무사 출신의 장성이 다시 왔다는 점입니다. 참여정부 때 사라진 군 출신 감사가 현 정부 들어 다시 등장한 거죠. 군인들이 농수산물 유통 분야에서 과연 어떤 형태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 솔직히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군 출신 감사들처럼 모르는 척 하지 그러셨어요
취임 9개월이 지나니 퍼뜩 정신이 들었어요. ‘인사명부’를 가져다 임직원 현황을 꼼꼼히 분석했습니다. 석 달 정도 말 그대로 수능 공부하듯이 자료를 점검했습니다. 경남 김해의 장미수출단지를 비롯해 현장도 부지런히 탐방했습니다.


뾰족한 수가 보이던가요.
생일을 맞은 직원들에게 거의 매일 이메일로 축하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판에 박은 듯한 내용은 지양했습니다.

그 직원의 고민거리를 먼저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맞춤형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견제는 없었습니까.
감사원에 투서를 보낸 이들도 있었습니다. 감사가 자꾸 엉뚱한 일을 벌여서 농림부가 예산을 삭감할 것이라는 식의 ‘비난’도 나돌았어요. 사내에 사장과 감사 등 ‘태양이 둘’이라는 비판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군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을 어떻게 돌파했습니까.
감사일지 1년 치를 내부 인트라넷에 공개했어요.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비난이 거셌어요.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음해였어요.


결국 그 승부수가 먹혀들지 않았습니까. 농수산물유통공사가 청렴도 평가에서 수위를 차지했습니다.
부임한 지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입니다. 미국 출장을 다녀오니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325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5년도 청렴도 측정 결과 공사가 당당하게 수위를 차지한 거죠. 유통공사가 한국전력을 비롯한 모든 공기업들을 제치고 1등을 한 겁니다.


국내 공기업 평가는 규모가 작은 공기업에 불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한전 등을 제쳤어요.
덩지가 큰 공기업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평가를 하니 큰 기업은 항상 앞서가고, 석탄공사, 광업진흥공사 등 열악한 곳들, 농업 관련 공사들은 항상 뒤처질밖에요. 그런데 농수산물유통공사가 3년 연속 ‘1등’을 했습니다. 이변이었죠.


노무현 대통령이 치하를 할 만했군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감사 일지를 화제로 삼으며 제게 기록물을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라고도 하셨습니다.


5공이나 6공 때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농수산물유통공사에도 당시 군 출신 감사들이 대거 낙하산으로 왔습니다. 공사 직원인 운전기사는 사장을 출근시킨 뒤 그 집으로 이동해 다시 사모님 잔심부름을 했습니다.


장군 출신 감사들이 온갖 추태를 부렸군요.
장군뿐이겠습니까. 가족들도 마치 상전처럼 굴었어요. 감사의 대학생 딸은 반말로 공사 소속의 운전수를 툭하면 호출했어요.

그러면 기사는 즉각 달려가야 했습니다. 이런 감사들이 과연 공기업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을까요. 낙하산의 폐해죠.


본인은 ‘낙하산’이 아니라고 보십니까.
‘낙하산’이라고 다 똑같은 ‘낙하산’은 아닙니다. 전문성이 있어야겠죠.(웃음) 그리고 현 정부에서 그런 비판을 하는 인물들 중에는 자신이 과거 공기업에서 ‘낙하산 감사’로 근무한 사례가 ‘다반사’입니다.


참여 정부는 공기업 평가에 성과주의 잣대를 도입하지 않았습니까.
참여정부 시절, 공기업 CEO 연봉이나 임직원 인센티브를 보면 회사별로 천차만별입니다. 경영자의 경영성과를 반영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입니다.


참여정부는 한전 민영화를 사실상 포기했어요. 현 정부는 이 공룡기업의 재통합에 나섰습니다.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 정책이 오락가락한다는 점입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는 한전을 쪼개 발전사들이 경쟁하게 되면 효율성을 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현 정부는 조직을 통합하면 규모의 경제로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잘못된 정책이라면 ‘궤도’를 선회할 수 있는 건 아닙니까.
정책 효과를 거둘 때까지 일정 시간이 소요됩니다. 한전 민영화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정책 기조를 통째로 바꿔버리면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참여정부 시절 유력 정치인의 지지를 등에 업고 공기업 수장이 된 서울대 출신은 대놓고 대통령을 험담했습니다. 대통령이 고졸 출신이어서 될 일도 안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임직원들이 있는 데서 하곤 했습니다.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어떻습니까. 현 정부 출범 이후 뚜렷이 나아진 점이 있습니까.
뒷 걸음질하고 있습니다. 감사 자리에 기무사 출신의 장성이 다시 왔어요. 참여정부 때 사라진 군 출신 감사가 현 정부 들어 다시 등장한 거죠. 다시 과거로 회귀했다고 봐요.


감사 시절 경영자와 타협할 여지는 없었습니까.
이 공기업 사장은 국내 최고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유력 정치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참여정부 공기업 수장이 된 그는 대놓고 대통령을 험담했습니다.

대통령이 고졸 출신이어서 될 일도 안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임직원들이 있는 데서 하곤 했습니다.


하극상을 저지른 셈이군요.
자신이 좌파 정부의 인사로 낙인이 찍히는 걸 두려워한 측면도 있는 것 같고…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다 놓아버린 탓이 큽니다. 통제가 되지 않았어요.


현 정부가 참여정부의 ‘실패’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까.
공기업 평가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담금질해야 합니다. 공기업 평가위원이 15명 정도입니다.

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수백여 개의 공기업을 평가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현 정부가 요청을 한다면 제가 감사 시절 얻은 개혁의 노하우를 충분히 공개할 의사가 있습니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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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의 대북 휴민트(human intelligence)가 무너졌다는 비판이 김정일 사망을 계기로 자주 등장하는데요.
일찌감치 대북 정보라인의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가 있었네요.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78(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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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공공임대정책 변천사

[임대주택 2.0 시대]주거복지 量에서 質로 ‘업 그레이드’

2011년 03월 07일 14시 20분
80년대 본격적 주거 안정정책 채택…DJ정부 ‘소셜 믹스’로 사회통합 추진

분노한 민심은 들불처럼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확산되며 독재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아프리카. 중동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튀니스의 ‘재스민’은 하루 1~2달러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젊은이였다.

분노한 민심이 때로는 거대한 배를 순식간에 뒤집어 놓는 것이 역사의 순리이다. 공공 임대 주택은 자본주의의 발원지인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행됐다.

영국의 근로자들은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의 비좁고 위생 상태도 엉망인 골방에서 가족들과 힘겨운 삶을 살았다. 주택 임대료 인상에 항의하는 근로자들의 불만을 달래는 일이 영국 정부로서는 시급한 과제였다.

영 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공공 임대 주택 정책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이다. 근로자와 자본가, 정부 삼각 타협의 산물이었다. 일제 점령 시대인 1945년까지, 식민지 조선에는 독자적인 공공 임대 주택 정책이 없었다. 강권 통치를 일삼으며 만주 침탈에 전력을 다하던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조선인들의 주거 문제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도 집권 초기 공공 임대 주택은 관심 밖이었다. 군사정부는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정책과 경제개발 정책을 양 날개로 삼아 정통성 문제를 정면 돌파하고자 했다.

이 시기의 투자 우선순위는 제조업 부문과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산업 기반 시설의 확충이었다. 임대 주택은 물론, 일반 주택 정책도 관심권 밖이었다. 정부의 관심이 주택 부문에 미치지 못했으며, 임대 주택 프로그램도 개발되지 못했다. 임대 주택의 효시는, 지난 1962년 대한주택공사가 마포구 도화동에 9-15평 규모로 지은 마포아파트였다.

제도권 임대 주택의 신호탄이었다. 6년 후, 김현옥 서울시장은 해발 203미터 천연동 산허리에 지은 금화 아파트를 짓는다. 도심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며 오갈 데 없어진 철거민들을 위한 임대 아파트를 건설한 것.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김현옥 서울 시장은 철거민용 아파트조차 산 위에 지었다는 것. 산 중턱에 아파트를 올려야 청와대에서 잘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후일담이다. 마포구 창전동에 지은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것도 따지고 보면 김 시장의 권력 지향이 한몫을 한 셈이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부는 주택부문에 비로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LH공사(당시 주택공사)는 1971년 개봉동에 서울 최초의 임대아파트를 준공했다. 당시의 공사현장 전경.LH공사(당시 주택공사)는 1971년 개봉동에 서울 최초의 임대아파트를 준공했다. 당시의 공사현장 전경.

1962년 마포아파트가 제도권 임대주택의 효시
부실 시공 와우아파트 붕괴참사 큰 아픔 겪기도
5·6共 때 밀어부치기식 물량공세 주거안정 한몫




LH공사는 아파트의 질을 높여 임대주택에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다. 판교 임대주택단지전경.LH공사는 아파트의 질을 높여 임대주택에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다. 판교 임대주택단지전경.

1993년 임대주택법 개정 중산층까지 공급 확대
DJ정권 때 ‘임대-분양 50대50’ 사회적 혼합정책
최근엔 입주민 삶의 질까지 배려한 성숙단계 진입


3공화국, 철거민 이주 목적 ‘생색내기’

정 부의 공공주택 정책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 이후. 대한주택공사는 1971년 서울 개봉지구에 13평 규모의 임대 주택 300여 호를 공급했다. 이 주택공급을 신호탄으로 1980년까지 10년 동안 6만 4974호의 임대 주택을 건설했다. 임대 기간은 대부분 1~2년. 호칭이 단기 임대 주택 또는 분양 조건부 임대 주택이지, 말 그대로 생색만 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걸고, 공업화에 매진하며 농촌에서 근로자 예비군들을 대거 도시로 끌어올린다. 조국 근대화의 역군으로 불린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달동네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1970년대 임대 주택 공급의 목표는 무주택 영세민의 생활기반 구축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서울시의 요청으로 도시계획사업으로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철거민을 상대로 임대 주택을 특별 분양했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공업화에 매진한 3공화국은 분양 위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정부의 임대 주택 정책은 거의 무의미한 실정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


80년대 들어 법-제도적 큰 틀 갖춰

광 주 민주화운동을 군홧발로 진압하고 권력을 움켜쥔 5공화국 정부는 김재익씨를 경제수석으로 영입해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한 경제 자유화의 물결에 동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5공화국은 통금 제한을 풀었으며, 여행 자유화 조치를 실시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임대 주택 정책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저소득 계층의 주거 부담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감안해 임대 주택 육성 방안을 발표했다. 1981년, 정부는 주택 임대차 보호법을 제정했다. 또 3년 후, 임대주택건설촉진법을 제정해 임대 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국내 공공임대 정책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 노태우 대통령이 추진한 200만호 건설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따른 주택 수요는 높은 데 비해 주택 공급은 절대량이 부족했다. 이러한 양적 부족 사태는 국가적으로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때 로는 부동산 폭등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거나 위화감을 형성시켜 서민들의 심리적 상실감을 불렀다. 1989년 2월에는 도시 영세민의 주거 안정을 위해 3조5000억 원을 투입해 영구 임대 주택 25만호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공공임대 주택 양에서 질의 시대로

6 공화국 정부는 1인 가구, 노인 가구 증가와 더불어 주택 가격 안정으로 임대 주택 수요가 90년대 들어 급증할 것으로 보고, 임대 주택 공급 확대 방안을 수립했다. 지난 1993년 5.8%수준의 임대 주택 재고를, 2000년대 초반까지 10% 수준 까지 늘려 나간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신경제5개년 계획상 주택부문과 관련한 정책 방향은 주택의 안정적 공급, 재고 주택의 질적 수준 향상 등이다.

남영우 나사렛대학교 부동산신학과 교수는 “공공 임대 주택을 더 많이 짓고 그 시설을 입주민의 생활 방식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설계하는 일도 중요하다”며 “공공 임대 주택 역시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는 장소, 삶의 거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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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NEXT 로컬(Local)/NEXT 로컬 트렌드 | 2011.11.15 14:27 | Posted by 영환
한때 일본 소니사를 비롯한 일본대기업과 외국기업이 대거 공장을 설립하면서, 수출자유지역이 있는 마산은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일본 버블 붕괴후 소니사를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동남아로 기지를 옮겨가면서 마산은 일자리가 줄고, 활역을 잃기 시작했다. 마산은 90년대 2000년대를 거치며 쇠퇴일로를 걷다가 2010년 창원 통합시에 흡입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창원시는 마산과 비교가 안되는 마산의 위성도시 수준이었으나 제조업 기반의 도시가 급증하면서 2010년엔 세계 살기 좋은 도시 1위에 선정되는 명예까지 지니게 된다. 불과 3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2015버블붕괴그날이후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제일반
지은이 한문도 (KLICOR.EConsulting,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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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전스’에서 성장 해법 찾는 경영자들

“당신도 크로스오버형(crossover) 리더입니까”

2010년 06월 29일 16시 33분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인사이트 트립’서 통찰력…
융복합시장 급성장…2015년 202조원 규모



잔잔한 미풍이 허리케인으로 바뀌며 지축을 뒤흔드는 양상이다. 컨버전스는 산업 지도를 바꾸는 판도라의 상자다.

SK텔레콤은 하나은행과 손잡고 카드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밥솥 브랜드로 널리 알려진 쿠쿠전자는 정수기 사업에 진출하며 웅진코웨이에 도전장을 던졌다. 제조와 서비스의 융합은 신시장 창출의 방정식이다.

금호타이어는 타이어와 서비스를 통합한 T스테이션으로 ‘실지(失地)’를 회복했다.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전전긍긍이다.

히말라야에서 성장의 방정식을 구하는 컨설팅 업계의 경영자, 인사이트 트립에서 아이디어를 찾는 카드사 사장, 젊은 대학생들과 교유하며 새로움을 수혈하는 금융권의 노경영자를 비롯한 현대판 ‘율리시즈’들의 컨버전스 트렌드 해법에 주목했다. <편집자 주>




지난 2006년 7월, 베이스캠프가 있는 히말라야의 로체샤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 우뚝 선 산봉우리를 휘감고 몰아치는 바람은 매서웠다.

김경준(47)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는 히말라야의 눈 덮힌 풍경을 생생히 기억한다. 해발 5000m 고지에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다웠다.

매년 두 자릿수 이상 성장률을 보이는 글로벌 기업의 한국 자회사. 당시 이 기업의 전무이던 그는 국내 재벌기업들을 상대로 성장 전략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사였다.

서울 여의도 빌딩 숲을 누비며 성장의 덫에 걸린 고객사들의 고민거리를 씻어주는 것이 그의 주요 업무였다. 하루가 다르게 팍팍해지는 시장 환경은 최고경영자(CEO)들의 골칫거리이자, 늘 새로운 전략을 제시해야 하는 그의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히말라야행을 돌연 선택했을 때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고들 했다. 히말라야의 전설로 통하는 산악인 엄홍길과의 만남은 새로웠다.

컨설턴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무뚝뚝한 산 사나이는 리더십의 교범이었다. 엄홍길씨는 ‘히말라야 등반’이라는 ‘구도 행위’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뛰어난 마케터였다.

엄씨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직해 가치를 새로 만들어내는 컨버전스의 달인이었다. 휴먼원정대가 그 백미였다.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결합해 등반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산악인을 만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엄혹한 도전 속에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강인함도 빼놓을 수 없는 신선함이었죠.”


엄홍길 산악대장이 주도한 ‘휴먼원정대’는 산악인이 만들어낸 화려한 프로젝트였다.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사방이 온통 눈으로 덮인 히말라야 설원이라는 색다른 공간에서 문득 찾아온 깨달음은 한 산악인에서 비롯됐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0년 6월22일. 한국경영학회 주최로 열린 컨버전스 세미나장.

김 대표가 기조연설을 한 컨버전스 세미나 행사장은 이 새로운 트렌드에서 성장의 기회를 엿보려는 최고경영자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현장에서 제품이나 서비스를 직접 판매하는 기업인들의 위기감은 말 그대로 대단합니다. 애플이 휴대폰 업체 노키아와 경쟁을 할 것이라고 수년 전에 누가 예상을 했겠습니까.”

김 대표는 요즘 컨버전스 강의를 한다. 수년 전 히말라야행에서 만난 엄홍길 산악대장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컨버전스의 고수였다.

국내 시장의 강자들이 컨버전스 관련 세미나장으로 몰리는 이면에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주도하며 비즈니스 지형을 바꾸는 담대한 도전자들이 있다.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도 바로 여행에서 아이디어를 구하는 최고경영자다. 레드오션으로 변모한 카드 업계에서 독특한 마케팅으로 순항을 거듭하는 이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인사이트 트립(insight trip)’으로 불리는 여행에서 카드 업계의 변화를 주도할 통찰력을 얻고 있다.

잠재적 경쟁자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정영학 렉스마크 코리아 사장은 빅블루 IBM에서 분사한 이 글로벌 기업의 한국시장 공략의 첨병이다.

이 회사의 복합기는 프린터, 팩스기, 복사기, 스캐너 등을 하나의 기기에 통합한 대표적인 컨버전스 상품으로 이 분야에서 활동하던 단품시장 강자들의 몰락을 부른 장본인이다.

프린터 시장의 터줏대감들을 무너뜨린 이 글로벌 기업의 복합기는 프린터보다는 ‘지능형 컴퓨터’에 가깝다는 것이 정 사장의 설명이다.

문서 복사와 동시에 정보를 읽어 들여 원본은 복합기에 내장된 하드디스크에 남겨놓고, 미리 지정한 상대방의 이메일로 전송하는 기능은 이 업체의 자랑거리다.

고객사의 네트워크(SI)는 이 복합기를 ‘전사적 자원관리(ERP)’ 시스템의 한 부분으로 바꿔주는 ‘도우미’다.

고객사 전체에 몇 대의 복합기가 운용되고 있으며, 이들 복합기에 장착된 토너나 종이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등도 간단한 프로그램 조작으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 프린터의 놀라운 진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업체의 한국시장 공략을 주도하는 정 사장도 이른바 ‘하이브리드형 경영자’라는 점이다.

수십여 년을 글로벌 기업에서 활동한 그는 하드웨어와 네트워크, 마케팅(휴렛패커드) 분야를 두루 거친 팔방미인형 경영자다.

프린터의 진화는 컨버전스의 첫 단추에 불과하다. 컴퓨터와 휴대폰의 컨버전스로 등장한 스마트폰은 노키아,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주도하던 휴대폰 업계의 산업지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다.

김경준 대표는 “지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로 기술과 기술의 결합, 제품과 제품의 결합을 의미하던 컨버전스의 범위가 시장, 산업, 문화 영역을 비롯한 전 영역으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국악, 사진, 문학, 상상력을 주제로 한 경영대학원 과정이 최고경영자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영국의 프리미엄 위스키 브랜드를 비롯한 ‘이종산업’에서 고속 성장의 해법을 엿보는 경영자가 바로 정태영(51) 현대카드 사장이다.


인사이트 트립서 통찰력을 얻다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매년 ‘인사이트 트립(insight trip)’을 떠난다. 레드오션(red ocean)으로 변모한 신용카드 업계에서 톡톡 튀는 마케팅으로 순항을 거듭하는 이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우리말로 통찰력 여행이라는 이 독특한 이름의 해외 탐방길에서 카드 업계의 변화를 주도할 트렌드,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 변화의 ‘통찰력’을 얻는다.

그는 지난해 살림의 여왕으로 유명한 마샤 스튜어트의 사무실을 방문해 이 회사의 라이프 스타일 잡지인 <마샤스튜어트 리빙>의 한국판을 같이 내기로 합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 사장은 또 아이폰 인기 앱인 자가트(zagat)를 만든 레스토랑 가이드북 제작업체 ‘자가트’와도 공동사업을 하고 있다.

<2010 서울 레스토랑 지도>를 만들어 선보인 정 사장이 관심을 기울이는 또 다른 영역이 바로 주류, 백화점을 비롯한 이종 업계다.

영국을 비롯한 구미권의 브랜드 컨설팅 회사는 정 사장이 즐겨 찾는 방문 1순위다. 정 사장은 영국 프리미엄 위스키의 브랜드 전략과 디자인 등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후문이다.

그는 인사이트 트립에서 자사의 비교우위를 빠른 속도로 카피하는 경쟁 상대를 따돌릴 아이디어를 구한다.

인사이트 트립은 국내 카드시장의 신선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 회사 도약의 자양분이다.

‘슈퍼 콘서트’ ‘슈퍼매치’를 비롯한 빅 이벤트로 카드회사 마케팅의 영역을 확장해온 정 사장은 요즘 또 다른 시도로 주목을 받고 있다.

고객들의 소비 성향을 분석해 바람직한 소비 포트폴리오를 권유하는 서비스가 그것이다. 전통적인 카드 회사의 밸류 체인에 ‘고객 컨설팅’을 더한 시도다.

인사이트 트립은 비단 현대카드의 전유물은 아니다. 작년 12월, 삼성경제연구소의 세리(SERI) CEO 강좌의 수강생이던 최고경영자 10여 명은 이탈리아 피렌체여행을 떠나 화제를 모았다.

인문학자로 유명한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학 교수와 함께 르네상스 혁명을 이끈 중심지를 돌아보러 간 것.

르네상스 혁명을 주도하던 피렌체의 도시 경쟁력이 화두였다.
또 이 도시의 번영을 주도한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사람들이 신학적 사고를 극복하고, 이 도시의 번영을 주도해가는 과정에도 주목했다.

김 교수는 매일 10여 시간씩 열흘 동안 특강을 하는 강행군을 했다는 후문이다.


국내에서 ‘컨버전스’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지난 1993년경이다. 복합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주인공은 삼성그룹의 변화를 주도하던 이건희 회장이라는 것이 컨설팅 업계의 진단이다. 지난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신경영’은 물론 ‘복합화’ 제안도 포함돼 있다.


젊은 세대에서 성장의 기회 엿보다
“손님 만날 일이 많았던 1970년대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지. 앉은 자리에서 10잔도 마셨어.

그러고 나면 화장실로 달려가서 손가락을 집어넣고 토하고 그랬지. 그렇게 한 7개월 지냈더니 더 이상 못 마시겠더라구.”

젊은 세대와의 교유에서 변화의 흐름을 엿보는 최고경영자가 바로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이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을지로에 있는 30년 단골 이태리 식당 ‘라칸티나’를 방문한다.

대학 졸업을 앞둔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들을 만나 자신의 젊은 시절과 은행권 성공 방정식을 들려준다.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은 금융지주회사 최고경영자가 빠뜨리지 않는 월례 행사다.

그는 참석자들을 상대로 넥타이 고르는 요령부터 젊은 시절 고생담까지, 시시콜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젊은 후배들은 금융권의 장수 CEO가 젊은 감각을 받아들이는 창구이자, 미래의 소비자들을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이 만남을 “기쁨이자, 기회”라고 평가한다. 국내 금융사들은 보험·은행·증권·자산운용 부문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혀가며 규모의 경제와 더불어 ‘부문별 시너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고 있다.

하나금융지주는 통신사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고 모바일 카드 시장 공략에 나서는 등 금융권을 뒤흔드는 컨버전스 추세에 비교적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는 평이다.
“경영자에게 필요한 아이디어의 80%는 경영의 테두리 밖에서 나온다.”

게리 헤멀 시카고대학 교수의 발언은 시사적이다. 최고경영자들이 피렌체나 히말라야로 떠나거나, 젊은 세대와 교유하는 배경을 가늠하게 한다.


강력한 플랫폼 지닌 기업이 컨버전스 주도
국내에서 복합화(컨버전스)라는 용어를 사용한 주인공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라는 것이 컨설팅 업계의 정설이다. 지난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신경영’과 더불어 ‘복합화’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대표의 분석이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 1990년대 초반 공식화한 컨버전스의 트렌드는 최근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산업과 산업이 서로 섞이며 기존 산업의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는 단계로 진입 중이다.

이러한 변화에서 성장의 기회를 포착한 경영자들의 특징도 뚜렷하다.
지난 1990년대 초반 ‘빅 블루’ IBM을 파산 위기에서 구해낸 루 거스너 전 회장은 제조업과 서비스의 컨버전스에서 이 공룡기업의 살길을 모색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팔미사노 후임 회장은 컨설팅 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 쿠퍼스를 인수하며 서비스부문으로 무게 중심을 점차 옮겨간 주역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애플의 경영자인 스티브 잡스가 컨버전스에서 성장의 기회를 선제적으로 포착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괴짜 경영자는 강력한 플랫폼을 구축하고 대만의 휴대폰 업체,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등을 자사 주도의 생태계에 끌어들여 노키아나 삼성전자, LG전자가 공들여 구축한 휴대폰 산업 내 포지셔닝을 단숨에 뒤흔들고 있다.

김경준 대표는 “강력한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낼 ‘플랫폼’이 누구의 소유인지가 결국 경제적 관계를 바꾼다”고 강조한다.

구글, 애플을 비롯한 글로벌 무대의 강자들이 최근 이 플랫폼을 앞세워 용호상박의 치열한 대결을 펼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라는 것.

컨버전스 시대의 승자는 소비자의 숨은 니즈를 포착하고 융복합 기술로 공략하는 기업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강신장 삼성경제연구소 전 지식경제실장은 “남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주는 것이 바로 새로움”이라며 “융합·복합으로 (소비자들의) 숨겨진 니즈(needs)를 공략하는 기업들이 급증했다”고 진단한다.

컨버전스 성공시대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며, 기술은 그 이후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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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주택 2.0 시대]주거복지 量에서 質로 ‘업 그레이드’

2011년 03월 07일 14시 20분
80년대 본격적 주거 안정정책 채택…DJ정부 ‘소셜 믹스’로 사회통합 추진

분노한 민심은 들불처럼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확산되며 독재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아프리카. 중동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튀니스의 ‘재스민’은 하루 1~2달러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젊은이였다.

분노한 민심이 때로는 거대한 배를 순식간에 뒤집어 놓는 것이 역사의 순리이다. 공공 임대 주택은 자본주의의 발원지인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행됐다.

영국의 근로자들은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의 비좁고 위생 상태도 엉망인 골방에서 가족들과 힘겨운 삶을 살았다. 주택 임대료 인상에 항의하는 근로자들의 불만을 달래는 일이 영국 정부로서는 시급한 과제였다.

영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공공 임대 주택 정책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이다. 근로자와 자본가, 정부 삼각 타협의 산물이었다. 일제 점령 시대인 1945년까지, 식민지 조선에는 독자적인 공공 임대 주택 정책이 없었다. 강권 통치를 일삼으며 만주 침탈에 전력을 다하던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조선인들의 주거 문제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도 집권 초기 공공 임대 주택은 관심 밖이었다. 군사정부는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정책과 경제개발 정책을 양 날개로 삼아 정통성 문제를 정면 돌파하고자 했다.

이 시기의 투자 우선순위는 제조업 부문과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산업 기반 시설의 확충이었다. 임대 주택은 물론, 일반 주택 정책도 관심권 밖이었다. 정부의 관심이 주택 부문에 미치지 못했으며, 임대 주택 프로그램도 개발되지 못했다. 임대 주택의 효시는, 지난 1962년 대한주택공사가 마포구 도화동에 9-15평 규모로 지은 마포아파트였다.

제도권 임대 주택의 신호탄이었다. 6년 후, 김현옥 서울시장은 해발 203미터 천연동 산허리에 지은 금화 아파트를 짓는다. 도심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며 오갈 데 없어진 철거민들을 위한 임대 아파트를 건설한 것.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김현옥 서울 시장은 철거민용 아파트조차 산 위에 지었다는 것. 산 중턱에 아파트를 올려야 청와대에서 잘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후일담이다. 마포구 창전동에 지은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것도 따지고 보면 김 시장의 권력 지향이 한몫을 한 셈이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부는 주택부문에 비로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LH공사(당시 주택공사)는 1971년 개봉동에 서울 최초의 임대아파트를 준공했다. 당시의 공사현장 전경.LH공사(당시 주택공사)는 1971년 개봉동에 서울 최초의 임대아파트를 준공했다. 당시의 공사현장 전경.

1962년 마포아파트가 제도권 임대주택의 효시
부실 시공 와우아파트 붕괴참사 큰 아픔 겪기도
5·6共 때 밀어부치기식 물량공세 주거안정 한몫




LH공사는 아파트의 질을 높여 임대주택에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다. 판교 임대주택단지전경.LH공사는 아파트의 질을 높여 임대주택에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다. 판교 임대주택단지전경.

1993년 임대주택법 개정 중산층까지 공급 확대
DJ정권 때 ‘임대-분양 50대50’ 사회적 혼합정책
최근엔 입주민 삶의 질까지 배려한 성숙단계 진입


3공화국, 철거민 이주 목적 ‘생색내기’

정부의 공공주택 정책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 이후. 대한주택공사는 1971년 서울 개봉지구에 13평 규모의 임대 주택 300여 호를 공급했다. 이 주택공급을 신호탄으로 1980년까지 10년 동안 6만 4974호의 임대 주택을 건설했다. 임대 기간은 대부분 1~2년. 호칭이 단기 임대 주택 또는 분양 조건부 임대 주택이지, 말 그대로 생색만 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걸고, 공업화에 매진하며 농촌에서 근로자 예비군들을 대거 도시로 끌어올린다. 조국 근대화의 역군으로 불린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달동네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1970년대 임대 주택 공급의 목표는 무주택 영세민의 생활기반 구축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서울시의 요청으로 도시계획사업으로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철거민을 상대로 임대 주택을 특별 분양했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공업화에 매진한 3공화국은 분양 위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정부의 임대 주택 정책은 거의 무의미한 실정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


80년대 들어 법-제도적 큰 틀 갖춰

광주 민주화운동을 군홧발로 진압하고 권력을 움켜쥔 5공화국 정부는 김재익씨를 경제수석으로 영입해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한 경제 자유화의 물결에 동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5공화국은 통금 제한을 풀었으며, 여행 자유화 조치를 실시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임대 주택 정책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저소득 계층의 주거 부담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감안해 임대 주택 육성 방안을 발표했다. 1981년, 정부는 주택 임대차 보호법을 제정했다. 또 3년 후, 임대주택건설촉진법을 제정해 임대 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국내 공공임대 정책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 노태우 대통령이 추진한 200만호 건설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따른 주택 수요는 높은 데 비해 주택 공급은 절대량이 부족했다. 이러한 양적 부족 사태는 국가적으로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때로는 부동산 폭등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거나 위화감을 형성시켜 서민들의 심리적 상실감을 불렀다. 1989년 2월에는 도시 영세민의 주거 안정을 위해 3조5000억 원을 투입해 영구 임대 주택 25만호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공공임대 주택 양에서 질의 시대로

6공화국 정부는 1인 가구, 노인 가구 증가와 더불어 주택 가격 안정으로 임대 주택 수요가 90년대 들어 급증할 것으로 보고, 임대 주택 공급 확대 방안을 수립했다. 지난 1993년 5.8%수준의 임대 주택 재고를, 2000년대 초반까지 10% 수준 까지 늘려 나간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신경제5개년 계획상 주택부문과 관련한 정책 방향은 주택의 안정적 공급, 재고 주택의 질적 수준 향상 등이다.

남영우 나사렛대학교 부동산신학과 교수는 “공공 임대 주택을 더 많이 짓고 그 시설을 입주민의 생활 방식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설계하는 일도 중요하다”며 “공공 임대 주택 역시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는 장소, 삶의 거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영환 기자 yungh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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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매매에서 렌털의 시대로

[임대주택 2.0 시대]“아파트도 정수기처럼 빌려 쓰시죠”

2011년 03월 07일 14시 22분

건설사들 임대시장 추이 보며 성장 저울질…
월 임대료 429만원 초호화 아파트까지 등장


국내의 한 중견 아파트 회사에 근무하는 김종수(가명·35)씨의 업무는 새집증후군을 제거하는 일이다. 새로 지은 아파트 바닥재나, 벽지를 비롯한 마감재에서 발생하는 유해 물질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아파트 회사는 더 이상 아파트만 판매하지는 않는다.

아파트 회사들은 입주민의 삶을 관리하는 ‘토털 솔루션’ 업체로 진화 중이다. ‘이상한 아파트 회사가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한 아파트 광고는 주택시장에 부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엿보는 창이다. 아파트 회사들은 금융 상품과 서비스, 제품과 솔루션 등을 결합한 토털 솔루션 제공자로 스스로를 재포지셔닝하고 있다. 입주자들의 삶을 관리하는 코디네이터다.

하숙집 주인이 하숙생들을 살피듯, 불편한 곳은 없는지, 개선할 사항은 무엇인지 등을 꼼꼼히 살핀다. 마케팅, 판매 후 서비스, 관리, 브랜딩 등 밸류 체인으로 아파트 입주자들의 삶을 촘촘하게 관리하는 '토털 솔루션 전략'의 백미가 ‘렌털 비즈니스 모델’이다.

임대 아파트 회사는 하드웨어(아파트)를 빌려주고 사용료를 받는다. 컴퓨터 회사인 휴렛팩커드는 소비자들에게 매월 사용료를 받고, 최고급 사양의 개인용 컴퓨터와 더불어 판매 후 서비스, 업데이트 서비스를 일괄 제공한다.
아파트 회사는 컴퓨터사의 마케팅을 따라하고, 컴퓨터사는 정수기 회사의 비즈니스모델을 닮아간다.


시공+관리 ‘토털 솔루션’으로 진화 중

주택 시장에 불어 닥친 이러한 변화의 파고는 거칠다. 이들이 솔루션에 주력하는 이면에는 아파트나 컴퓨터 하드웨어 단품만으로 경쟁우위를 유지하기가 힘든 현실이 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후폭풍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건설사들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던 아파트 분양시장은 좀처럼 기지개를 켜지 못하고 있다. 전세 제도를 비롯한 주택 관련 제도 전반이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신송현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전세시대의 종말을 예고한다.

지금까지 은행 문턱이 높아 집을 담보로 세입자에게 목돈을 빌려오던 관행이 서서히 저물고 있다는 것. 변화의 급물살에 휘말린 국내 아파트 건설사들이 무심한 듯하면서도 곁눈질을 하고 있는 시장이 주택 임대시장이다.

입주자의 삶을 관리하는 ‘토털 솔루션’ 회사를 표방하며 분양시장을 파고드는 한편, 임대시장의 가능성을 저울질하면서 주택사업의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있는 것. 물론 아직은 한계도 뚜렷하다. 공공 임대주택은 사회 소외계층의 주택 마련을 돕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규제가 많다보니, 수익을 담보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부영은 임대 시장을 캐시 카우로 집중 공략해 성공한 드문 사례다. 이 회사의 주택사업 가운데 임대 사업이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90%. 하지만 임대 주택 사업은 아직 ‘계륵(鷄肋)’ 취급을 받는 것이 국내 주택 업계의 분위기이다.


‘임대 + 분양’ 쌍끌이 성장 엔진 장착

아파트 회사들도 임대 시장에 시큰둥한 편이다. 인프라, 원자력 등 상품 포트폴리오 다변화로 주택시장 침체를 헤쳐갈 수 있는데 굳이 수익성이 떨어지는 임대주택 시장을 공략할 필요가 있냐는 반문이다.

하지만 포트폴리오적 관점에서 임대주택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분양 사업으로 사업성을 높이고, 불황일 때는 임대로 번갈아가며 수익원을 다변화하라는 주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형 임대주택은 글로벌 시장 공략의 방편이기도 하다. 자국의 저가 주택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인도의 타타그룹은 이 시장에서 성장의 디딤돌을 놓고 있다.

인도의 타타 그룹은 1인가구를 위한 서민주택을 공급하며 저소득층 시장 공략의 시동을 걸었다. 주택난이 심각한 인도에서는 초소형 아파트 바람이 불고 있다.

이 회사의 자회사인 타타하우징 디벨롭먼트는 수도 뭄바이에 사는 도시 하층민을 겨냥한 초저가 주택 보급에 나선 것이다. 자국의 저소득층 주거시장을 공략중인 이 회사는 장기적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등 신흥시장으로 공략범위를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10년 장기 불황으로 건설사들의 부도가 꼬리를 문 일본의 주택건설회사 다이와하우스는 지난 2009년 3월 부촌으로 유명한 효고현의 니시노미야시 고급 주택가에 ‘니시노미야 서니힐스’를 완공하며 임대용 단독주택 건설 사업에 진출했다. 지난 2007년 다보스 포럼에서 소개된 신조어가 독신경제(Single Economy).

공공 임대주택이나, 국민 임대주택은 분양 아파트에 비해 가격대는 저렴하면서도, 전세에 비해 집주인의 간섭이 없는 점이 강점이다. 하지만 층간 소음이 큰 편이며, 비만 오면 빗물이 새는 사례도 빈발하는 등 분양 아파트에 비해 단점도 뚜렷하다.


다양한 상품으로 공공정책 한계 보완

입주민이 아파트에서 겪는 체감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 분양 아파트에 비해 경비시설이 부실하거나, 임대동과 분양동의 입구가 각각 배치된 경우도 있다. 임대 주택에 전반적으로 만족감을 표시하면서도, 언젠가는 떠나야할 곳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임대 주택의 종류는 늘어나는 추세다. 대학생들을 겨냥한 전용 임대 아파트가 등장했으며, 월세만 수백만 원에 달하는 초호화 임대아파트도 등장했다. 지난 1월에는 보증금 25억 원, 월 임대료가 429만 원이나 되는 최고급 임대 아파트 ‘한남더힐’이 입주를 시작했다.

이곳의 펜트하우스 332㎡의 임대가격을 전세가격으로 환산하면 29억4970만 원에 달한다. 아파트 회사들의 임대 시장 진출이 당장 급증할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민간 회사들의 시장 진출 봇물이 터질 경우 관리 시설, 가격 범위 등에서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서용식 도시형 생활주택 연구소장은 “독신 경제 증가로 인한 1인 가구의 증가는 혼자 사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시대로의 변화를 의미한다”면서 “서울도 지난 5년 동안 1인 가구 증가율이 34%에 달해 혼자 사는 가구가 70만 가구에 이르는 1인 가구 20%시대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소셜 믹스와 제너럴 믹스

사회통합 시험대에 선 임대주택
정부는 주거 복지의 차원에서 임대주택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른바 소셜믹스를 사회 통합의 전략으로 채택하고, 분양동과 임대동 주민들과의 교류를 꾀하는 것이 대표적 실례다. 젊은이와 노인 등 세대 간의 통합을 도모하는 이른바 제너럴 믹스(general mix)라는 용어도 사회 통합을 향한 관심을 가늠하게 한다.

소셜믹스 전략의 일환이 임대 아파트를 분양 아파트 동 한가운데 두는 것. 강남 등 부촌에서 임대 아파트 단지 입주를 반대하는 등 사회통합을 해치면서 등장한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이들이 서로 마음의 벽을 허물고, 사회통합의 대의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사례는 드물다. 물리적인 벽이 마음의 벽은 아직 허물지 못한 것.

박영환 기자 yungh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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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ny |하이닉스의 특별한 인사실험



남동발전 매각 작업 주도한 공무원 영입

“모든 게 잘 진행이 됐어요. 일본의 ‘J-파워’도 들어왔습니다. 일본, 미국을 비롯해 국적별로 다양한 업체들이 골고루 참가했어요. 이번 투자의향서 접수는 매우 성공적입니다. ”

참여정부가 한국전력 민영화를 추진하던 지난 2003년 1월, 경기도 과천 산업자원부의 한 사무실(경쟁기획과).

검은색 뿔테안경을 착용한 과장 한명이 ‘윗선’에 이날 마감된 남동 발전 투자의향서 접수 결과를 전화상으로 보고하며 “성공적”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국제 입찰이 유찰될 경우 자칫하다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일까.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의 기운이 역력했다.

당시 한전 노조는 발전 민영화가 전기요금 급등을 초래할 공산이 크다며 전면 백지화를 요구, 참여정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정부는 남동발전 입찰 결과를 봐가며 나머지 발전 자회사들의 민영화도 추진한다는 입장이어서 첫단추가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

정부는 발전, 송전, 배전부문 가운데 발전부문을 다섯 개로 나누고 남동발전을 국제 입찰에 붙였고, 그 결과는 한전을 필두로 한 공기업 민영화의 성패를 가늠할 풍향계로 받아들여지던 시점이었다. 당시 입찰 결과에 가슴을 조이던 당사자가 바로 최민구 현 하이닉스반도체 전략기획실장(전무)이다.

그는 참여정부 내내 일복이 터진 공무원이었다. 지난 2003년, 한미 반도체 통상 분쟁 때에도 주무 과장(반도체 전기과장)을 맡아 미 행정부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미국이 한국 정부가 하이닉스반도체를 부당 지원했다며 상계관세를 부과하자, 최 전무는 반도체 주무 과장으로 다시 한 번 고난의 행군에 나서게 된다.

그런 그가 최근 공무원 옷을 벗고 민간 기업으로 둥지를 옮겼다.‘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화려하게 부활한 ‘하이닉스반도체’가 새로운 일터다. 전략기획실에서 통상문제 대처와 더불어 하이닉스반도체 경영의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보스였던 김종갑 사장이 영입

공무원 시절 ‘보스’였던 김종갑 하이닉스 사장이 그를 영입했다.

두 사람은 ‘환상의 콤비’로 통했다. 김 차관보가 반도체 분쟁의 골간을 설명하고 나면, 최 과장이‘각론’을 브리핑했다. 그를 전격 영입한 배경은 물론 국내 반도체산업을 담당한 경험과 식견을 높이 산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세계 반도체 업계의 업황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안개 속이다.

군막 안에서 천리 밖의 승리를 설계할 전략가가 필요한 시점인 것. 현안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장량과 같은 인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이기도 하다.

산자부에서 에너지 분야를 담당했던 만큼 장기적으로 ‘신수종 사업’ 발굴 쪽에도 한몫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의 한 외국계 컨설팅 업계 임원은 “한창 잘 나가는 반도체 업체의 수장과 전략담당 최고위 임원이라는 핵심 요직을 모두 공무원들이 차지한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공무원들의 잇단 민간 기업행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사진설명 : 김종갑 산업자원부 차관보(현 하이닉스반도체 사장)가 2003년 6월 18일 기자실에서 美상무부의 하이닉스 반도체 DRAM에 대한 고율 상계관세부과 판정과 관련하여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원 안이 최민구 현 하이닉스반도체 전략기획실장이다.

박영환 기자(blade@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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