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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로컬(Local)/NEXT 로컬 리더십'에 해당되는 글 25

  1. 2011.11.29 [초점]외환銀 인수 앞둔 '승부사' 김승유, 마지막 카드
  2. 2011.10.19 "MB노믹스 설계자 강만수 산은 회장, 그의 인생 이야기"
  3. 2011.10.19 김중수-강만수, 외환보유고 적정성 온도차 뚜렷
  4. 2011.10.19 MB노믹스 설계자 강만수, 한은과 '악연' 재연…왜?
  5. 2011.09.03 유재한 사장의 사임, 특정업체 밀어주기 때문
  6. 2011.07.05 (딥 스토리)GE식 승계시스템 가동한 한동우 회장 '후계자군은'
  7. 2011.07.04 김중수號, 한국은행법 개정 '꿈'은 이뤄질까
  8. 2010.06.07 MB시대 파워엘리트 소망교인들
  9. 2008.09.18 (로컬 리더십)건설사도 서비스업이죠
  10. 2008.01.21 경영자 리더십 분석-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11. 2008.01.16 경영자 리더십 분석-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12. 2008.01.16 고전 전문가가 본 이명박 리더십
  13. 2007.09.25 대선주자 리더십 분석-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14. 2007.08.16 경영자 리더십 분석-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15. 2007.06.01 뉴스위크가 본 한국 재벌 후계자
  16. 2007.05.24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한명숙 전 총리
  17. 2007.05.13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김근태 전 열우당 의장
  18. 2007.05.01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정동영 전 열우당 의장
  19. 2007.04.19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20. 2007.03.28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손학규 전 경기지사
  21. 2007.03.15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22. 2007.03.05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이명박 전 서울시장 (1)
  23. 2007.02.21 신재철 LG CNS사장, 재기의 마술사
  24. 2007.02.21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고건 전 총리
  25. 2007.02.21 대통령 리더십 분석-노무현 대통령
 


[초점]외환銀 인수 앞둔 '승부사' 김승유, 마지막 카드는?
    기사등록 일시 [2011-10-27 08:00:00]    최종수정 일시 [2011-10-27 10: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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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영환·이국현 기자 = 때 이른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5월, 금융권이 술렁거렸다. 작은 단자사를 금융권 빅4로 키워낸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고들 했다. 금융당국이 론스타의 대주주 적격성 문제를 미루겠다는 발표를 한 직후였다. 인수·합병(M&A)의 귀재로 통하던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인수합병의 귀재', '타고난 승부사'… 그를 따라다니는 수사는 화려했다. 충청은행과 보람은행, 서울은행이 김 회장이 펼쳐든 포획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김 회장은 작은 단자회사에서 시작한 하나은행을 국내 은행산업의 빅4에 올려놓았다. LG카드 인수전은 불운의 출발점이었다. 주당 몇 백 원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그가 던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가 외환은행 인수였다.

외환은행 대주주인 론스타는 한국사회의 애증이 교차하는 뜨거운 감자였다.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주인공이 김 회장이다. " '먹튀'를 돕는 것이냐"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HSBC, 국민은행을 무장 해제시킨 한국 사회의 따가운 여론, 그리고 외환은행 노조의 조직적 반발은 매서웠다. 노련한 뱃사공에게도 풍랑은 버거웠다.

외환은행 노동조합의 저항도 격렬했다. 본점 건물 외벽에 큼지막한 '여수장 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를 내걸었다. "외환은행 인수를 위해 할 만큼 다 했으나 역부족이니 그만 포기하고 물러서는 게 어떠냐"라는 적장을 향한 '조롱'이었다. 한국은행과 수출입은행을 대주주로 둔 이 은행원들은 하나금융지주를 자신들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승부사 김승유, 외환은 인수 8부 능선 넘다

김 회장은 협상의 고수였다. 외환은행 인수 계약이 만료되면 계약을 다시 연장했다. 급전이 필요한 론스타에 외환은행 지분을 담보로 거액의 대출도 해줬다. 젊은 시절 고객들을 만나 하루에 커피를 수십여 잔씩 들이키며 생긴 쓰라림이 '인내의 자산'이었다. 그는 외환은행 인수의 8부 능선을 넘어섰다.

사방이 꽉 막힌 론스타 해법의 신호를 보낸 인물은 김석동 금융위원장. 그는 지난 25일 외환은행의 대주주인 론스타에 충족명령을 발동했다. 충족명령 기한은 이 문제를 하루 빨리 매듭짓고 싶은 김 위원장의 의지를 엿보는 풍향계다. 이행기한은 '3일'에 불과했다. 가장 큰 걸림돌이 신기루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김 회장은 특별한 변수가 작용하지 않을 경우 이르면 11월 중 외환은행을 인수할 전망이다. 'M&A의 귀재'라는 명성을 다시 한 번 입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산발적인 저항은 격렬하지만 대세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다. 금융노조가 꺼내든 카드는 '징벌적 매각'. 이 카드를 앞세워 금융당국을 압박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산업자본 여부를 판단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라는 게 외환은행 노조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금융위원회의 시각은 매우 다르다.

금융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론스타가 한국정부를 상대로 제소 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김수현 신한금융투자 연구원도 이러한 관측에 동의한다. 그는 "경영권 프리미엄 없이 현재가에 외환은행 주식을 내다팔라는 징벌적 매각 명령이 내려진다면 론스타가 국제 소송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며 "은행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게 없어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 회장이 풀어야 할 마지막 숙제는 국부 유출 논쟁의 해법. 지난 2003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때부터 불기 시작해 여전히 맹위를 떨치며 HSBC, 국민은행의 인수시도를 좌초시킨 역풍이 이른바 '먹튀'논란이다. 협상 상대방은 하버드 출신의 만만치 않은 상대 '존 그레이켄 '. 그를 설득하는 것이 김 회장의 과제다.

◇먹튀 논란 잠재울 마지막 관문 '가격 재협상'

신경전은 이미 치열하다. 하나금융지주 관계자는 "조건 없는 강제 명령 매각 명령이 나오면 가격 재협상을 할 예정"이라며 "전세계 주가가 폭락하면서 외환은행의 주가도 하락한 만큼 가격 협상 요인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하나금융지주는 론스타와 계약을 연장했던 지난 7월 외환은행 주식을 1주당 1만3990원으로 산정했다. 당시 주식가격 9400원에 주당 3990원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더한 액수다. 론스타가 보유한 주식 수는 3억2904만2672주로 인수 대금은 4조4459억원에 달한다.

외환은행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하나금융지주가 현재 가격에 인수를 하더라도 무리가 없지만 여론을 비롯해 주가 하락 등을 감안해야 한다"며 "현재 주가에서 경영권 프리미엄을 40% 준다고 했을 때 주당 1만~1만1000원 정도가 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넉 달이 지난 10월25일 종가를 기준으로 외환은행 주가는 7710원에 거래되고 있다. 인수 당시 주가의 82% 수준이다. 당시 경영권 프리미엄이 1주 가격의 42%에 달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경영권 프리미엄은 3200원 수준으로 낮아진다. 이로써 매각 대금은 3조5668억원으로 1조원가량 차이가 난다.

론스타가 적극적 으로 재협상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이미 7월 계약서에 인수 가격을 명시해 놓은 데다 현재 협상 가격이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주가는 하락했지만 계약 당시에도 다른 회사의 M&A 때와 달리 할인된 가격에 사인을 한 만큼 과도한 금액이 아니라는 논리를 내세울 수 있다.

길고 지루한 협상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할이 김 회장의 몫이다.

◇PMI(Post Merger Integration) 어떻게 풀지도 관건

인수합병에 성공한 뒤 풀어가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합병 후 이른바 '투뱅크'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김 회장의 계획이다. 외환은행은 금융권에서 연봉이 높기로 정평이 나있지만 하나은행은 급여가 상대적으로 낮다.

서로 다른 기업문화에서 성장한 이 둘 사이에 어떤 식으로 조화와 균형을 꾀할 지도 관건이다.

하나금융지주-외환은행 양자가 치열한 공방 속에 서로에게 가한 상흔(傷痕)을 어떻게 치유할지도 숙제다. 조직 통합 후 요직에 신한 출신이 아닌 조흥 출신들을 전진 배치하는 등 조직 간 화합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옮긴 주인공이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이었다.

하나금융지주는 외환은행을 인수할 경우 단숨에 신한금융지주를 밀어내고 금융권 빅3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yunghp@newsis.com
lgh@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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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노믹스 설계자 강만수, 그의 인생 이야기"
    기사등록 일시 [2011-06-06 13: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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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주변에 적이 많다. 'MB노믹스의 좌장'으로 불리는 그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직설적 성격 탓도 있다. 그는 재정경제원 차관시절에도 한은에 전화를 걸어 '환율 협조'를 구했고, 삼성, LG, 현대를 비롯한 주요 기업들과 연결되는 핫라인도 운영했다. 

"환율은 대외적으로 나라경제를 지키는 주권"이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경상수지를 단기간에 개선할 수 있는 즉효약은 환율이라는 중상주의 사고가 강한 그는 마른 벌판을 태우는 들불처럼 거침이 없다. 그래서 주변의 거부감도 강하고 때로는 손해도 보는 편이다. 그는 현 정부 집권초에도 고환율 정책으로 혼쭐이 났다. 

취임 석달 째가 다가오는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다시 뜨거운 감자다. 산은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를 합쳐 대형은행을 육성하겠다는 메가뱅크론이 한국사회를 들쑤시고 있다. 지난 3월14일 취임식을 한 이후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강 회장을 중심으로 한국 금융산업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반발은 거세다. "메가뱅크는 금융의 4대강 사업"이라는 비판이 터져나온다. 반대수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3일 오전, 금융경제연구소가 주관한 국회 공청회는 이러한 반 강만수 기류를 엿보는 '창(窓)'이다. 민주당,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야 4당과전국금융산업 노조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강 회장이 산은지주에 부임한 후 쏘아올린 메가뱅크 구상이 숱한 갈등을 양산하며, 한국사회를 4대강 사업 당시와 비견되는 '혼돈'으로 몰아가는 양상이다. 산은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의 합병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구상 또한 '동력'을 잃고 점차 표류하는 기미가 역력하다. 

강 회장에 대한 비판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면, 그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금융의 4대강 사업' 비판 직면

메가뱅크론에 가장 체계적 비판을 하고 있는 선봉장은 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교수. 그는 "메가 뱅크론과 4대강 사업은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 쌍생아"라고 꼬집는다. 두 사업 모두 '규모의 경제'를 중시하는 1970년대 토건 방식의 사고에서 자유롭지 않다"며 대형 은행이 지닌 문제를 조목조목 끄집어냈다. 

일본 은행들이 그가 든 반면교사의 실례이다. 지난 1980년대 이후, 일본 주요 은행 5~6개는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던 자국기업들과 동반성장하며 자산규모 기준으로세계 10위권에 이름을 올렸지만, 일본은 여전히 금융 후진국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반론이다. 질적인 성장이 중요하다는 논리다. 

한국 관료들의 위험관리 수준에 의문부호를 다는 비판도 단골메뉴다. 초대형 은행은 고사하고, 지역에 기반을 둔 작은 저축은행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자산이 500조에 달하는 메가뱅크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것이 참가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양적 사고를 중시하는 꽉막힌 관료적 사고도 비판대상이다.

강 회장 리더십의 한계를 꼬집는 목소리도 눈길을 끌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장본인중 하나로, 현정부 집권초 기획재정부장관을 지내며 고환율정책으로 나라경제를 뒤흔든 그가 '메가뱅크'를 다시 추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되묻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그에게 비저너리(visionary)의 통찰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다. 

이동걸 교수는 "우리금융지주, 산은금융지주를 합치면 연결자산기준으로 GDP의 40%를 넘는 초대형 은행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은행 하나가 무너지면 한국경제가 휘청거릴 수 있다"며 "한국의 금융지주사들은 미국에서도 7~8위권 규모로 충분히 대형화돼있다"고 비판했다. 메가뱅크의 등장이 시스템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저축은행 사태로 '금감위'에도 이상기류 

금융위원회에도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당초 이달 1일 금융위원회에 올라올 예정이던 지주회사법 시행령 개정안 보고가 늦춰지고 있는 것. 금융위원회는 론스타의 대주주 적법성 여부를 놓고 한동안 뜸을 들이다 지난달 '판단 유보'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강 회장의 구상에 대한 반발의 파고가 예상보다 높은데다, 정치권에서도 반발이 확산되자 금융당국이 사태를 관망하며 좌고우면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달 15일 예정된 정례 금융위원회에서도 시행령 개정안 보고가 있을 지 여전히 불투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주회사가 또 다른 지주회사를 인수할 때 95%이상 지분을 사도록 한 '지분규정'을 대폭 낮춘 지주회사법 시행령 개정안 추진 논리는 명확하다. 유효경쟁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게 위원회측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시행령 개정이 특정인을 위해 법을 만드는 '위인설법(爲人設法)'이라는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자 좌고우면하고 있는 것. 

김주영 법무법인 한누리 대표는 "지주회사법은 지주회사가 또 다른 지주회사를 인수할 때 95% 이상 지분매입을 규정하고 있지만, 지분 매각을 거부하는 소액주주 등을 감안할 때 사실상 100%인수를 명문화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지적했다. "시행령 개정안은 법의 취지를 무력화하는 것"이라는 게 김 대표의 비판이다. 

◇강 회장 마지막 승부수는 

"승부의 분수령은 언제나 종반전 정치권의 향배에 달려 있었다. 정치권은 언제나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무마라는 차선을 선호했고, 원칙과 정도보다는 타협과 포퓰리즘에 젖어왔다" 

강만수 회장은 1970년 신라의 고도인 경주 세무서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국세청 세무서 생활이 본인과 맞지 않아 재무부로 옮긴 이후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세무 분야에 아직도 정통한 것도 이 때의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그래서일까. '선이 굵다'는 평가를 받는 강 회장은 꼼꼼하기도 하다는 전언이다. 

'일일 점검!. 수시점검!'. 재경원 차관시절, 강 회장은 책상 밑에 이같은 문구가 쓰인 노란 용지를 넣어둔 채 스스로를 독려한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한국은행법 개정을 둘러싼 한은과 재경원의 오랜 투쟁을 지켜본 백전노장인 그는 자신의 저서인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정치권의 이중적인 태도에 깊은 실망감을 피력한 바 있다. 

문제는 야4당을 비롯한 정치권이 강 회장의 구상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메가뱅크를 금융권 3차 구조조정의 신호탄으로 보는 은행권 노조의 반발도 부담거리이다. 산업은행 내부에서도 탐탁치 않아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노동조합은 '독자 생존론'을 밀어붙이고 있다. 한국형 투자은행에 승부수를 걸겠다는 입장이다. 

집권 후반기인 현정부의 힘이 예전만 못한 것도 부담거리다. 저축은행 사태도 빌미가 됐다. 정부가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는 집권초 속전속결로 임하지 않을 경우 좌초하기 쉽다는 것은 참여정부 한전 민영화가 남긴 교훈이다. 내년은 총선과 대선이 잇달아 펼쳐지는 해이다. 강 회장의 입장에서는 꽉 움켜쥔 손바닥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형국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강 회장은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인연이 깊다. 강 회장이 재경원 차관으로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호출한 관료가 바로 외화자금과장이던 김석동 위원장이다. "6월 말까지는 500억 달러까지 외환 보유고를 늘리고, 원달러 환율도 가능한 한 빨리 920원까지 올리라고 지시했다"는게 그의 회고이다. 

이달 15일, 금융위원회의 정례 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지주회사법 시행령 개정안 관련 보고가 이날 회의에 올라 올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현실적으로 시행령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강 회장이 우리금융지주를 인수할 길은 막막해진다. 정부는 오는 29일까지 투자의향서를 받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1차 인수후보군인 예비입찰 참가자를 정한다는 방침이다. 

2010/06/07 - [로컬(Local) VIEW/로컬 리더십 VIEW] - MB시대 파워엘리트 소망교인들

2011/10/19 - [로컬(Local) VIEW/로컬 리더십 VIEW] - 김중수-강만수, 외환보유고 적정성 온도차 뚜렷


2011/10/19 - [로컬(Local) VIEW/로컬 리더십 VIEW] - MB노믹스 설계자 강만수, 한은과 '악연' 재연…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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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수-강만수, 외환보유고 적정성 온도차 뚜렷
    기사등록 일시 [2011-10-13 12: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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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13일 외환보유고를 민간 은행에 빌려주자는 일부 주장과 관련해 "외환보유고의 성격을 잘못 이해한데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오전 금융통화위원회직후 열린 통화정책방향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국제금융시장이 여전히 매우 불안한 상황에서 보험의 성격이 있는 외환보유고는 매우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외환보유액은 수익성을 기준으로 운영하는 것은 아니고, 안정성과 유동성을 먼저 따져본 뒤 수익성을 감안해봐야 한다"며 "(국내은행들이 해외에서 빌리는 것보다)조달비용이 낮다는 것은 (대출)근거가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 2008년 9월 리먼 사태가 터지며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국내 금융시장 또한 출렁거리자, 정부와 한은은 각각 300억달러, 270억 달러 가량을 민간 은행에 공급해 위기극복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유로존 재정위기, 미국 경제의 둔화 등에서 비롯된 한국경제의 하방위험을 '위기'로 보는 공감대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리먼 사태 당시처럼 민간에 외환보유액을 푸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게 그의 진단. 

그는 "외환보유액은 많은 비용을 들여 얻는 것이며, 보험료를 지불하는 것은 위기가 났을 때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은행들이 유로존 국가들의 재정위기로 지난 8월 이후 달러가 마르며 해외 차입에 어려움을 겪자,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한국은행의 '외환 보유고'를 빌려주자는 이색 제안을 했다. 

두 사람이 외환보유액 활용방안을 놓고 엇갈린 방안을 보이는 것은 적정 외환보유고에 대한 견해차 때문으로 풀이된다. 

강만수 회장은 3000억달러면 충분하다는 입장인 데 비해, 김중수 총재는 "(위기가 아닌) 평시의 잣대로 적정성을 따질수 없다"는 것. 

한편 김중수 한은 총재는 이날 금리 동결 배경과 관련해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 등으로 성장의 하방위험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금리 동결에 만장일치로 합의한 이날 금통위에서 금통위원들 사이에 "금리 인하 논의는 전혀 없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yungh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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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강만수, 한은과 '악연' 재연…왜?
    기사등록 일시 [2011-10-16 11:56:55]    최종수정 일시 [2011-10-16 15:24:49]

방송3사 극찬!! -25kg감량비법!!

【서울=뉴시스】김민자 기자 = 최근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의 '외환보유고 활용' 발언이 논란이 됐다. 강 회장이 한은의 외환보유액을 활용해 국내 은행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중수 한은 총재가 "적절치 않다"고 응수한 것이다. 결국 강 회장이 당장 외환보유액을 은행에 지원하자는 주장은 아니었다고 물러서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흥미로운 것은 강 회장과 김 총재의 '설전'이 과거 강 회장과 한은간의 '불화'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강 회장은 과거 재무부와 재정경제원 재직 시절부터 한은과 견해차를 보이며 긴장관계를 형성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초 강 회장이 통화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던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한은은 천정부지로 치솟던 부동산 값과 물가를 잡기 위해 통화량 잡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강 회장은 우리의 경제규모에 비해 통화량이 부족하다며 돈을 더 풀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통화정책을 둘러싼 양측의 이견은 강 회장이 2005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도 잘 나타난다. 강 회장은 당시의 경험에 대해 "(한은과) 사사건건 의견이 달랐지만 중앙은행의 보수적인 입장을 이해하며 하루하루 피곤한 소모전으로 통화를 관리했다"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은과의 '악연'은 강 회장이 1997년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재직시 한은법 개정을 주도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개정된 한은법은 중앙은행을 정책결정 기구인 금통위원회와 집행기구인 한국은행으로 분리하고, 물가안정목표를 지키지 못할 경우 금통위 의장을 해임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당시 한은 직원들은 한은의 독립성이 크게 훼손됐다면서 한은법 개정에 극렬히 반대했다. 이경식 총재 퇴진운동을 벌이고, 독자적인 한은법 개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후 강 회장은 현 정권에서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뒤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다시 국책금융기관의 장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거꾸로 한은의 조사를 받아야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 회장은 왜 다시 한은과의 갈등을 자초한 것일까.

◇"은행은 사기꾼"이라던 강 회장, 입장 바뀐 이유

강 회장은 자신의 발언에 대한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해외차입시 협상력 강화 차원에서 외환보유액 활용방안을 언급한 것일 뿐 당장 외환보유액을 헐어 은행에 지원하자는 주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내은행과 한국은행이 300억~500억 달러 규모의 커미티드라인을 설정해 언론에 공표할 경우 국내은행들의 해외차입 협상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건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국내은행들이 달러를 구하기 위해 외국은행으로 달려가다 보니, 높은 가산금리를 물게 됐다는 주장이다. 

강 회장의 이 같은 발언은 과거 기획재정부 장관 시절 언행과도 180도 다른 것이어서 주목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달러난 사태가 악화되자 재정부는 "정부의 외환보유액만 쳐다보지 말고 직접 달러를 구하라"면서 시중은행을 압박했다. 강 회장은 당시 은행들을 향해 '사기꾼'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강 회장의 '변신'을 단순히 한 나라의 경제수장에서 금융기관장으로 역할이 바뀐데 따른 입장 변화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강 회장 쪽에서는 '위기'에 대한 판단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당장 달러가 급했지만, 지금은 외환보유액도 충분하고 은행도 나름의 유동성을 확보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 강 회장은 사석에서 "2008년과 지금의 위기는 다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도 달라야 한다"는 말을 자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기'에 대한 인식은 같지만…

물론 유럽에서 촉발된 지금의 위기와 2008년의 위기가 다르다는 점은 한은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정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경제의 '안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외환보유액 수준의 적정성 측면에서는 강 회장과 정부, 한은의 인식이 엇갈린다. 강 장관은 외환보유액 3000억 달러면 충분하다는 입장인 데 비해, 김 총재는 "(위기가 아닌) 평시의 잣대로 적정성을 따질 수 없다"고 말한다. 정부도 표면적으로는 '3000억 달러'라는 숫자에는 큰 의미는 없다고 말하지만, '심리적 마지노선'인 3000억 달러를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 

현재로선 강 장관의 희망대로 '커미티드라인'을 설정하거나 은행들에 외환보유액을 지원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정부는 아직 외환보유고를 털어 은행을 지원할 만큼 위기가 심각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재정부의 한 관료는 "은행들을 한 번 도와주게 되면 '위기 때마다 정부가 도와둘 것'이라는 학습효과가 생기게 된다"면서 "지금보다 국제 금융시장이 악화되면 그때 도와줘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당분간 은행들의 '자구노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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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시스템 가동한 한동우號 후계자는?
    기사등록 일시 [2011-07-03 15:57:01]    최종수정 일시 [2011-07-03 21:24:32]

한동우 신한금융지주 회장 '7년 더 할 가능성 커'
나이제한 커트라인 걸리는 계열사 수장들 '답답'


【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지금까지는 어떤 잣대로 (인사를) 하는 지 도통 알 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한동우(63)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지난달 30일 취임 100일 째를 맞아 '상시 승계시스템'을 발표하며 부연한 배경 설명이다.

지난해 사상 초유의 경영권 분쟁으로 씻을 수 없는 상흔(傷痕)을 남긴 이 금융지주사의 전 최고경영자를 정면 겨냥해 작심하고 쏟아낸 비판이기도 하다.

신한금융지주가 회장 취임 100일째를 맞아 발표한 지주사 회장의 후계자 선발 방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엄격한 평가 과정을 통해 '후보자'들을 추린 뒤 이 중에서 회장의 뒤를 잇는 후계자를 결정하는, 국내 금융권에서는 유례가 없는 '미인대회식 승계과정'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특히 그룹 회장직의 문호를 주요 계열사 수장들에게도 사실상 대폭 개방한 이번 상시 승계시스템 도입에 따른 파급 효과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벌써부터 후계군에 대한 궁금증도 고개를 들고 있다.

국내에서는 삼성, LG, SK, 한화를 비롯한 가족 기업들의 경우, 대부분 적장자 승계 중심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가운데, 4대 금융지주를 비롯한 금융권도 전문경영인들이 장기 집권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았다.

회장 퇴임 전 후계자 군을 추려 공정한 경쟁을 통해 후임을 선정하는 'GE식 승계시스템'을 상시 가동하기는 국내 금융권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신한금융지주가 이번 지배구조 개선방안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적'과 '나이', '전문성' 후계자 일차적 요건

후계자 심사 기준은 크게 볼 때 두 가지. '넘버(Number · 실적)'과 밸류(Value · 신한웨이)가 주요 잣대이다. 여기에 나이 제한 규정도 두었다. 회장의 정년은 만 70세. 후임 경영자도 만 67세 이하의 자격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최고경영자의 정년을 둔 것은 경영권을 둘러싼 분란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취지에서다. 장기집권을 하다 경영권 다툼의 여파로 물러난 전 회장을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다. "정년에 제한이 있다 보면 스스로 준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는 것이 한동우 회장의 설명이다.

금융지주사 회장 후계자의 자격을 갖춘 후보들은 경영회의에 참가하는 주요 계열사의 경영자들, 임원 등이다. 신한 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불이익을 받지는 않지만, 외부영입인사들의 경우 계열사 임원이나, 사장 등 경영자로 근무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 한 회장의 설명이다.

승계 시스템 운영의 세부 각론은 아직 더 논의를 거쳐야 하지만, 그 변화를 엿볼 단서는 있다. 신한금융지주는 보스턴컨설팅그룹에 지배구조 개선방안을 의뢰했고, 이 미국계 컨설팅사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후계자 승계 시스템을 모범사례로 제시했다. 발명왕 에디슨이 창업한 이 회사는 신한 승계시스템의 미래를 엿보는 창(窓)이다.


◇후계자군 'GE' 보면 답있다

GE의 경우 회장 후보군의 목록에 오르는 대상자들은 3000명 정도. 항공기 엔진부터, 의료장비, 백색가전까지 다양한 장비를 만드는 초대형 복합기업이다 보니 계열사도 다양하고, 후보군도 광범위하다. 이 중에서 500여명을 추리고, 다시 3명 정도로 후계자들을 좁히는데, 이사회는 이 중 한명을 최종 낙점한다.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도 피를 말리는 치열한 경선을 거쳐 회장에 부임했다. 그의 경쟁자가 '제임스 맥너니'와, '로버트 나델리'였다. 이들 후보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볼 때 4가지. '세계화' '정보화' '서비스'그리고 '6시그마'가 그것이다. 여기에 넘버(Number)와 밸류(Value· 가치)도 빼놓을 수 없다.

GE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특별이 불이익도 없다. 제프리 이멜트 GE회장도 P&G출신으로 이 복합기업으로 옮겨와 진가를 입증한 사례이다. 미인대회식 후계자 승계 시스템의 장점은 명확하다. 이 회사는 후계자 선정을 축제의 한마당으로 끌어올렸다. 경쟁자들은 패배를 인정한 뒤 3M, 홈데포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로 자리를 옮겼다.

일단 회장에 한번 선임되면 대과가 없는 한 장기집권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2001년 9.11테러 사태가 터지기 직전 부임한 제프리 이멜트도 10년째 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임 회장인 잭 웰치는 20년 가까이 회장으로 근무했다.


◇'올드 페이스'냐 '뉴 페이스'냐

한 회장이 제시한 기준에 비춰보면, 후보자들은 튀어야 한다. '군계일학(群鷄一鶴)'격의 활약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지주사 경영회의 참석자들은 원탁회의 형태의 개방형 경영회의에 참석해 주요 현안을 논의하게 되는데, 은행·카드·보험 등 각자 분야에서 담금질한 경륜을 바탕으로 튀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두각을 나타내는 후보들이 있을 거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나이도 중요한 잣대가 될 수 밖에 없다. GE식 승계시스템의 특징은 회장들의 경우 대과가 없다면 장기 집권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점이다. 만 63세인 한 회장은 7년 정도를 회장으로 더 일 할 수 있다.

후보자들의 경우 독보적인 활약을 펼쳐도 나이 제한에 걸리면 불가항력이다. 주요 계열사 수장들의 경우 서진원 행장이 1951년생으로 올해 만 60세이며, 이재우 신한카드 사장이 1950년생으로 만 61세이다.

권점주 신한생명 사장은 1955년생으로 만 56세이다. 이휴원 신한금융투자 사장은 1953년생으로 만58세이다. 서진원 신한은행장은 7년후 만 67세로 '커트라인'에 걸리게 되는데, 이백순 행장의 잔여임기를 수행하고 있는 서 행장은 재임부터 일단 하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도 하다.

이재우 신한카드 사장은 7년후 만 68세로 회장직에 도전할 자격 자체가 아예 없다. 한 회장의 잔여 임기인 7년 동안 성장할 '뉴 페이스'들에게 기회가 갈 것이라는 분석도 벌써부터 고개를 들고 있다. 이번 상시 승계 시스템 운영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로, 인사는 늘 '의외성의 게임'이기도 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제프리 이멜트의 경우 회장에 오르기 까지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그는 플라스틱 부문장 시절, 보스인 잭 웰치 회장에게 해고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 플라스틱 부문의 실적이 기대치를 밑돌자, 한해 뒤에도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 경우 회사를 떠나야 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은 것. 그는 가장 강력한 후보도 아니었다.

2011/07/04 - [로컬(Local) VIEW/로컬 엑스퍼트 VIEW] - 한동우 신한금융지주 회장 "미인대회식 승계시스템 운용한다"

2011/07/04 - [로컬(Local) VIEW/로컬 엑스퍼트 VIEW] - 아세안시장 출사표 던진 서진원 신한은행장


한동우 지배구조 개선, 그후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1082609322964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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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 "한국은행은 이미 '대형 출판사'로 전락했습니다", "대형증권사 중에도 자료 요청에 콧방귀를 뀌는 곳이 더러 있어요". 한국은행 직원들은 요즘 자신들의 처량한 신세를 '출판사'에 빗대 토로하곤 한다. '금융시장 동향', '소비자·생산자 물가', '월별 외환 보유고'. '분기별 GDP 성장률'…

한국은행이 매월 쏟아내는 자료들은 방대하다. 웬만한 대형 출판사들이 울고 갈 지경이다. ''최종 대부자', '지급결제제도 운영자'… 한은을 따라 다니는 화려한 수사에 어울리는 '중량감'은 매주 봇물을 이루는 발표 내용에도 묻어난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저축은행사태는 한은 직원들의 박탈감을 엿보는 '창(窓)'이다. 

양질의 정보는 통화신용정책 수행의 기본이다. 한은의 고민은 이러한 정보에 접근하기가 극히 힘들다는 점이다. 한은이 최근 발표한 '금융기관 유동성' 자료는 이러한 고충을 엿보는 '단서'이다. 이 자료에는 저축은행의 가계·기업 대출 항목이 빠져있다. 민감한 시기임을 들어 이번에는 제외해 달라는 협조 요청을 수용했다는 후문이다. 

금융기관에 부실이 생겼을 때 최종 대부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한은은 법적으로 제2 금융권에 자료를 요청할 근거 조항이 없다. 그렇다고 은행 쪽 자료를 받기가 수월한 것도 아니다. 지난 1998년 개정된 '한국은행법'은 금융 기관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권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 범위를 '최소한'으로 한정하고 있다. 

반면, 금융감독원의 자료제출 요구권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금융감독당국이 민간 은행들의 직원 평가기준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데 비해, 한은은 이들의 경영상황을 판단할 정보가 아쉽다. 비유컨데,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절차를 밟는 기업을 상대로 실사를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지만, 한은의 경우 최소한의 조사권을 행사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한은이 한은법 개정안을 통해 긴급 여신을 수혈 받는 금융기관에 한해 직접 조사권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정무위가 제출한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개정법률안을 통해 한은의 이러한 독자 행보에 강력히 맞불을 놓고 있다. 


◇저축은행 사태, 통합감독시스템의 '한계'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위원회의 위상이 엇갈린 것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발한 다음해인 1998년 4월, 은행·증권·보험에 대한 통합감독체계가 도입되면서, 한은이 보유하고 있던 은행 조사권이 금융감독당국으로 이전됐다. 반세기 가까이 은행 감독을 담당해오던 한은은 감독 당국의 지위를 이때 상실했다. 

명분은 강력했다. 외환위기의 발발이 전기였다. 금융 감독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금융개혁위원회는 타협책도 제시했다. 은행·증권·보험사에 대한 포괄적 감독권한을 금융위에 주되, 한은 등 감독관련 기관들의 협력과 견제와 균형를 중시한다는 내용이었다. 금융개혁위원회가 금융감독 체계 변경의 밑그림으로 삼았던 나라가 금융선진국인 영국이었다. 

문제는 감독관련 기관들의 협력과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통합금융감독당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대형 금융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는 배경으로 이러한 시너지의 부재를 꼽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2000년 가을, 동방·대신·열린상호신용금고 불법대출사고가 잇달아 터져 나온 것이 반면교사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8년에도 키코(KIKO. Knockin-Knockout) 사태가 터졌다. 이 여파로 우량 중소기업들이 줄도산하자, 주기적으로 위기를 실어나르는 은행 부문에 대한 감독당국의 역량 부재를 질타하는 비판도 높았다. 감독당국 인사들이 줄줄이 연루된 '저축은행 사태'는 통합감독 시스템의 허실을 드러낸 백미(白眉)였다.

전문가들의 진단은 이렇다. 한은을 비롯한 기관과 협력을 규정하면서도 '제한적 감독권'만을 인정한 이중적 조항이 감독당국의 일방적인 독주와, 모럴해저드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 외풍에 휘둘리기 쉬운 관료주도의 통합감독 시스템을 탓하는 목소리도 높다. 금융감독당국이 저축은행 사태의 주연이라는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금융 불안의 '뇌관'을 제거한다는 명목아래 시장원리에 반하는 선택을 시장 참가자들에게 강요하는 등 대증요법을 쓰면서 또 다른 위기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비판이다. 지난 2008년 9월,서브프라임모기지발 위기도 따지고 보면 저소득층에게 이른바 내집 마련의 기회를 주겠다는 미국 민주당 행정부의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한은법 개정 이상은 멀고, 현실은 완강 

'한국은행을 떠나며.' 한국은행 정문에서 본관 방향으로 10여미터 떨어진 지점 오른 편에는 허름한 비석이 하나 있다. 지난 1998년 4월,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은행감독원 기능이 한은에서 분리되며 작별을 고해야 했던 이들이 남긴 '비망록'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글씨의 색깔은 바랬지만, 한은 직원들은 이를 가슴에 새겼다. 

'한국은행법의 개정'이라는 이상은 아름답지만 멀고, 현실은 완강하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 지루한 공방을 거친 끝에 외환위기의 외풍을 등에 업고 천신만고로 얻은 '전리품'을 순순히 되돌려줄리 없다는 점에서, 금융조사권을 둘러싼 한은과 금감위의 한판 대결은 전면전도 불사하는 형태로 치닫을 전망이다.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금융 조사 기능을 외압에 휘둘릴 수 있는 금융감독당국에 맡겨 두기보다, 한국은행처럼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강한 기관에 부여하는 것도 저축은행사태를 비롯한 금융위기의 주기적인 재발을 막는 방편일 수 있다"며 한은에 대한 조사권 부여에 찬성했다. 

하지만 정부 여당이 기준 금리를 결정하는 한국 은행의 '독자 행보'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번 대결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1979년 고금리 정책으로 지미 카터의 재선을 가로막은 폴 볼커와 같은 역할을 한은에 결코 바라지 않는 것은 정부 여당의 인지상정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차기 정부에서 어떤 식으로든 금융감독당국의 감독권을 수술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yungh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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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시대 파워 엘리트 |소망교회 인맥



신앙으로 뭉친 엘리트 고비 고비마다 헌신적 지원

▶‘누구야, 정주영 회장을 애도하는 아주머니 팬인가. ’ 지난 2001년 3월, 고 정주영 회장빈소가 설치된 청운동 사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부터, 현대소속의 프로축구 선수들까지,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고(故) 정주영 회장의 조문행렬에 참석하며 말 그대로 빈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수행원 하나 없이 빈소를 방문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슬며시 조문을 마치고 돌아간 이가 바로 ‘춤추는 총장’으로 널리 알려진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이다. 학내 정보화와 더불어 발전기금 1000억 원 목표를 달성한 CEO형 총장. 하지만 역대 인수위원장의 중량감을 고려할 때, 이명박 대통령 당선후 그녀의 인수위원장 발탁은 파격적이었다는 평가다.

▶‘눈빛이 살아 있더라구요. 자기 일처럼 열심히 활동하는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 2002년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운동 현장. 그의 선거 운동을 도왔던 한나라당 출신의 한 인사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교인출신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당시에도 한나라당 당원들을 압도하는 그들의 ‘일당백’ 활약상은, 이명박 대통령과 우리나라의 범 기독교 지지 세력과의 탄탄한 유대 관계를 가늠하게 했다고 회고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소망교회를 비롯한 기독교 인맥들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다.

소 망교회 인맥이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뜨거운 조명을 받고 있다.이 교회는 선거를 앞두고 때로는 이명박 장로의 열렬한 지지 세력으로,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권력 핵심부의 ‘인재풀’ 역할을 하며 기독교도 대통령의 화려한 비상(飛上)을 뒷받침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CEO출신 정치인으로, 여의도 정치와 정당 조직에 익숙하지 않던 이명박 대통령의 풀뿌리 지원 세력을 자처하며, 선거를 비롯한 주요 고비 때마다 위기탈출의 천군만마(千軍輓馬) 역할을 해 온 것이 ‘범 기독교세력’이며, 그 핵심에 소망교회가 있다는 것이 교단 사정에 밝은 한 인사의 전언이다.

이 점은 이명박 정부의 실세로 통하는 주요 인사들의 면면을 봐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 경제 정책의 ‘코디네이터’ 로 통하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바로 소망교회 출신이다.

그는 지난 80년대부터 소망교회에 다니며 이명박 대통령과 교유의 끈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이명박 대통령의 경제 공약인 747정책이 바로 그의 작품.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과 더불어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에 비유할 수 있는 위상을 현 정부에서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 장관과 더불어 주목을 받은 또 다른 소망교회 출신 인사가 바로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과 더불어 인수위원장에 낙점됐던 그녀는, 이 교회 권사로 활동하다 이명박 대통령 눈에 띤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점령군’에 비유되는 인수위원회 좌장에 중량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며,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위원 전력까지 지닌 여성 총장이 발탁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서울시장 시절부터 ‘국제전략연구원(GSI)을 매개로 교수자문단 그룹을 운영하며 대선을 염두에 둔 행보를 펼치던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 공관에 그를 초청해 정책 자문과 더불어 종종 식사를 함께 할 정도로 폭넓은 신뢰를 보냈다는 후문이다. 이밖에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 등도 눈에 띄는 소망교회 신자들이다.

기업인 신도들도 폭넓은 지지세력

“21세기는 영성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개인이나 기업도 영성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고 경영을 해 나가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조차 종교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바로 김신배 SK텔레콤 사장도 소망교회 신자다. 어디 김신배 사장뿐일까. 소망교회 신자 중에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 자회사부터 공룡기업 SK텔레콤까지, 내로라하는 기업의 경영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이들은 누구보다 열렬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자 그룹에 속한다. 종교적 동질감, 그리고 기업인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인연의 끈이다.

지난 대선 정국 때 이명박 대통령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자 “기업 경영자치고 그 정도 문제 없는 이가 어디 있느냐”며 적극적 변호에 나섰던 대표적 오피니언 리더 그룹이기도 하다. 정영학 렉스마크 코리아 사장, 민경윤 한미약품 부회장, 장병구 수협 신용 대표 등이 이 교회의 교인이다.

법인세 인하, 기업 규제 완화, 공기업 개혁, 협력적 노사관계를 비롯한 각종 경제 개혁의 기치를 들고, ‘비즈니스 프렌드리’를 강조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 신경제 정책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다. 소망교회 인맥의 또 다른 축은,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지만 매주 이 교회에서 예배를 하는 평범한 신도들이다. 지난 1977년 설립된 소망교회는, 신자 수만 7만여 명에 달한다.

신도의 98% 이상이 대졸자들인 식자층인데, 선교활동에 관한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기독교 교단에서도 학습 조직이 가장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평가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교인끼리 모인 공동체를 비롯해 뚜렷한 목적 아래 모인 공동체, 학교 동창생끼리 따로 만든 공동체 등 공식 등록된 것만 30개에 가깝다.

이들은 지난해 대선당시, 이명박 후보의 ’리더십‘에 대한 입소문을 내며 강남 지역에서의 절대적인 우위를 뒷받침하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소망교회 출신이 이러한 활동에 참여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범 기독교계 신도들은 과거 주요 선거 국면 때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자원봉사자 활동을 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핵심 세력“이라고 지적했다.

정당 조직보다 더 끈끈한 유대감이 자산이다. 현대건설 최고경영자로 근무할 당시, 소망교회 본당 건설에 도움을 준 바 있던 이 대통령은 소망 교회의 평범한 2030부부모임이 작년말 발표한 한 저서에 대통령 당선 직후 자신의 추천사를 기고할 정도로 강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유대감의 뿌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깊은 신앙심이다. “(간염이)발병한 지 13년 만인 1990년, 간의 염증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간염 바이러스까지 사라졌다는 검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의사도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면서 다시 검사를 했지만, 재검 결과도 같았습니다. ”

소망교회 2030 신자들이 저술한 <평생을 바꾸는 힘, 30대 신앙>에 실린 ‘내 성공의 비결은 30대 신앙생활에 있다’는 이명박 대통령 기고문의 일부이다. 현대건설 재직시절, 간염 완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신의 존재를 다시 깨닫게 됐다는 내용이다.

가난하던 시절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던 그가, 결과적으로 평소의 칼날같은 인사 원칙의 훼손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교회 출신 인사들을 중용해 ‘신정부는 고소영(고대-소망교회-영남)’이라는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박영환 기자(blade@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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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열대성 소나기가 내렸다. 질좋은 ‘차’와 커피의 나라. 인도네시아 현지에 진출한 국내외 가전 회사들을 상대로 반도체, LCD부품등을 판매했다. LS전선의 해외 사업부문장이 그의 공식직함이었다. 공격적이며, 속도를 중시하는 성향은 이때 형성됐다고. 

‘맨땅에 헤딩을 해야 했던 시절’로 당시를 회고하는 그는, 지난 2005년 그룹 측의 ‘러브콜’을 받는다. 이번에는 GS네오텍의 수장이다. 건설사 근무 경험이라고는 전무했다. 뜻밖의 인사로 받아들여지던 배경이다. 그런 그가, 복귀 후 당시만 해도 뜬금없이 들리던 ‘선언’을 한다. 이 회사가 제조가 아닌 ‘서비스’ 기업이라는 것. 

직원들은 술렁거렸다. 종합 건설사로서는 수익을 남기기 어려운 ‘500억원’ 이하의 공사 물량을 주로 파고들던 전문건설업체. 계열사의 물량만 처리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부채비율 0%.

‘시스템 통합(SI : System Intergration)’분야와 IT부문이, 건설과 ‘삼각 공조’를 이루던 이 회사는 GS그룹의 보수적 기풍에 더해 하청 기업 특유의 폐쇠성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최 사장의 회고다. 그는 당시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단체로 등산을 하며 거리감부터 좁혀 나갔다고.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났다. 회사 매출은 취임 당시 1800 억원에서 4000억원으로 두 배 이상 훌쩍 늘어났다. 오는 2010년까지 매출 6000억원에 영업이익률 10%를 달성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각 부문에 서비스의 색채를 입혀 부가가치를 끌어올린 덕이라고. 

건설부문에 엔지니어링 역량을 강화한 것이 주효했다. IT서비스 분야와의 시너지 창출에도 주력했다. 이영애 씨가 광고 모델로 등장한 GS건설의 아파트 브랜드 ‘자이’에 ‘홈네트워킹’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실례다. SI분야의 경우 도로정보시스템을 앞세워 ‘U-City’분야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서비스는 변화를 상징하는 키워드였다. 회사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사업 내역은 물론 사내 문화도 부드러워졌다는 평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을 더 이상 ‘동지 여러분’으로 부르지 않는다. 사우 여러분이 일상적인 호칭이 됐다. 노조 위원장 취임식에는 운동가요 대신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취임당시만 해도 정적이고 보수적이던 이 회사는 학습 지향적인 조직으로 바뀌었다. 연간 70시간에 달하는 각종 학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직원들 상당수가 전기기사, 기술사, 시스코 자격증을 비롯한 전문기술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최성진 사장은 요즘 고민이 많다. 미처 주목하지 못한 새로운 고객층,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신규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일이 당면과제이다. 그가 제시하는 맞춤형 처방전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구식이 된 비즈니스 모델을 앞세워 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파고들겠다는 복안이다. 

국내에서 단가 인상을 요구하며 건설사들과 밀고 당기기가 한창인 레미콘이나, 시멘트 분야는 그가 눈독을 들이는 비즈니스 모델이기도 하다. 발상의 전환이다. 그의 비전을 떠받치는 또 다른 축은 대체 에너지, 그리고 물 관련 산업이다. 

홈네트워킹도 블루투스 기술이 가정에 보급될 경우 지금의 ‘비투비(business to business)’에서 ‘비투시(business to consumer)’로 사업 영역이 대폭 확장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하이마트에서 소비자들이 텔레비전을 구입하듯 이 회사의 홈네트워킹 제품을 살 날이 곧 올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박영환 기자(blade@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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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이코노믹리뷰|기사입력 2007-12-20 00:03 |최종수정2007-12-20 00:12


◇공격경영으로 그룹 일궈… 글로벌 리더 도약은 진행 중◇

약관(弱冠)의 나이에 기업을 맡아 그룹으로 키운 김준기 회장. 그는 요즘 최고 경쟁력을 갖춘'글로벌 기업'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시스템 경영'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등 난관도 많은데….

                                                                  

●"고려대 경제과에 재학 중 자원 입대했던 김 회장이 제대할 무렵 부친의 회사는 자금난으로 큰 위기에 몰려 있었다. 김 회장은 이내 자신의 전공을 살려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동부건설의 전신인 미륭건설은 이런 과정을 통해 1969년 1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동부그룹이 최근 동부제강의 당진아산만 제철공장 기공식을 계기로 포스코 및 현대제철 등과 더불어 철강업계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날 기공식에서 김준기 회장은 감격 어린 어조로 그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20대 때 꿈꾸었던 오랜 소망을 이뤘습니다."

김 회장의 제철에 대한 열정은 최근 세계 6위 웨이퍼 제조업체인 실트론의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매각 대금을 거의 모두 제철공장 전기로 건설비용에 쏟아 부은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부제강의 본격 가동은 그가 그룹의 미래상을 '초우량 글로벌기업'으로 상정하고 있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그는 최근 '도전정신'을 주제로 한 사내 경영 메시지에서 이같이 역설한 바 있다.

"모든 임직원은 회사의 비전과 전략, 혁신이 모두 어우러진 성장 경영 계획을 도전적으로 설정하고 나아가야만 한다."

계열사 모두 국내 제일의 차원을 뛰어넘어 세계 제일과 경쟁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는 이를'기업가정신'으로 요약하고 있다.

"기업가정신은 새로운 제품과 혁신적인 기술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대담하게 도전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혁신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글로벌기업 도전은 《주역》에서 말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요체를 통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사실 김 회장이 걸어 온 길은 줄기찬 '도전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맨몸으로 기업을 세워 창업 20년 만에 회사를 유수 재벌그룹으로 도약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에 해당한다. 그는 1944년에 강원도 동해시에서 부친 김진만 씨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동해시 일대에서 세거(世居)해 온 토호(土豪)였다. 제헌국회의원과 참의원을 지낸 백부에 이어 정계에 진출한 부친은 공화당 시절 무려 7번에 걸쳐 내리 당선돼 국회 부의장을 지낸 당대의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경기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 경제과에 재학 중 자원 입대했던 김 회장이 제대할 무렵 부친의 회사는 자금난으로 큰 위기에 몰려 있었다. 김 회장은 이내 자신의 전공을 살려 기업다운 기업을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약관의 나이에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그룹의 주력사인 동부건설의 전신인 미륭건설은 이런 과정을 통해 1969년 1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약관 나이에 건설업에 뛰어들어

미륭건설 설립 당시 그의 출사표는 간단명료했다.

"기업은 자본주주의 꽃이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이다."

오늘의 동부그룹은 바로 그의 이런 탁견(卓見)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당시 건설업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미8군 공사를 따내기 위해 먼저 회사 내에 국제부를 설치했다. 아무도 국제부를 생각지도 못한 시절에 그가 이런 부서를 설치해 놓고 먼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부건설은 1971년에 미8군사령부 내의 군인 숙소와 대형 식당 건설 공사를 수주하면서 국제수준의 건설역량과 노하우를 쌓게 되었다. 당시 건설 현장을 뛰어다니며 임직원을 독려하는 김 회장을 유심히 지켜본 미8군은 동부건설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공식 추천했다. 사우디에는 이미 동아건설과 대림산업 등 유수한 국내 건설업체들이 모두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업체 모두 도로공사와 터파기 등 단순공사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더구나 입찰과 수송 등을 모두 외국 회사에 하청을 주어 소요 자재를 조달하고 있었다. 자재 반입의 지연에 따른 공기 차질로 엄청난 손실을 빚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한마디로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었다.

중동건설의 적자공사 사례를 통찰한 김 회장은 우선 항만사정과 식수사정, 해상운송 경로 등 대형 복합공사를 수주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사를 마친 뒤 1975년 4월에 쥬베일 해군기지 건설 공사에 응찰했다. 동부건설이 한국 건설업체로는 사상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급공사를 따내는 쾌거를 이룬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치밀한 준비가 있기에 가능했다.

당시 김 회장은 공사 과정에서 무서울 정도로 원가를 절감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질 좋고 가격이 적절한 자재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였다. 그는 미국 상공회의소와 건설협회 등을 수시로 방문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유럽과 중동의 거래처와 상담하기 위해 1주일에 무려 50시간 가까이 비행기 안에서 지낼 때도 있었다. 훗날 김 회장은 공사에 임할 당시의 심경을 이같이 술회한 바 있다.

"우리가 1달러라도 낭비하면 이는 곧 그만큼 조국을 배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부건설이 쥬베일 공사 이후 제2∼3의 대형 복합공사를 손쉽게 따낼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후 동부건설은 미 국방성의 파트너가 된 것을 계기로 1980년에 사우디 국방성 청사공사, 1982년에 사우디 외무성 본청공사 등을 차례로 따냈다. 당시 동부건설의 자자한 명성을 익히 들은 외국의 거래처는 사주가 나이 많은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다가 김 회장이 29세의 젊은 사람인 사실을 알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삼국시대 오나라 손견(孫堅) 떠올라

역사상 김 회장과 같은 약관의 나이에 천하를 호령하며 기업(起業)한 대표적인 인물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견(孫堅)을 들 수 있다. 《삼국연의》는 황건적과 동탁(董卓)의 난이 일어났을 때 촉나라의 유비(劉備)와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가장 먼저 기의(起義)한 것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손견은 어릴 때부터 담략(膽略)이 뛰어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7세 때 부친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해적 10여 명이 상인들의 재물을 빼앗아 강 언덕 위에서 나누는 것을 보고 곧바로 칼을 빼들고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이쪽저쪽을 가리키는 손짓을 해댔다. 이에 놀란 해적들은 관군이 온 줄 알고 황급히 도주했다. 이 소문이 인근에 널리 알려지자 그는 곧 오군(吳郡)의 교위(校尉)로 천거되었다.

그가 반적의 소탕전에 나선 것은 회계(會稽)에서 허생(許生)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였다. 허생의 무리가 회남(淮南) 일대를 진동시킬 당시 조정의 명을 받은 양주(揚州)자사는 2년 가까이 허생의 무리와 대치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때 손견이 양주자사의 허락을 받고 참전해 허생의 영채를 하나씩 점거해 나가자 반적들은 손견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로써 2년간에 걸쳐 회남 일대를 진동시킨 허생의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손견은 하비현 현승(縣丞)으로 있을 당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곧바로 무리를 이끌고 가 인근 마을의 황건적을 소탕했다. 이는 조조와 유비가 기의한 것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다. 이때의 공으로 그는 별군사마(別軍司馬)에 제수되어 낙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황건적이 궤멸될 즈음 거기장군(車騎將軍) 장온(張溫)이 휘하 장수 주신(周愼)에게 보기 3만 명을 이끌고 가 잔당을 치게 하자 손견이 주신에게 이같이 건의했다.

"제가 보기(步騎) 1만 명을 이끌고 가 그들의 양도(糧道)를 끊을 터이니 장군은 대병을 몰아 그 뒤를 치십시오. 그러면 적들이 반드시 피로와 기아로 감히 싸우지 못하고 도주할 것이니 이때 다시 힘을 합쳐 그들을 토벌하면 양주(凉州)는 곧 평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이 이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게 움직이다 역습을 받고 이내 치중(輜重)을 버린 채 황급히 도주했다. 장온이 다시 동탁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 잔당을 치게 했으나 동탁의 진군 행로를 알아 챈 잔당은 오히려 동탁군을 포위해 버렸다. 장온이 속수무책으로 철군한 동탁을 꾸짖었으나 동탁의 응답하는 태도가 매우 불손했다. 이때 손견이 장온에게 이같이 건의했다.

"마땅히 장군의 소환에 즉시 응하지 않은 죄목으로 참수(斬首)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온은 우유부단했다.

"동탁은 황하 일대에서 위명(威名)을 날리고 있는데 지금 그를 죽이면 서정(西征)할 때 기댈 곳이 없게 되오."

그러자 손견이 반박했다.

"명공(明公)은 친히 조정의 군사를 이끌면서 왜 동탁에게 기대려는 것입니까. 동탁은 상관을 무시하고 예를 갖추지 않았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목입니다. 적들이 발호한 지 오래되어 응당 때에 맞춰 토벌해야 함에도 동탁은 안 된다고 하여 출병을 저지하며 군심을 동요시켰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목입니다. 동탁은 명을 받아 출전하고도 전공이 없는 데다 명공의 부름을 받고도 멋대로 늦게 오고 태도 또한 불손하니 이것이 세 번째 죄목입니다. 고래로 명장들 치고 군사를 통솔하면서 참수의 결단을 내리지 않고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온은 끝내 손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만일 장온이 손견의 말을 들었다면 후한의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손견은 무략(武略)도 뛰어났지만 난세에 절실히 필요한 단호한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는 훗날 동부그룹이 영남화학을 인수할 당시 삼성과 효성의 응찰가격보다 무려 170여 억 원이나 높은 응찰가격을 써내 재계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것에 비유할 만하다.

결단력 돋보인 영남화학 인수

손견은 동탁이 태사(太師)가 되어 전횡하자 이내 군사를 이끌고 동탁토벌군에 가담했다. 동탁은 휘하 장수 호진(胡軫)에게 명하여 손견을 치도록 하면서 여포(呂布)를 기독(騎督: 기병대장)으로 삼았다. 손견은 호진이 여포와 불목(不睦)해 동탁군의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노려 동탁군을 대파했다. 얼마 후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던 동탁군의 화웅(華雄)이 야음을 틈타 손견의 영채를 급습했다. 이를 미리 알아낸 손견은 곧 퇴로를 차단한 뒤 매복전술로 이들을 엄살(掩殺)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시석(矢石)을 피해 달아나려던 화웅은 이내 비시(飛矢)를 맞고 말에서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다.

당시 동탁의 대장 화웅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삼국연의》는 이를 멋대로 개작해 관우(關羽)가 화웅의 목을 벤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화웅 못지않게 무용을 자랑했던 동탁군의 여포를 무찌르고 처음으로 낙양을 수복한 것도 손견의 공이었다. 당시 손견은 매복전술로 여포군을 대파하고 낙양으로 입성한 뒤 동탁이 도굴한 능침(陵寢)을 모두 복구하고 종묘 터를 깨끗이 소제했다. 천하인이 손견을 칭송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손견의 탁월한 무략은 당시 동탁의 언급에 잘 나타나 있다.

"주신과 장온 같은 자들이 만일 손견의 계책을 이용했다면 양주(凉州)도 능히 평정했을 것이다. 손견이 비록 지위는 낮으나 식견만큼은 그들을 뛰어넘으니 참으로 인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동탁을 토벌키 위해 기의한 군웅들 중 동탁군을 유일하게 무너뜨린 사람은 손견뿐이었다. 훗날 그의 아들 손권(孫權)이 강동을 기반으로 오나라를 건국해 촉의 유비 및 위의 조조와 더불어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뤄 천하를 호령케 된 것도 바로 손견의 기업(起業)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김 회장이 약관의 나이에 탁월한 지략과 과단으로 오늘의 동부그룹을 기업(起業)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김 회장은 1970년대부터 10년 동안 중동 건설시장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토대로 오늘의 동부그룹을 형성했다. 당시 그가 동원한 기법은 과감한 투자를 통한 적극적인 M&A 접근법이었다. 덩치가 큰 삼척산업과 한국자동차보험, 동진제강, 울산석유화학, 영남화학 등을 차례로 인수한 것은 공격적인 M&A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에 속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약관의 나이에 탁월한 기업관을 세우고, 남다른 발상을 토대로 치밀하게 대비하고, 열정적으로 사업에 임한 데서 가능했다. 그는 이를 소위 '3다(三多)'로 요약하고 있다. 다사(多思 : 많이 생각함) 다학(多學 : 많이 공부함) 다로(多勞 : 많이 일함)가 그것이다.

이 중 '다학'은 '3다' 정신의 정수(精髓)에 해당한다. 이는 당초 쥬베일 공사 당시 김 회장이 현장에서 근로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작업을 독려할 때 내세운 것이었다. 당시 김 회장은 현장을 지휘하며 모든 문제를 기존의 노가다식 경험에 의존해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노동자들이 공사장 주변의 작은 토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하는 것을 뜻하는 일본어 '도카타'에서 나온 '노가다'는 우리말의 '주먹구구 공사'에 해당한다. 그가 볼 때 공사에 참여한 모든 임직원이 학구열에 불타는 학자처럼 겸허한 자세로 당면한 과제를 하나씩 풀어 가는 지혜를 발휘해야만 했다. 김 회장은 곧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김 회장은 '노가다' 로 통하는 공사판에서 나이 많은 기능 사원에게는 경어를 쓰고, 기능 사원과 간부사원의 식탁 구분을 없애는 등 가족적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다. 이는 '노가다' 공사판을 일종의 공부하는 '연구실' 분위기로 바꾸기 위한 심려(深慮)의 소산이었다. "

노가다 공사판을 연구실 분위기로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공부하는 자세로 일해 나갑시다."

'노가다'로 통하는 공사판에서 김 회장은 나이 많은 기능 사원에게는 경어를 쓰고, 식당에서 기능 사원과 간부사원의 식탁 구분을 없애는 등 가족적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다. 이는 '노가다' 공사판을 일종의 공부하는 '연구실' 분위기로 바꾸기 위한 심려(深慮)의 소산이었다.

동부라는 운명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구성원의 자격이 있다는 그의 이런 언급은 정실인사를 극도로 배격하는 그의 용인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부그룹의 임직원이 여타 회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애사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지난 2001년에 삼성이 내세운 소위 '시스템경영'을 적극 도입하기 위해 삼성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한 바 있다. '시스템경영'은 그의 평소 지론이다. 실제로 그는 창업 초기부터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영입하는 용인술을 발휘해 왔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시스템경영'의 궁극적인 성패도 결국 인재의 유무에 의해 결판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근 김 회장은 소위 '동부 미션'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이는 동부그룹의 각 계열사가 참여하는 모든 사업 부문에서 최고의 이익률과 성장률을 달성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 회장이 보여준 그간의 행보에도 적잖은 문제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는 지난 2004년 말에 동부건설의 자회사인 동부월드가 짓고 있는 골프장을 주당 1원에 사들여 인수하려다가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곧바로 계획을 철회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동부건설과 김 회장의 신용도와 명예가 크게 추락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간 김 회장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향후 이와 유사한 행보가 계속 불거져 나올 경우 그가 시종여일하게 내세우고 있는 '흥업보국(興業報國)'의 기치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보다 신중하면서도 사려 깊은 행보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 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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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이코노믹리뷰|기사입력 2008-01-10 05:45 |최종수정2008-01-10 05:51


◇ 실용정부‘간판 회장’…‘MB노믹스’꿈 이뤄낼까◇

효성그룹과 전경련을 움직이고 있는 조석래 회장. 이명박 당선자의 사돈이라는 사실에 그의 행보에 더 관심이 간다. 모든 조건이 갖춰진 지금, 그는 흥업보국(興業保國)의 사명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끊임없이 배우며 오늘의 효성그룹을 일군 조 회장의 ‘호학이재’ 행보는 자공(子貢)과 크게 닮아 있다. 실제로 조 회장은 지금도 바쁜 일정 속에서 수시로 짬을 내각계 전문가들과 만나 조언을 듣는 것을 즐긴다.”

●“친동생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아들이 이 후보의 셋째 딸과 결혼한 까닭에 그는 이명박 당선자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자 짐이다.”

전 경련은 대선을 1주일 앞둔 시점에 회관 1층 로비에서‘문화사랑 기업사랑 음악회’를 개최해 세인들의 눈길을 끈 바 있다. 평소 바쁜 생활에 젖어 있는 직장인들에게 문화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게 그 취지였으나 기획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새 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한 전경련의 비상한 활약상을 예감케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관측통들은 하나같이 재계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전경련의 역할이 대선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현재 전경련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이끌고 있다. 조 회장은 새해 신년사에서 새 정부가 추진해야 할 경제 과제의 기본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간 참여정부 하에서 현금을 쌓아 놓고도 투자를 머뭇거리고 있던 대기업들이 투자를 대폭 확대해 새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사실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재계가 먼저 손을 내밀어 새 정부와의‘밀월(蜜月)’을 적극 추구하고 나서는 셈이다.

당초 올해 초만 하더라도 참여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3번째 연임을 강력히 희망한 까닭에 조 회장이 새 회장직에 오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강 회장이 아들과 벌인 경영권 분쟁으로 회장단의 불신임을 받게 되자 이내 대안으로 급부상해 마침내 제31대 회장에 취임케 되었다. 당시 전경련은 회장단 내의 이견으로 신임 회장을 선출치 못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는 전경련 회장단이 만장일치로 신임 회장을 추대하는 관행을 유지한 지 4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 회장도 이를 의식한 듯 취임 일성으로 회장단의 단합을 강조했으나 취임 초기만 해도 그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취임 직후에 갖기로 한 첫 회장단 모임이 삼성과 LG 등 4대 메이저 그룹 총수들의 외면으로 무기 연기된 것이 그 실례이다. 그러나 조 회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름대로 소신행보를 계속했다. 그는 취임 직후에 가진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철폐를 과감히 요구하는 소신행보로 재계 안팎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투자방법’ 등을 묻는 질문에 이런 비유를 들어 참여정부를 비판했다.

“고요한 연못에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누군가 돌멩이 하나를 던지면 그 물고기는 이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참 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어 참여정부 하에서 만연한 반(反)기업 정서와 불안정한 노사관계 등을 투자침체의 원흉으로 지목하면서 노조가 경영에 간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토론회 말미에 이같이 덧붙였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기업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정부는 한미FTA로 늘어나는 세수를 이용해 농촌을 적극 도와야 하고, 농촌 역시 농산물 고급화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는 참여정부가 최대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한미FTA 타결’의 공을 한껏 높이면서도 재계의 주장을 가감 없이 전하는 절묘한 화술을 구사한 것이다. 재계와 참여정부의 불편한 관계를 감안할 때 전경련 회장으로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리더십을 보여준 셈이다.

그의 탁월한 리더십은 그룹 운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원래 효성그룹은 전 임직원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효 성그룹의 ‘주경야독’ 풍조는 기본적으로 조 회장이 견지하고 있는 소위 ‘호학이재(好學理財)’의 행보에서 나온 것이다. 조 회장은 공부하는 재벌총수로 유명하다. 그는 끊임없이 배워야만 무한경쟁의 글로벌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룹 내에‘배우고 익혀야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격언이 불문율로 자리 잡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학이재(好學理財), 공부하는 재벌 총수

동 양의 전통에서 볼 때‘호학’과 ‘이재’는 동떨어진 개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는 성리학(性理學)이 만연된 이후에 빚어진 일이다. ‘호학’을 자부한 공자는 결코 ‘이재’를 사갈시(蛇蝎視)한 적이 없다. ‘호학’을 군자의 기본 덕목으로 제시한 공자는 《논어, 양화》편’에서‘호학’의 효능을 이같이 풀이한 바 있다.

“인(仁: 어짊)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지(知: 지식)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방자하게 되고, 신(信: 신의)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기강을 해치게 되고, 직(直: 정직)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옹졸하게 되고, 용(勇: 용맹)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어지럽게 되고, 강(剛: 굳셈)만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경솔하게 된다.”

공자는 사람이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지(知)·인(仁)·용(勇)등의 덕목이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공자의 초기 제자 중 ‘호학’의 대표적 인물로 안회(顔回)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호학’에서 안회와 쌍벽을 이룬 제자가 한 사람 더 있었다. 그가 바로 자공(子貢)이다.

훗날 송대의 유자들은‘호학’과 ‘이재’를 철저히 분리한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나머지 ‘이재’에 실패한 안회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재’에 성공한 자공을 크게 폄하했다. 그러나 이는 공자의 기본 취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당시 자공은 공자의 제자들 중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총명한 인물이었다. 《논어, 자장》편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하루는 자공의 제자인 진항(陳亢)이 스승에게 말하기를,‘선생이 공손해서 그렇지 공자가 어찌 선생보다 현명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자공은 제자의 이런 발언에 펄쩍 뛰었으나 그는 사실 원칙을 포기하지 않고도 능히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당대의 기남(奇男)이었다. 그가 세 치 혀로 전국시대를 풍미한 소위 종횡가(縱橫家)의 효시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훗 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 중니제자열전》에서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할애해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당시 자공은 패권을 다투던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 사이를 오가며 현란한 유세를 펼쳐 노나라를 제나라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낸 것은 물론 구천의 패천하(覇天下)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를 두고 사마천은 《중니제자열전》에서 이같이 평해 놓았다.

“자 공이 한 번 나서자 노나라가 존속되고, 제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오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강국이 되고, 월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다.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자 국제 간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각 큰 변동이 생긴 것이다.”

《논 어》에는 안회와 자공이 병칭되어 나타나는 대목이 제법 많다. 이는 두 사람의 나이가 비슷한 데다가 여러모로 대비된 데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공자는 자공이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날로 성장하고 있는 데 반해 안회는 명성도 얻지 못한 채 가난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적잖이 우울해했다. 《논어, 공야장》편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공자가 자공에게 묻기를, ‘너와 안회 중 누가 나은가’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했다.”

자 공의 대답이 참으로 교묘하기 그지없다. 그는 스승이 질문하는 의도를 미리 간파하고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낮추면서 안회를 극찬하는 화술을 구사한 것이다. 공자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자공으로부터 이런 절묘한 대답을 듣고는 적잖이 심란했을 것이다. 자공이‘호학’은 물론 ‘이재’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도 이런 언변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사기, 화식열전》은 자공의 ‘이재’ 능력을 이같이 극찬해 놓았다.

“공자의 제자 중 자공이 가장 풍요로워 말 네 필을 연결해 타고 다녔고, 비단 등의 폐백으로 제후들에게 빙례(聘禮: 초빙에 응하는 예)를 갖췄다. 이르는 곳마다 그곳 군주들과 대등한 예로 대접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자의 명예를 널리 드날리는 데 자공이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훗날 송나라 유자들은 거만의 재산을 모은 자공의 ‘이재’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호학’마저 크게 폄하해 놓은 것이다. 이들의 왜곡된 평가를 계기로 ‘호학’과 ‘이재’를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그릇된 풍조가 조성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자공은 공자 사후 상례(喪禮)를 주재한 것은 물론 3년상이 끝난 뒤에도 계속 3년이나 더 공자묘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한 유일한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재’에도 밝았지만 안회 못지않게 ‘호학’에도 뛰어났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노나라에서 최초의 《논어》인 소위 《노론(魯論)》이 나온 직후 제나라에서 이에 대응하는 《제론(齊論)》이 편제된 데에는 제나라에 처음으로 유학을 전한 그의 공이 컸다.

그런 점에서 끊임없이 배우며 오늘의 효성그룹을 일군 조 회장의 ‘호학이재’ 행보는 자공과 크게 닮아 있다. 실제로 조 회장은 지금도 바쁜 일정 속에서 수시로 짬을 내 각계 전문가들과 만나 조언을 듣는 것을 즐긴다. 관계 서적을 부지런히 읽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임직원들에게 늘 기업CEO로서의 ‘프로정신’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프로정신’을 이같이 풀이하고 있다.

“임직원 모두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항상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생각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하는 개척정신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프로정신이다.”

그가 말하는 프로정신은 바로 끊임없이 스스로 연찬(硏鑽)하며 새로운 분야에 과감히 도전하는 ‘호학이재’ 행보를 달리 표현한 셈이다. 실제로 조 회장을 만나본 사람들은 첨단과학 분야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두른다.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끊임없는 독서, 첨단 과학 지식 해박해

그 의 ‘호학이재’ 행보는 기본적으로 부전자전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경남 함안군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6·10만세 사건 때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중앙고보 4학년을 중퇴했던 조홍제 전 회장은 나이 30에 일본대 독일경제학과를 졸업한 ‘호학’ 기업인이었다. 그는 일제 때 고향 친구인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1000만 원을 빌려주었다가 대부금의 주식 전환을 조건으로 동업 제안을 받으면서 사업에 투신했다.

이후 삼성물산의 부사장직을 맡아 외부영업을 전담케 된 그는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삼성물산이 한창 호조를 보이던 1960년 3월에 ‘동업관계의 청산’ 통보를 받게 된 그는 언젠가는 독립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지분배분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결국 그는 1962년 9월에 지분문제를 포기한 채 56세의 나이에 기왕에 설립한 효성물산을 재정비해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첫 번째 품목으로 나일론을 선택한 그는 1966년에 과감히 울산에 공장을 지었다. 그는 불과 수년 만에 동양나일론이 나일론업계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여세를 몰아 동생이 운영하는 대전피혁과 뒤늦게 삼성에서 지분 몫으로 건네 받은 한국타이어를 합병해 회사의 덩치를 비약적으로 키웠다. 그는 사업이 한창 확장되던 1970년대 초에 세 아들에게 기업을 나눠주어 경영을 책임지게 했다. 지분배분 문제로 삼성물산과 힘겹게 싸웠던 일을 거울삼아 형제 간의 지분분쟁을 미연에 방지키 위한 배려였다. 이에 장남인 조 회장은 효성물산 계열을, 차남인 조양래는 한국타이어 계열, 막내인 조욱래는 대전피혁 계열을 떠맡게 되었다.

조 전 회장은 1978년에 스스로 경영일선에서 퇴진하면서 세 아들에게 각기 다른 내용의 좌우명을 써 주었다. 장남에게는‘숭덕광업(崇德廣業: 덕을 숭상하며 사업을 넓힘)’차남에게는 ‘자강불식(自强不息: 쉼 없이 노력함)’막내에게는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대비해 환란이 없게 함)’이라는 글을 주었다. 이후 3형제는 부친의 좌우명 아래‘한 지붕 3가족’이라는 평을 들으며 일치단결 해 효성그룹의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이들 3형제가 이끄는 3개 계열사는 지난 1980년에 주거래 은행을 달리 하면서 완전한 독립체제로 탈바꿈했다.

효성물산을 떠맡아 오늘의 효성그룹을 이룬 조 회장은 1935년 11월에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릴 때 꿈은 이공계 대학 교수였다. 그가 경기고를 나와 곧바로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로 진학해 화공학을 전공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리노이 대학원에서 화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내친김에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던 중 1966년 초에 갑작스레 부친으로부터 급거 귀국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이는 당시 부친이 동양나일론 공장 건설을 서두르면서 화공학을 전공한 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관리부장직을 시작으로 계열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된 그는 주변으로부터 ‘재벌 2세’라는 평가 대신 ‘전문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듣기 위해‘주경야독’의 자세로 부단히 노력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훗날 그에게‘학자풍의 재벌총수’라는 닉네임을 안겨주었다. 그의 학자풍 행보는 자식들에 대한 성공적인 교육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재 예일대를 졸업한 뒤 게이오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장남 조현준은 지난 1997년에 입사해 그룹 부사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1998년에 하버드대에서 법학박사를 받고 뉴욕주의 변호사로 활동하던 차남 조현문은 이듬해에 그룹의 경영전략 2팀장으로 합류했다. 명문 브라운대를 졸업한 막내 조현상은 미국의 컨설팅업체 등을 거쳐 지난 2000년 경영에 참여했다. 현재 이들 3형제는 효성그룹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불철주야로 뛰고 있다. 효성그룹은 지난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재계 서열 4위에 랭크된 바 있다. 효성그룹이 최근 제2의 도약을 기치로 내건 것도 이들의 눈부신 활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와 사돈… 행보에 주목

그러나 조 회장이 시종 견지해 온 ‘호학이재’ 행보가 늘 성공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지난 7월의 ‘CEO 하계포럼’에 행한 부적절한 발언이 그 실례이다.

“우리 경제가 짧은 시간에 성장하다보니 적잖은 부작용이 있었다. 무균으로 자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제를 최우선시하는 경제대통령이다.”

그의 이런 발언은 당시 한창 경선이 진행 중인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지원 사격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컸다. 그는 친동생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아들이 최근 이 후보의 셋째 딸과 결혼한 까닭에 당시 이 후보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정계는 물론 재계 안팎으로부터 적잖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이후 조 회장은 대선이 가까워 올수록 언행을 조심하며 극도로 신중한 행보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의외의 일로 또 다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친동생이 운영하는 한국타이어가 최근 직원들의 잇단 돌연사로 커다란 물의를 빚은 데 이어 해외지사의 부당노동행위로 여타 한국 기업들까지 곤경에 빠뜨린 것이 배경이었다.

재계 관측통들은 한국타이어가 비록 법적으로는 효성그룹과는 별개로 존재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그의 영향권 내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호학이재’의 행보로 호평을 받고 있는 그가 ‘흥업보국(興業報國)’의 상징인 전경련 회장으로서 향후 어떤 조치를 취할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신동준 고전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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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Maker |고전 전문가가 본 이명박 리더십

이코노믹리뷰|기사입력 2008-01-01 20:57


◇“말(馬) 위에서 천하 얻었으면 말에서 내려와 천하 다스려야”◇

●국민 마음 움직인 건 이념 아닌 먹고사는 문제

●得國 성과에 도취 治國에서 칼 휘두르면 안 돼

●실용정부 최대 과제는 탈이념·탈구태·탈불신

                                                                  
CEO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건 민식(民食)의 중요성을 꿰 뚫었기 때문이다. 이는 공자가 역설한 선부후교(先富後敎)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의 ‘불도저 리더십’에 대해선 의구심을 갖는 국민들도 많은데….

정 계 입문 이전에 이미 샐러리맨 신화를 쓴 바 있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사상 초유의 ‘CEO 출신 대통령’이라는 신화마저 만들어냈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CEO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의 당선은 기본적으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 따른 반사이익의 성격이 짙다. 이는 그간 참여정부가 보여준 경제실패의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참여정부는 시종 소모적인 이념대립을 조장해 국론분열을 극대화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규모와 국가부채를 눈덩이처럼 키워 재정 위기를 초래하는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 결과는 바로 투자환경의 악화로 인한 경제지표의 동시 하락과 ‘부익부빈익빈’으로 상징되는 민생의 파탄으로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그의 당선은 기본적으로 《맹자(孟子)》에서 승전(勝戰)의 3대 요소로 거론된 천시(天時)와 지리(地利), 인화(人和) 중 천시에 기인하는 바 크다. 그러나 그의 승리에는 천시뿐만 아니라 지리와 인화도 크게 작용했다. 텃밭인 영남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 등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압도적으로 고른 지지를 얻은 것은 물론 대선 전에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해 각계 인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이 그 증거이다.

국민 이념성향 운운하는 건 난센스

일 각에서는 그의 승인(勝因)을 놓고 국민들의 이념적 성향이 진보에서 보수로 이동한 데 따른 결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요설(饒舌)에 불과하다. 서민들은 애초부터 자신들의 이념적 성향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먹고사는 소위 민식(民食) 문제 해결 여부에 따라 정권에 대한 지지와 철회의사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굳이 이념적 관점에서 분석할지라도 이번 대선은 오히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선택했던 중도성향의 40∼50대 유권자들이 이 당선자가 내세운‘경제대통령’에 크게 공명한 데 따른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통치에서 ‘민식’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민식’의 실패가 예외 없이 민란(民亂)으로 표출돼 끝내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동양에서 이를 가장 먼저 통찰한 인물이 바로 관중(管仲)이었다. 제환공(齊桓公)을 도와 춘추시대 전기에 첫 패업(覇業)을 이룬 그는 《관자(管子)》에서 이같이 역설한 바 있다.

“창름(창고)이 가득 차야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알게 되고, 의식(衣食)이 족해야 영욕(榮辱 : 영광과 치욕)을 알게 된다.”

관 중의 이런 입장은 소위 ‘선부후교(先富後敎)’를 역설한 공자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부민(富民)’을 전제로 한 ‘교민(敎民)’을 역설한 바 있다.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부민’이 전제되지 않는 한 예의염치를 가르치는 ‘교민’ 또한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당선자가 외교국방과 교육문제 등 당면 현안을 모두 ‘민식’ 문제의 해결에서 풀겠다고 공약한 것은 현안의 정곡을 뚫은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그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경제대통령의 리더십은 어떤 것일까. 그는 선거기간 중 이같이 역설한 바 있다.

민식(民食) 공약은 정곡을 뚫은 것

“대한민국이 어렵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리더십 부재 때문이다. 말만 잘하고 능력과 경험, 책임감이 없는 3무(無)세력 대신 일 잘하는 실용주의 세력을 선택해 달라.”

그는 ‘실용주의’에서 그 요체를 찾은 셈이다. 사실 이는 초고속성장을 이끌고 있는 중국 지도자들의 기본 노선이기도 하다. 최근 후진타오는 새로 선출된 당 중앙위원들에게 이같이 주문한 바 있다.

“우리는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해 미래를 향한 확고한 믿음과 도전정신을 가져야만 한다.”

원 래 미국에서 꽃을 피운‘실용주의’는 동양이 수천 년 전부터 추구해 온 ‘실사구시’ 정신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에서 유래한 이 말은 청대에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일삼는 성리학자들을 성토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는 국리민복(國利民福)과 무관한 일체의 논의를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에 들어와 ‘실사구시’로 치국에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로 덩샤오핑(鄧小平)을 들 수 있다. 소위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기치로 내건 그는 그 어떤 이념도 국리민복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역설하며 개혁개방을 실천에 옮겼다. 현대 중국의 초고속성장은 바로 ‘흑묘백묘론’의 개가(凱歌)가 아닐 수 없다.

BBK사건과 위장전입, 위장취업 등 숱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이 당선자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지지한 유권자들이 결코 도덕성에 둔감한 것도 아니었다. BBK사건과 관련한 검찰발표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유권자가 절반에 가까운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압승은 ‘경제대통령’을 내세운 그를 통해 경제회생을 이루고자 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그만큼 크다는 증좌이다.

실제로 많은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자칫 샌드위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그의 압승은 바로 국민들의 이런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실용주의에 기초한 ‘경제대통령’ 구호가 서민들의 여망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역대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균형발전 등 시종 정략적 행보를 일삼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민식’ 문제를 소홀히 해 결국 실패한 정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득국(得國)과 치국(治國)의 방략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야전(野戰)으로 치러지는 득국과정은 묘당(廟堂)에서 이뤄지는 치국과정과 판이하게 다르다. 전한(前漢) 제국 초기에 가의(賈誼)는 《신서(新書)》에서 그 차이를 이같이 갈파한 바 있다.

“마상(馬上)에서 득천하(得天下)할 수는 있으나 치천하(治天下)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역대정부는 득국의 성과에 도취한 나머지 치국에서마저 ‘개혁’을 구실로 시종 말 위에서 칼을 휘두르는 득국의 행보로 일관한 게 사실이다. 이들이 하나같이 국민들의 커다란 기대 속에 힘찬 출범(出帆)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에 이르러 난파 직전의 초라한 모습으로 귀범(歸帆)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상(馬上)에선 치천하(治天下)할 수 없어

‘샌 드위치론’이 비등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 상황은 춘추시대 당시 진(晉)·초(楚) 강대국 사이에 낀 정(鄭)나라와 사뭇 닮아 있다. 당시 정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식’ 문제 해결을 통한 부국강병밖에 없었다. 당초 춘추시대 최고의 현상(賢相)으로 일컬어지는 정나라 재상 자산(子産)은 부국강병을 위한 강력한 법치로 적잖은 원성을 산 바 있다. 그러나 3년 뒤에 ‘민식’문제가 해결되자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이는 ‘민식’에 따라 백성들의 태도가 돌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당선자 역시 향후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치 못할 경우 그에 따른 절망과 분노는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민식’ 해결에 성공키 위해서는 먼저 뛰어난 인재를 곁에 포진시키는 작업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초야의 인재를 두루 발탁하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등을 돌린 사람까지 과감히 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 환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관중을 재상으로 삼고, 당태종(唐太宗)이 적 편에 서 있었던 위징(魏徵)을 발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치국요람(治國要覽)인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당태종이 늘 숙연한 태도로 위징에게 경의를 표하며 정치상의 득실에 관한 자문을 구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모두 치국의 요체가 바로 조야(朝野)와 우적(友敵)을 막론하고 당대의 인재를 과감히 발탁하는 용인(用人)에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었던 셈이다.

일찍이 관중은 용인의 요체로 사람을 쓸 때 믿지 못할 자는 아예 뽑지 않고, 일단 뽑은 후에는 전적으로 일을 맡기면서 신뢰하는 ‘지(知)·용(用)·임(任)·신(信)’을 든 바 있다. 치국의 성패는 바로 인재를 알아보고 탁용(擢用)하는 지현(知賢)에 달려 있다고 갈파한 것이다. 《열자(列子)》는 ‘지현’의 의미를 이같이 풀이해 놓았다.

“치국의 성패는 지현(知賢)에 있지, 자현(自賢: 군주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함)에 있지 않다.”

주 나라의 건국 원훈인 주공(周公)이 인재가 찾아오면 먹던 음식을 뱉으며 감던 머리를 쥐어 싸고 달려나가고, 제환공이 밤에 화톳불을 피워놓고 인재를 기다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난세에 최고통치권자가 자고자대(自高自大)에 빠지면 치국에 실패하는 것은 물론 자칫 나라가 뒤집히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당선자는 벌써부터 그의 독선과 오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독선과 오만은 최고통치권자가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한 쉽게 빠질 수밖에 없는 최대의 적이기도 하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당태종조차 말년에는 위징의 간언을 물리치고 원정에 나섰다가 크게 후회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의 능력 하나만으로 지존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하나같이 독선과 오만에 빠졌다. 입지전적인 성공신화를 써온 이 당선자 역시 이런 우려를 자아낼 만한 언급을 수차례 한 바 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지도자는 절대 역사를 만들 수 없다. 가능하다고 생각해 힘을 모으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

국 민역량을 하나로 결집시켜 전진하겠다는 취지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자칫 그의 ‘불도저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킬 만한 언급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적잖은 국민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대운하건설 공약을 강행할 경우 이런 우려는 현실화될 소지가 크다. 한때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한 방편으로 ‘하면 된다’는 구호가 난무한 적이 있으나 지금은 당시의 상황과 다르다.

이 당선자는 ‘자고자대’로 일관한 노 대통령과 달리 참모들의 직설적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면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는 심사숙고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일단 희망적이다. 득국에 이어 치국에서마저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 이미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실제로 그는 노 대통령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그와 반대되는 노선을 걸으면 된다. 그러나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과제를 능동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불도저 리더십’에 대한 우려도

첫 째 탈이념(脫理念)의 경제회생이다. 이는 실사구시의 실용주의에 입각한 ‘민식’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취임 초기부터 연일 관계 장관회의를 소집해 각종 경제지표를 점검하고 국익을 위한 세일즈 정상외교에 적극 나서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둘 째 탈구태(脫舊態)의 정치개혁이다. 이는 다가오는 총선에서 지역갈등 및 이념대결 구도에 편승해 입신한 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 공천을 의미한다. 결코 논공행상이라는 소의(小義)에 얽매여 치국평천하의 대의(大義)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셋 째 탈불신(脫不信)의 사회정립이다. 그는 이미 대선 전에 BBK사건으로 혹독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이를 재임기간 내내 감계(鑑戒)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대선 10여일 전에 공표한 재산의 사회 환원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민식’에 목을 매고 있는 서민들이 믿고 따르게 된다. 사상 최초로 등장한 CEO 출신 대통령의 성패는 바로 이 3가지 과제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 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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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⑨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이코노믹리뷰 | 기사입력 2007-06-07 09:39

요즘 문국현씨를 입에 올리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선거 결과를 정확히 짚기로 유명한 김헌태 전 사회여론연구소장이 문씨 캠프로 옮겨갔으며,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도 역시 그를 지지하고 있다고 하네요. 정치인들 가운데에도 은근히 유한킴벌리 출신의 '상인'을 입에 담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고 하죠.  
경제 리더십이 올해 선거 구도를 좌우하는 핵심 어젠더로 맹위를 떨치면서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이명박씨의 대항마로 문씨가 높은 주목을 받기 때문인데요. 특히 이른바 교육리더십으로 주목받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낙마하면서 , 글로벌 기업의 베스트 프랙티스에 익숙한 문씨가 이명박 후보의 비교우위를 뒤흔들  역량의 소유자로 부쩍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고전 전문가인 신동준 정치연구소장은 문씨의 경쟁력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요. 자 그의 리더십 분석에 귀를 기울여 보시죠.
 


진보 옷 입은‘SW리더십’…
대권레이스 참가는 아직 불투명

이명박 전 시장의‘경제 리더십’을‘시멘트 리더십’으로 폄하하며 정치에 뛰어들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는 문국현 사장. 현재 단 한 사람의 대선 주자도 국민과 올바른 대화를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문 사장, 그가 갖고 있는,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리더십은 과연 무엇일까.

모수(毛遂)가 스스로 자신을 천거해 생겨난 고사성어 모수자천(毛遂自薦). 이 고사는 ‘경제 리더십’이 대선 정국의 화두로 등장해 있는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 비춰볼 때 기업 CEO인 문 사장이 스스로 ‘진정한 경제전문가’를 자처하는 논리와 사뭇 닮아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외국어대를 졸업한 문국현 사장은 지난 1974년에 유한킴벌리에 평사원으로 들어간 뒤 입사 20년 만인 지난 1995년에 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최근 유한킴벌리의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로 다시 선출되었다. 5회째 연임하는 셈이다. 고사하지 않는 한 횟수에 제한받지 않고 연임할 공산이 크다. 이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 시장이 평사원으로 입사해 현대건설 사장이 된 후 정계에 입문해 유력한 대선주자로 변신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 동안 경실련 환경정의시민연대 이사와 생명의 숲 공동대표, 아름다운 재단 이사, 내셔널트러스트 공동대표 등 각종 시민사회단체의 대표로 활약해 왔다. 이 전시장이 정계에 투신한 뒤 승승장구해 마침내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상한 것과 사뭇 대조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장수 CEO… 이명박 전 시장과 닮은꼴

그렇다면 진보적 시민단체들로부터 소위 ‘범여권’의 대선주자로 나설 것을 종용받고 있는 그 또한 과연 뒤늦게 정치권에 뛰어들어 이 전 시장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현재 그는 시민단체를 비롯한 진보진영 내에서 대권주자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통하고 있다. 서울대 경영대학의 조동성 교수는 지난 2005년에 그와 함께 펴낸 책에서 그를 이같이 칭송한 바 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한없는 긍휼(矜恤)을 느끼는 박애주의자를 본 적이 있는가? 맑은 얼굴과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인격자를 본 적이 있는가? 인생과 사회에 대한 모든 질문에 현명함과 용기에 기초해 미래를 제시해 주는 스승을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칭송이 과연 얼마나 객관성을 띠고 있는 것인지는 분별하기 쉽지 않으나 그가 결코 간단한 인물이 아닌 것만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작 그의 속셈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의 발언 중에는 국민지지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 전 시장을 겨냥한 언급이 적지 않다. 이는 선두주자를 타격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고단수의 책략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21세기의 비전과 관련해 이같이 언급한 바 있다.

“과거는 개발독재와 시멘트, 부동산 거품, 양극화로 정의된다. 이는 자산축적을 소수에게 집중시킬 뿐이고,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경쟁력을 악화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사람의 창조력과 소프트웨어가 중시되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이름만 거론하지 않았을 뿐 그는 이 전 시장의‘경제리더십’을 일종의 ‘시멘트리더십’으로 규정한 셈이다. 같은 기업CEO 출신으로서 이 전 시장의 ‘경제리더십’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짙게 배어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로 미뤄 그 또한 이 전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적절한 시점이 찾아오면 정치에 뛰어들 공산이 크다. 실제로 그는 대선 출마에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향후 정국과 관련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현재 단 한 사람의 대선 주자도 정책을 갖고 국민과 올바른 대화를 하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당선이 안 된다. 진정한 ‘경제전문가’들이 정책을 터놓고 논의할 장(場)이 없다. 그런 장이 생기면 나도 참여할 생각이다.”

이는 은연 중 이 전 시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진정한 경제전문가’가 나서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경제리더십’은 그가 자주 인용하는 소위 ‘통상문화(通商文化) 국가’라는 말 속에 융해돼 있다. 그의 주장인 즉 단순한 통상이 아닌 문화가 접목된 통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리안 브랜드가 세계인들로부터 기술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높이 존경받고, 친환경적이면서 인권 침해가 없는 제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화가 뒤따라가야 한다. 세계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갖춰가면서 통상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명박의 ‘경제리더십’은 ‘시멘트리더십’”

경제를 환경 및 문화와 접목시킨 그의 독특한 ‘경제리더십’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미FTA협상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각도 동일한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그의 견해는 외견상 한미FTA협상을 극력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입장과 유사하나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잖은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농업은 특수성과 지역성이 있다. 그 나라만의 문화적 가치와 생태적, 환경적 가치가 높은 부문으로 우리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농촌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분열로 가는 길이다.”

정치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과 달리 순수 경제 차원에 입각한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현재 국민들이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식상한 정치’가 아니라 ‘발전하는 경제’라고 단언하고 있다. 국민들은 21세기의 시대적 조류를 좇아 훨씬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는데도 유독 정치지도자들만이 구태의연하게 20세기형 성장전략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통렬한 지적이다.

현재 그는 시종 ‘정책제안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이번 대선에서는 ‘혼이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혼이 있는 창조경제’는 그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빼 놓지 않고 언급하는 그의 화두이다. 그 내용을 보면 사실 자신을 ‘경제리더십’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경제전문가 자처는 모수자천(毛遂自薦)?

이는 역사적인 사례에 비춰볼 때 일종의 ‘모수자천(毛遂自薦)’의 화법에 해당한다. 이번 대선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원래 ‘모수자천’은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일화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 ‘주난왕 57년’조에 따르면 기원전 258년 정월에 진시황의 조부인 진소양왕(秦昭陽王)은 대군을 보내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치게 했다. 이에 놀란 조효성왕(趙孝成王)은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에게 명하여 급히 초나라로 가 구원을 청하게 했다.

이때 평원군은 문하의 식객 중 문무를 겸비한 20명의 인재를 선발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러나 19명의 인재를 얻었으나 나머지 한 사람은 당장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침 식객으로 있던 모수(毛遂)가 스스로를 천거하고 나섰다. 그러자 평원군이 힐난했다.

“무릇 현사(賢士)의 처세를 보면 마치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오. 지금 선생은 나의 문하에 있은 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나 주위에서 선생을 칭송하는 사람이 없소. 이는 선생이 별로 칭찬할 만한 점이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소.”

모수가 반박했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주머니 속에 넣어 주기를 청한 것입니다. 저를 일찍이 주머니에 넣었다면 벌써 탈영(脫穎: 뾰쪽한 끝이 밖으로 튀어나옴)했을 것입니다.”

이 고사에서 바로 스스로를 천거한다는 뜻을 지닌 ‘모수자천’을 비롯해 뛰어난 재주를 뜻하는 ‘탈영지재(脫穎之材)’와 ‘영탈(穎脫)’‘탈영이출(脫穎而出)’ 등의 고사성어가 나왔다. 모수는 난세지략(亂世之略)을 흉중에 담고 있는 천하의 인재를 상징한다. ‘모수자천’의 이 고사는 ‘경제리더십’이 대선정국의 화두로 등장해 있는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 비춰볼 때 기업CEO인 문 사장이 스스로 ‘진정한 경제전문가’를 자처하는 논리와 사뭇 닮아 있다.

당시 19명의 문객은 ‘모수자천’에 서로 눈짓을 하며 크게 비웃었다. 이는 문 사장의 존재를 잘 모르는 세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대선 출마에 의문을 표시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평원군은 마침내 초나라에 이르러 초고열왕(楚考烈王)을 동이 틀 때부터 시작해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가지 설득하며 군사지원을 간곡히 청했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모수가 마침내 칼을 어루만지면서 계단을 따라 전상(殿上)으로 올라갔다. 모수가 평원군에게 따졌다.

“단 두 마디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동이 틀 때부터 시작해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까지 해결치 못하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이를 본 초고열왕이 대노했다.

“어찌하여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인가? 나는 그대의 주군과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 하는 자인가?”

모수가 눈을 부릅뜬 채 칼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대왕이 저를 꾸짖는 것은 주변에 초나라의 군민(軍民)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10보 안에서는 이들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대왕의 명운은 저의 손안에 있습니다. 지금 초나라 땅은 사방 5000리이고 손에 무기를 쥔 무사가 100만명인데 이는 패왕(覇王)을 할 만한 자산입니다. 초나라의 강대함은 천하의 어떤 나라도 당할 수 없습니다.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일개 용부(勇夫)에 불과했으나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와 초나라를 격파함으로써 초나라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합종(合縱)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우리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초고열왕이 크게 놀라 사죄했다.

“실로 선생의 말과 같소. 삼가 사직을 받들어 조나라를 좇도록 하겠소.”

그러자 모수가 초고열왕의 좌우에게 이같이 지시했다.

“닭과 개, 말의 피를 가져오시오.”

모수가 이내 동반(銅盤: 청동대접)을 받들고 무릎을 꿇은 채 초고열왕 앞으로 나아가 이같이 말했다.

“대왕이 먼저 삽혈(鈒血: 희생의 피를 입에 바르는 의식)하여 맹약을 확정토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저의 주군, 그 다음으로 제가 삽혈토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전상(殿上)에서 합종의 맹약이 맺어졌다. 이어 모수는 왼손에 동반을 들고 오른손으로 식객 19명을 손짓해 부른 뒤 이같이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당하(堂下)에서 삽혈하도록 하시오. 그대들은 갖은 고생을 하며 따라왔으나 소위 ‘인인성사(因人成事: 다른 사람에 기대어 일을 성사시킴)’하는 꼴이 되었소.”

19명의 문객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당하로 내려가 삽혈했다. 이로써 반나절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던 걸사(乞師: 군사지원요청) 교섭이 불과 한 식경(食頃) 사이에 끝나고 말았다. 합종의 맹주가 된 초고열왕이 즉시 좌우에 명하여 군사 8만명을 이끌고 가 조나라를 구하도록 했다. 이튿날 평원군은 초고열왕에게 하직하고 조나라를 향했다. 평원군이 돌아오는 도중 모수에게 사과했다.

“선생의 세 치 혀가 백만 대군보다 강했소. 이번에 선생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의 지인지감(知人之鑑: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얼마나 천박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소. 나는 두 번 다시 감히 천하의 선비를 품평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는 드디어 조나라로 돌아오자마자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높이고 극진히 대접했다. 이 ‘모수자천’의 고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모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나라를 구한 당대의 책사(策士)였다. 문 사장도 여러 면에서 그와 닮았다. 그가 최근 부쩍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사람들 모두 대선 승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 어떻게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단절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나라를 불신과 무능으로부터 단절시켜 통합적이고 창조적인 미래를 개척해야만 한다.”

‘과거와의 단절’은 곧 ‘혼이 있는 창조경제’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새로운 시대상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정책적 조언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역사상 인물 중 세종대왕과 이순신, 정약용 등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다. 이들 모두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살았고, 혁신가로서 종신(終身)했고, 전 생애에 걸쳐 부단히 노력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게 그 이유이다.

사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정약용 등은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군신(君臣)에 해당한다. 이들이 보여준 소위 군(도君道)와 신도(道)는 후인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문 사장이 군도와 신도의 표상인 이들을 존경한다는 것은 곧 군도와 신도의 이치를 기업의 경영리더십에 직결시키겠다는 의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미국의 MBA과정에서 가르치는 통상적인 ‘경영리더십’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문 사장은 이들로부터 어떤 리더십을 배우고자 하는 것일까? 그가 제시하는 국가발전 비전에서 대략 그 윤곽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국민들의 지식과 창조능력을 고양시켜야만 선진국으로 갈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평생학습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세종대왕을 예로 들어 바람직한 통치리더십을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종, 이순신, 정약용에게 배운 리더십

“지도자 중에는 손발만 다루는 지도자, 머리까지 다루는 지도자, 마음까지 감동시키는 지도자가 있다. 세종대왕은 마음까지 감동시키는 지도자이다. 나도 남의 꿈을 생각할 수 있고, 남의 행복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다짐을 수시로 한다.”

세종대왕이 보여준 치도(治道)는 확실히 그의 이런 생각과 맞아떨어진다. 평생 책을 읽고 사색하며 창조적인 생각을 한 사람으로는 단연 세종대왕을 들 수 있다. 신도의 차원에서 이를 수행한 사람은 단연 정약용이다. 이순신의 경우도 비록 무인이기는 하나 그의 삶 역시 끊임없이 공부하며 창조적인 삶을 살았다. 《난중일기》와 거북선이 그 증거이다.

그가 시종 이 전 시장의 ‘경제리더십’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전 시장이 제시하는 남북대운하 등의 ‘경제리더십’을 국토개발에 의존하는 낡은 패러다임으로 간주하고 있다. 과거가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시멘트리더십’으로 상징된다면 21세기는 ‘혼’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리더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 사장이 과연 이번 대선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역사상 그와 유사한 행보를 보인 모수는 끝내 책사로 운명을 마쳤다. 모수는 천하를 거머쥐겠다는 뜻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문 사장은 자신의 이상을 모수와 같은 신도(臣道)의 차원에 그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종대왕과 같은 군도의 차원으로까지 격상시키고자 하는 것일까?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과거의 지도자들을 보면 모두 개인은 훌륭했는데 나중에 보면 성과는 높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미래는 과거의 관성과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는 것이다. 국민적 기대를 활용하려면 신뢰받는 그룹과 창조적인 전문가 그룹이 힘을 합쳐야 한다.”

그는 장차 시민단체 등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을 경우 미래지향적인 진보정당을 창당하는데 일조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현재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범여권의 상황에 비춰 과연 그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될지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대권은 기본적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축록전(逐鹿戰)’으로 진행되는 까닭에 우선 당사자의 굳은 결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에 관한 의지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가 장차 대권레이스에 참여할는 대략 시민단체를 비롯한 개혁성향의 진보진영 인사들의 지지 강도에 따라 결판날 전망이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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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⑭ 두산그룹 박용성 회장  (고전 전문가인 신동준씨가 이코노믹리뷰에 기고한 글입니다. )


이코노믹리뷰 | 기사입력 2007-08-14 22:09 | 최종수정 2007-08-14 22:30


“경영권 탈환은 성공… 리더십 평가는 지금부터”

‘형제의 난’이후 우여곡절 끝에 다시 두산의 사령탑을 맡게 된 박용성 회장. 열정적인 모습으로 대외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왕자의 난’후유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결국 그의 경영리더십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미래에 있는데….

“박 회장이 두산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울 수만 있다면 ‘형제의 난’으로 인한 불미스런 과거는 사소한 문제로 덮여질 것이다. 두산의 앞날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원래 두산그룹의 연원은 1896년 8월 1일에 창업한 ‘박승직상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때를 포함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유지되어 온 재벌로는 두산이 유일하다. 당초 포목행상을 시작한 창업주 박승직 씨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 한창 진행 중인 고종 32년(1896)에 지금의 서울 종로 4가 일대인 배오개에 직물도매상인 ‘박승직상점’을 냈다. 그는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장안의 간판급 포목상들과 합작으로 ‘공익사’를 창립해 사장이 되었다. 당시 그는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렸다. 그는 1915년부터 한국 최초의 화장품인 ‘박가분(朴家粉)’을 개발해 큰돈을 거머쥐었다. 1933년에는 일본 ‘기린맥주’가 한국 진출을 위해 세운 ‘소화(昭和)기린맥주’의 주주로 참여키도 했다.

이후 장남 박두병 씨가 1936년에 ‘박승직상점’의 전무로 취임하면서 경영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1910년에 3남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서울고의 전신인 경성중학과 서울상대의 전신인 경성고상(京城高商)을 졸업한 뒤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사했다. 해방 직후 ‘기린맥주’가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자 그는 회사의 지배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기린맥주’를 관리한 지 3년 뒤에 회사 이름을 ‘동양맥주’, 상표를 ‘OB맥주’로 바꾸면서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산, 유일하게 100년 넘게 유지

그는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에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박승직상점’의 상호를 ‘주식회사 두산상회’로 바꿨다. 이 상호는 박두병의 두(斗)에 ‘산(山)’을 덧붙이는 게 좋겠다는 부친의 뜻에 지은 것이다. 이는 ‘쌀을 한 말씩 쌓아 올려 산을 이루듯이 한 단계 한 단계씩 부를 축적해 나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의 두산은 바로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박두병 씨의 뒤를 이은 사람은 장남 박용곤 씨였다. 1932년에 6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경동고를 나와 군대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59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바로 귀국해 이듬해 4월부터 부친의 권유로 산업은행에서 근무했다. 이는 기업CEO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젊었을 때 조직생활을 거치면서 눈칫밥을 먹고 은행업무도 잘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부친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부친은 건강이 악화하자 1981년에 장남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년 뒤에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용곤 씨는 두산의 전통에 따라 창업 유공자인 정수창 씨 등에게 그룹의 운영을 맡기고 자신은 계열사 경영에 전념하다가 1981년에 정씨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가면서 두산의 사령탑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OB구단 설립을 시작으로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한국네슬레, 경월소주, 두산정보통신 등을 잇달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이때 그는 매사를 신중히 처리하며 안전제일주의로 나갔다. 원래 그는 선천적으로 과묵하고 내성적이었던 까닭에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했으나 일단 가까워지면 깊게 터놓고 사귀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이런 스타일이 회사운영에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그룹 내부의 운영을 전적으로 아홉살 아래 둘째 동생인 박용오 그룹 부회장에게 일임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것이 훗날 두산의 사령탑을 동생에게 넘겨야 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형제의 난’의 싹은 여기서 발아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비자》‘정법(定法)’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통치술은 임무에 따라 벼슬을 주고, 명목을 좇아 내용을 따지고, 생사의 실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군주가 쥐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설령 아들이나 동생일지라도 생전에 대권을 일임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한비자의 충고를 무시하다 지휘봉을 빼앗긴 셈이다. 원래 그룹 차원의 대기업을 경영하는 방식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보위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세력은 바로 주변사람이라는 한비자의 지적은 기업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한비자》‘인주(人主)’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군주가 그의 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대신이 너무 고귀하게 되고 좌우 근신의 위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지근거리에 있는 자가 보위를 넘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둘째 동생이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셈이다. 한비자가 신하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미리 제거하라고 충고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이같이 역설한 바 있다.

“군주는 기회 있는 대로 나무를 잘라야 하고 나뭇가지가 지나치게 무성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가지가 무성하면 궁궐을 가리게 된다.”

근신의 세력 확장을 방치하면 나뭇가지에 의해 궁궐이 가려지듯이 군권이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그가 신하들에게 세력 부식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가 그룹 내부의 운영권을 둘째 동생에게 일임했다가 밀려난 것은 스스로 화를 키운 데 따른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형을 밀어내고 지휘봉을 거머쥔 박용성 회장은 《한비자》가 역설한 대권의 속성을 일찌감치 통찰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박 회장과 유사한 상황에서 실력으로 보위를 차지한 대표적인 인물로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을 들 수 있다.

“나뭇가지가 무성하면 궁궐을 가린다”

수양제(隋煬帝)에게 발탁돼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이세민의 부친 이연(李淵)은 장자 이건성(李建成)과 차자 이세민과 함께 봉기해 수나라를 멸하고 당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당시 건국의 공으로 이건성은 태자, 이세민은 진왕(秦王), 넷째 아들 이원길(李元吉)은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셋째는 이에 앞서 세상을 떠났다. 태자 이건성은 침착하고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인 데 반해 이세민은 지혜로운 데다가 용맹과 과단성까지 지닌 인물이었다. 이원길은 급하고 정열적인 성격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행동파였다.

건국 초기만 해도 아직 각지의 군웅들이 서로 왕과 황제를 자처하며 할거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당나라는 7년 동안 모두 6차례의 큰 전투를 치른 뒤에야 비로소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세민이 세운 공이 가장 컸다.

부황(父皇)인 이연은 그의 공을 높이 사‘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새로운 작호를 내렸으나 태자를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를 간파한 이세민은 이내 진왕부(秦王府)에 문학관(文學館)을 설치한 뒤 뛰어난 인재들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18학사(十八學士)’였다. 18학사에는 훗날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성세에 이름을 떨친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등 뛰어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물론 태자 이건성도 결코 용부(庸夫)는 아니었다. 그의 수하에도 수많은 인재가 존재했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현사로 불린 위징(魏徵)을 비롯해 왕규(王珪)와 위정(韋挺) 등 걸출한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정세가 안정되자 조정의 대신들과 지방의 장수들도 어느덧 태자와 이세민을 지지하는 파로 갈라져 대립했으나 모든 면에서 태자가 유리했다. 무덕(武德) 9년(626)에 양측의 생사를 가르는 충돌이 빚어졌다.

이해 여름에 북쪽의 돌궐족이 수만의 기병으로 국경을 습격하자 관례에 따라서 이세민이 출정하게 되었으나 태자는 이원길을 고집했다. 이는 차제에 이세민의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속셈이었다. 이연도 형제간의 세력경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태자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때 이원길은 출정에 앞서 진왕부의 용장인 위지경덕(尉遲敬德)과 정지절(程知節), 단지현(段志玄), 진숙보(秦叔寶) 등을 부장으로 요구하면서 진왕부에 속한 정예병을 차출하였다. 위지경덕 등이 진퇴양난에 처한 이세민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이번에 기병하지 않으면 많은 장수들이 진왕부를 이탈하여 목숨을 부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세민이 마침내 부황인 이연에게 이건성과 이원길을 성토하는 밀서를 보냈다. 내막을 모르는 이연은 세 아들을 화해시킬 요량으로 궁중 연못에 배를 띄워 놓은 뒤 사람을 보내 세 아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태자가 이원길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자 이원길이 이같이 건의했다. “궁중의 시위대에게 명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형님은 병을 핑계로 입조를 거절하고 사태를 관망하십시오.” “이미 도성의 주요한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여 방비토록 하였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 부황 앞에 나아가 모든 진상을 밝히겠다.”

결국 두 사람은 수명의 측근만을 대동하고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을 통해 입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현무문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장수 상하(常何)는 원래 태자의 심복이었으나 이미 이세민에게 넘어가 있었다. 태자는 이세민을 너무 얕잡아보는 실수를 범하고 만 셈이다. 다음날 아침 태자는 현무문을 통과하다가 문 주위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즉각 이원길에게 소리쳤다. “위험하다. 속히 말을 돌려라.”

이때 부황 이연을 태운 배가 떠 있는 호수 근처의 임호전(臨湖殿) 뒤에서 이세민이 급히 말을 타고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걸음을 멈춰라.” 태자가 움찔하는 사이 이원길이 재빨리 이세민을 향해 화살을 날렸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이때 태자는 이세민이 달려오면서 날린 화살을 맞고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진 뒤였다. 이원길은 허벅지에 이세민의 수하들이 쏜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으나 곧 땅에 누운 채로 이세민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이세민이 화살을 피하려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이원길이 앞으로 달려나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순간 위지경덕이 말에서 뛰어내려 내달리며 호통을 쳤다.

현무문의 변 vs 형제의 난

“역적아, 네가 감히 진왕을 헤치려 하다니.” 이원길이 재빨리 무덕전(武德殿)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는 순간 위지경덕의 부하들이 날린 수십대의 화살이 그의 몸에 그대로 꽂히고 말았다. 이때 태자의 시위대장 풍립(馮立)이 동궁부와 제왕부의 시위대 2000명을 이끌고 현무문으로 달려오자 사태가 급박해졌다. 당시 현무문 내에 포진한 이세민의 병력은 100여 명에 불과했다. 마침 이세민의 부인인 장손씨(長孫氏)가 친히 진왕부의 병력을 이끌고 현무문으로 달려오자 동궁부의 시위대가 공격의 방향을 돌려 진왕부를 포위했다.

이때 위지경덕이 재빨리 태자와 이원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동궁부의 시위대 앞에 나타나 소리쳤다. “태자와 제왕(齊王)이 모반을 꾸며 진왕이 폐하의 명을 받아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너희들은 죄가 없으니 모두 물러나도록 하라.”

이로써 ‘현무문의 변’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태자 이건성이 자파세력의 절대적인 우위만 믿고 방심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이세민 측은 궁지에 몰리자 태자의 심복을 매수한 뒤 결정적인 시기가 오자 가차없이 칼을 뽑아 태자 일당을 베어버리는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이것이 승부를 가른 셈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당나라 때의 사가들은 하나같이 이세민을 지혜롭고 담대한 인물로 묘사해 놓았다. 이는 이세민이 즉위한 뒤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성세를 이룬 사실과 무관치 않다. 실제로 이세민은 동궁부와 제왕부의 인재들을 휘하에 끌어모은 뒤 천하를 자신의 무릎 아래 굴복시켰다. 통치는 동기가 아닌 결과에 의해 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케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 회장이 맏형인 박 전 회장을 밀어내고 두산의 사령탑이 된 것도 이세민이 태자인 맏형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보위에 오른 것에 비유할 만하다. 실제로 박 전 회장은 성격 등에서 태자 이건성과 닮은 점이 많았다. 당시 이건성은 능력 면에서 이세민에 뒤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휘하에 수많은 인재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는 지나친 낙관론과 우유부단이 불러온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경기고·서울대, 뉴욕대서 MBA

1940년에 박두병 씨의 3남으로 태어난 박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에 뉴욕대에서 MBA를 받은 인재이다. 기업CEO로는 최고의 학벌을 자랑할 만했다. 그가 ‘형제의 난’에 따른 세간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산의 사령탑을 거머쥔 배경에는 바로 그의 이런 뛰어난 학벌에 기초한 자부심이 크게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지난 1974년에 두산그룹 기획실장을 맡으면서 경영에 참여한 박 회장은 이후 동양맥주 사장 등을 역임하는 와중에 아시안게임 유도경기위원장과 서울상공회의소 비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대외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그의 명망은 날로 높아갔다. 이는 그로 하여금 그룹의 총수 자리에 오르도록 부추기는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그룹 내 경영권을 전담할 당시 맏형인 박 전 회장은 지나치게 대외업무에 치중하면서 그룹 경영에 소홀한 면을 보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동생인 박 회장에게 물실호기(勿失好機)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박 회장은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은밀히 규합해 마침내 2005년 7월에 두산그룹의 사령탑에 올랐다. 일종의 ‘궁정쿠데타’를 성사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올해 초 동계올림픽 유치 차원에서 사면된 후 두산중공업 사내이사 자격으로 두산의 사령탑을 다시 맡게 되었으나 ‘왕자의 난’ 후유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다. 최근 이랜드 사태로 비정규직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건설업계에서는 처음으로 두산건설이 계약직 노동자를 해고한 것도 그에게는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 회장의 경영리더십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결국 그룹의 향후 모습에 따라 판결날 수밖에 없다. 그가 만일 두산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울 수만 있다면 ‘형제의 난’으로 인한 불미스런 과거는 ‘현무문의 난’이 ‘정관지치’로 잠재워진 것처럼 사소한 문제로 덮여질 것이다. 그가 사령탑으로 복귀한 두산의 앞날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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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믹리뷰 | 기사입력 2007-02-07 13:18


“돈버는 능력 입증해야 참 후계자”

‘내가 사랑한 스파이.’ 지난 수십년간 세계 극장가를 풍미해오던 007시리즈 영화 중의 하나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잘생긴 용모의 스파이들은 하나같이 총신이 긴 독특한 스타일의 권총을 애용한다.

바로 이탈리아산인 ‘베레따’이다. 같은 이름의 이 회사는 총기 애호가들 사이에 가장 유명한 기업 중 하나다.

베레따는 가족기업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준다. 지난 17세기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부터 이탈리아 반도에서 총포 제작을 담당해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을 축성한 일본의 콘고구미와 더불어 수대 째 대를 물려가면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성공적인 가족기업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이러한 가족기업이 있을까. 여전히 수공업에 의존하고, 장인정신을 중시하는 전통적 의미의 가족 기업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삼성이나 현대, 두산, LG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대기업들도 처음에는 모두 이러한 가족기업에서 출발했다.

첨단의 시대에도 여전히 둘 사이에 공통점이 많은 배경이다. 오너가 능력에 관계없이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거나, 기업의 별인 임원급에 나이 어린 자녀를 발탁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는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분석한다.

무엇보다 2,3세들은 아버지 세대와 여러모로 다르다. 이들은(young prince) 대부분 합리적이며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해 영어도 유창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는 올해 초 미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스에서 유창한 영어로 미디어계의 황제 머독을 안내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의사결정 스타일도 다르다. 아버지 세대가 ‘기업가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투기적(speculative) 의사 결정을 내려왔다면, 미국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한 자녀 세대는 직관을 배제하는 편이라고 <뉴스위크>는 지적했다. 이들 자녀 세대는 분명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한 그룹의 운명을 좌우하는 총수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계시를 받거나, 아니면 개인적인 충동(whim)에 따라 즉홍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을 예방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부문에 대한 공격적 투자로 오늘날의 삼성을 만든 일등공신이지만, 지도자의 직관에 의지하는 결정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의문이다.

<뉴스위크>는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그 방향도 또 종잡을 수 없는 요즘에는 이러한 의사결정이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삼성전자가 4년 전 소니와 합작투자법인을 세운 것도 이러한 변화를 감안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파트너십은 오늘날 글로벌 시장을 이끌어가는 준칙이다.

하지만 후계자들은 경영권 세습을 질타하는 시민단체, 그리고 일반 대중의 반기업 정서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재용 전무로 논의를 좁혀보자.

그의 아버지보다 방송 화면에 잘 어울리는(telegenic) 핸섬한 용모를 지닌 그는, 스스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뉴스 위크>는 주장했다.

박영환 기자(blade@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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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하다 ⑨ 한명숙 전 총리

[이코노믹리뷰 2007-05-24 10:57]


盧心 머문 ‘어머니 리더십’…
예선에 본선에 갈 길은 멀어

참여정부의 ‘걸작(傑作)’이기도 한 첫 여성 총리에 만족하지 않고 내친김에 ‘지존’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는 한명숙. 그가 대권 경쟁에 나설 수 있는 것은 노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권을 향한 그의 리더십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일까.

그는 이번 대선을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 간의 대결로 몰아가겠다는 속셈을 지닌 듯 하다.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나올 경우에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전선구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겨룰 경우는 어찌되는 것일까.

참여정부가 세운 여러 기록 가운데 눈에 띄는 사항 중 하나는 건국 이래 첫 여성 총리를 배출한 점이다. 한명숙 전 총리가 그 당사자이다. 여성 총리는 해방 이래 여성계의 오랜 숙원사업이기도 했다. 그 숙원이 바로 참여정부에서 이뤄진 것이다.

당초 첫 여성 총리는 DJ의 국민의 정부 때 가시권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장상 전 민주당 대표는 DJ의 낙점을 받고 총리실로 출근해 서리의 역할을 수행키도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국회 인준의 관문을 넘지 못해 첫 여성 총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첫 여성 총리라는 진기록을 보유케 된 한 전 총리는 분명 ‘럭키’한 사람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이 그만큼 두텁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FTA 협상 타결 이후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등해 30% 안팎을 오가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그는 범여권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급부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청와대 주변에서는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가 경선에서 승리할 경우 한 전 총리를 대항마로 내세울 수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다. 범여권의 수많은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 합계가 10% 안팎에 머물고 있는 현 상황이야말로 노 대통령의 돈독한 신임을 받고 있는 한 전 총리에게 물실호기(勿失好機)의 ‘찬스’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가 경선 승리하면 대항마로 나온다?
여성 총리의 출현에 만족하지 않고 내친김에 ‘지존’의 자리인 대통령까지 만들어내고자 하는 여성계의 열망도 그에게는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여성계의 이런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한 전 총리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당지지율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경선에서 박 전 대표가 승리할 경우 범여권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전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이 탄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 전 총리는 천시(天時)를 만난 셈이다.

물론 회의적인 시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전래의 투표 행태를 보면 통상 여성들은 같은 여성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 그 이유이다. 실제로 지난 5월 초에 치러진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서 프랑스의 여성들은 여성후보인 좌파의 세골렌 루아얄 후보보다 우파의 사르코지 당선자에게 표를 더 몰아주었다.

그러나 남아 선호의 흐름이 퇴색한 현재의 상황에 비춰볼 때 여성이 여성후보를 찍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박 전 대표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이명박 전 시장에 이어 부동의 수위권을 형성하고 있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우리나라도 후보가 뛰어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여성 대통령이 출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 전 총리의 대선에 대한 강고한 의지와 결단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불출마를 선언하는 그날 열린우리당의 후보가 되어 대권에 도전할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나는 탈당하지 않는다. 5월 중으로 대선 도전의 깃발을 들 것이다. 나는 참여정부와 정책적 지향점이 같다.”

대선 출마의 강고한 결기가 선연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그가 주적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한나라당의 박 전 대표이다. 이는 같은 여성으로서 강한 라이벌 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이 박 전 대표와 비교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살아온 인생을 보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 나는 퇴행의 역사가 아니라 남북통합을 통한 선진적 대통합의 비전으로 국민에게 선택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통합은 국가경쟁력 및 선진화와 직결된다. 한반도와 남북평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 차기 리더가 돼야 한다. 여성도 여성 나름이다.”

“여성도 여성 나름”… 리더십 차별화
그는 단순화법을 동원해 박 전 대표의 리더십을 자신의 리더십과 극명하게 대비시킨 셈이다. ‘퇴행'과 ‘선진’, ‘분열’과 ‘통합’, ‘남북대립’과 ‘평화통일’ 등이 그것이다. 그가 내심 박 전 대표에 대해 얼마나 강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이처럼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박 전 대표의 리더십을 구시대의 개발독재 및 냉전의 낡은 패러다임으로 몰아붙이면서 자신의 리더십을 새로운 시대의 ‘통합’ 및 '평화'의 리더십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리더십을 ‘어머니 리더십’으로 정리하고 있다.

“저는 인생 역정에서 받아온 고난을 승화시킨 까닭에 맺힌 한이 없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어머니의 정신 밑에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강인함이 깔려 있다. 어머니는 투지와 강인함, 결단력을 어느 누구보다 잘 갖추고 있다.”

《햄릿》에 나오는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다(Frailty, thy name is woman)’ 구절을 번안(飜案)한 '강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어머니이다'라는 경구(警句)가 상기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 국민작가 고리키의 중편소설 《어머니》에 나오는 ‘어머니’는 사실 영원한 귀의처인 동시에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집안을 굳건히 지켜내는 강인함의 상징이다.

고리키 소설 《어머니》에 영향 받았나
한 전 총리가 고리키의 《어머니》에서 감명을 받아 ‘어머니 리더십’을 언급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점에 비춰 《어머니》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980년대 당시 운동권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필독서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던 촌부(村婦)가 차르(Tsar) 정부의 폭정에 항거하는 아들의 뒤를 이어 혁명투사가 되는 내용이 골자이다. 이는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 《부드러운 여인》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새로운 남편을 만날 때마다 무수한 변신을 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동양에는 이와 유사한 사례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열녀전》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례로 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한 위(魏)나라 장수 악양(樂羊)의 아내를 들 수 있다. 하루는 악양이 길을 가다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황금을 주워 가지고 돌아가자 악양의 아내가 황금에 침을 뱉으며 이같이 책망했다.

“지사(志士)는 남몰래 샘물도 마시지 않고, 염치 있는 사람은 아니꼬운 음식이면 받지를 않는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것인지 그 내력도 알 수 없는 이런 황금을 주워 가지고 와 그대의 고결한 인품을 더럽히려는 것입니까.”

악양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이내 황금을 들고 밖으로 나가 들에다 내버렸다. 이후 그는 아내를 떠나 멀리 노나라로 가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버티지 못하고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아내는 베틀에서 비단을 짜던 중이었다.

아내가 물었다.

“그대는 배움을 성취했습니까.”

“아직 성취하지 못했소.”

그러자 그의 아내가 즉석에서 칼을 뽑아 베틀의 실을 모두 끊어 버렸다. 악양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아내가 이같이 대답했다.

“대장부는 학문을 성취한 연후에야 가히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비단을 다 짠 연후에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중도에서 학문을 폐하고 돌아왔으니 첩이 칼로 끊어 버린 이 베틀의 비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악양은 이 말에 크게 감복한 나머지 다시 집을 떠나 이후 7 년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학문 연마에 매진했다. 이후 그가 전국시대 말기를 풍미한 웅걸(雄傑)로 성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 전 총리 역시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던 남편의 옥바라지로 크게 고생했다. 그 또한 남편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악양의 처와 고리키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 전 총리가 민주화운동 및 여성운동을 하면서 쌓은 적공(積功)이 간단치 않다. 남녀고용평등법 제정과 가족법 개정, 호주제 폐지 등은 모두 그의 족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개혁사례이기도 하다. 이는 그 자신이 주요 정치 이슈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만이 지니고 있는 리더십의 또 다른 측면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개헌 문제 놓고 절묘한 타협안 제시
실제로 그는 노 대통령과 정치권이 개헌문제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일 당시 중재자를 자임해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다. 물론 그는 총리 재임 시절에 한나라당 및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개헌추진기구’를 설치하는 등 노 대통령에 대한 적극적인 측면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정치권에 복귀하자마자 이내 중재안을 제시하며 노 대통령의 양보를 촉구하는 노련미를 선보였다.

대통령과 각 정당 대표들이 만나 개헌추진을 공동선언하고, 노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여 개헌안 발의를 다음 정권으로 넘겨야 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다. 절묘한 타협안이 아닐 수 없다. 야당으로서도 이를 싫어할 리 없다. 한 전 총리가 강조하는 ‘어머니 리더십’이 약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의 위대함은 바로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데 있다. 동양은 일찍부터 그 의미를 통찰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지치(無爲之治)’의 리더십이 바로 ‘어머니 리더십’과 유사하다. 《도덕경》 제28장은 낮은 곳에 임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물과 골짜기의 비유로 이를 극찬한 바 있다.

“그 웅성(雄性: 수컷)을 알고 그 자성(雌性: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상덕(常德)이 떠나지 않아 순수한 영아로 복귀한다. 그 밝음을 알고 그 어둠을 지키면 천하의 준칙이 된다. 천하의 준칙이 되면 ‘상덕’이 어긋나지 않게 되어 무궁한 세계로 돌아간다. 성인은 통나무가 잘려 그릇이 되는 이치를 활용해 왕후(王侯)를 세웠다. 그래서 대도(大道)에 따른 치천하(治天下)는 해침이 없는 것이다.”

이 대목의 핵심어는 ‘지웅수자(知雄守雌: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킴)'이다. 이를 두고 《도덕경》에 대한 가장 뛰어난 주석을 남긴 삼국시대의 왕필(王弼)은 ‘지위선필후(知爲先必後)’로 풀이했다. 앞서려고 하면 반드시 뒤처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천하를 통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존귀한 자리에 오를지라도 응당 몸을 낮출 줄 아는 겸하(謙下)의 미덕을 뜻한다. ‘수자(守雌)’가 바로 그런 뜻을 담고 있다. ‘어머니 리더십’의 요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전 총리가 개헌안에 대한 타협안을 제시해 국론분열의 소지가 컸던 개헌정국을 미리 방지한 것은 바로 ‘지웅수자’의 개가가 아닐 수 없다. 당시 한나라당은 한 전 총리의 제안에 크게 당혹해 한 나머지 즉각 견제구를 날린 바 있다.

“한 전 총리는 노대통령의 임기 4년 동안에 빚어진 민생파탄의 책임을 나눌 위치에 있다. 개헌 중재안을 뜬금없이 제시한 것은 자신의 대선 가도에 적극 활용하려는 정략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부상하는 것을 적극 견제코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한나라당으로서는 개헌정국 타결의 공을 한 전 총리가 독차지하는 것을 묵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안은 한 전 총리의 주장대로 마무리되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의 견제 역시 한 전 총리의 역량을 돋보이게 만드는데 일조했을 뿐이다. 그의 정치력이 간단치 않음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대권을 꿈꾸는 한 전 총리의 전도(前途)가 마냥 탄탄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 정국의 흐름 상 대권을 꿈꾸는 그의 앞에는 4가지 난문(難問)이 가로막고 있다.

첫째, 열린우리당 내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과연 물리칠 수 있을지 여부이다. 현재 그는 열린우리당 내에서 이해찬 전 총리와 김혁규 의원 등을 제압할 만한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하다. 먼저 조직의 열세를 만회하는 것이 시급하다.

둘째, 열린우리당이 과연 대선 때까지 거대 공당으로 남아 있을지 여부이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의원들의 제2차 탈당 러시가 임박하면서 사실상 토붕와해의 위기상황에 몰려 있다. 노대통령을 지지하는 소위 ‘사수파’들이 버티고 있으나 사실상 공당으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어렵사리 열린우리당의 후보가 될지라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셋째, 후보로 선출되었을지라도 과연 한나라당의 이 전 시장 또는 박 전 대표와 싸워 제대로 된 승부를 겨룰 수 있을지 여부이다. 열린우리당은 태생적으로 참여정부 실패의 책임추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자본잠식의 단계를 넘어 많은 부채를 떠안고 있는 공당의 후보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넷째, 한 전 총리가 이런 한계를 모두 뛰어넘을지라도 과연 개인 차원의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어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여부이다. 사실 이것이 '키워드'에 해당한다. 과연 한 전 총리는 이번 대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같이 언급한 바 있다.

“여성들이 이제는 주인으로서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결의를 할 때이다. 퇴행의 역사를 걸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민주주의와 새 역사를 창조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분기점에 서 있다.”

“여성들이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그는 거명만 하지 않았을 뿐 한나라당의 박 전 대표를 겨냥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이번 대선을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 간의 대결로 몰아가겠다는 속셈의 일단을 드러낸 셈이다. 박 전대표가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나올 경우에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전선구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아닌 이 전 시장과 겨룰 경우는 어찌되는 것일까. 나아가 손학규 전 지사 등이 ‘중도 리더십’을 기치로 독자적인 신당을 만들어 범여권의 대표주자가 될 경우 과연 어떻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일까. 이번 대선을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간의 싸움으로 몰아가는 것 자체가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범여권 내 잠룡(潛龍)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가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열린우리당의 대권후보가 되어 본선을 넘볼 수도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노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참여정부의 ‘걸작(傑作)’이기도 한 첫 여성 총리가 지닌 최대 강점인 동시에 최대 약점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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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⑧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코노믹리뷰 2007-05-09 13:21]

“決을 缺한 관용의 리더
君道냐 臣道냐 선택 갈림길에”

손학규 전 지사와 함께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그는 선량(善良)과 관용(寬容)이라는 뛰어난 리더십을 갖고 있지만 난세에는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데…

덩샤오핑(鄧小平)은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결단력을 갖고 ‘카이팡(開方)’을 강력히 밀어붙임으로써 마오쩌둥을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이 됐다. 우유부단한 김 전 의장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때 정동영 전 의장과 더불어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손꼽힌 인물이다. 그러나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후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 느낌을 주고 있다. 실제로 그의 행보를 보면 강력한 경쟁자인 손 전 지사에게 ‘중도개혁’의 대표주자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초조감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다.

원래 두 사람은 경기고와 서울대 동기로 오랫동안 절친한 친구로 지내왔다. 학창 시절에는 오히려 손 전 지사가 훨씬 강경한 노선을 걸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입장은 경원(敬遠)이다. 상호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비록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기는 했으나 서로 뿌리가 다르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김 전 의장이 밝힌 다음과 같은 소회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손 전 지사와 나는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선택을 달리 했다. 지난 1980년의 군부 쿠데타 때 나는 국민 속으로, 그는 공부하러 영국으로 갔다. 이후 그는 민자당에, 나는 정통야당인 민주당에 참여했다.”

민주화운동 도중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손 전 지사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삶으로 일관한 자신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취지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오랫동안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거론된 자신의 입지를 보다 강화하겠다는 속셈이 선명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자칫 민주화 투사의 경력을 구실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옹졸한 협량(狹量)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크다.

인권운동가 출신인 김 전 의장은 정치인으로의 변신에 크게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까지 1% 안팎의 지지율밖에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그 증거이다. 이는 정치 초년생에 해당하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에게 이보다 더 치명적인 지적은 상황 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다. 실제로 적잖은 사람들은 현재 노정되고 있는 범여권의 지지부진한 신당통합 논의를 두고 그에게 책임의 일단을 묻고 있다. 정계개편을 주도할 만한 혜안과 결단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나름대로 매우 뛰어난 리더십을 갖추고 있다. 선량(善良)과 관용(寬容)의 덕목이 그 것이다. 치세는 성군의 칭송을 받을 만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상황이 그의 이러한 덕목을 용납지 않고 있는 데 있다.

때 못 만난 선량과 관용의 리더십
난세에는 ‘선량’과 ‘관용’이 오히려 약이 아닌 독이 될 수도 있다. 《춘추좌전》(노소공 20년 B.C. 52))조에 이를 뒷받침할 만한 대목이 나온다. 당시 가장 탁월한 정치가로 소문난 정(鄭)나라 재상 자산(子産)은 임종 전에 후임자인 유길(游吉)에게 이같이 당부한 바 있다.

“내가 죽게 되면 그대가 틀림없이 집정(執政)이 될 것이오. 진정한 유덕자(有德者)만이 관정(寬政)으로 백성을 복종시킬 수 있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맹정(猛政)으로 다스리느니만 못하오. 무릇 불은 맹렬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를 두려워하므로 불에 타 죽는 사람이 많지 않소. 그러나 물은 유약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겨 쉽게 가지고 놀다가 이로 인해 매우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되오. 그래서 관정을 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오.”

자산이 몇 달 동안 앓다가 죽자 이내 유길이 집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맹정을 펴지 못하고 관정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정나라에는 도둑이 기승해 마침내 환부지택(  之澤: 갈대가 무성한 못)에 무리 지어 살게 되었다. 유길이 크게 후회했다.

“내가 일찍이 자산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보병을 출동시켜 환부지택에 숨어 지내는 도둑들을 토벌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러자 도둑이 점차 뜸해졌다. 이를 두고 훗날 공자는 이같이 평했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정치가 관대해지면 백성이 태만해진다. 태만해지면 엄히 다스려 바르게 고쳐놓아야 한다. 정치가 엄하면 백성이 상해를 입게 된다. 상해를 입게 되면 관대함으로 이를 어루만져야 한다. 관이제맹(寬以濟猛: 관대함으로 백성들이 상처 입는 것을 막음)과 맹이제관(猛以濟寬: 엄정함으로 백성들의 태만함을 고침)으로 정치는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백성들이 이미 크게 지쳐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는 것이 거의 가하다네. 중원에 은혜를 베풀어 4방을 안무해야 하리”라고 했다. 이는 관정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또 “궤수(詭隨: 간사한 거짓말로 속이는 사람)를 좇지 말고 조심하여 사악한 자 경계하세. 응당 구학(寇虐: 약탈하며 잔혹한 자)을 막아야 하니 그들은 일찍이 법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라네”라고 했다. 이는 맹정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어‘“먼 곳을 안무하고 이웃과 가까이 하여 우리 국왕을 편안케 하리”라고 했다. 이는 화목으로 나라를 편히 할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다투거나 조급하지 않고, 강하지도 유하지도 않네. 정사가 뛰어나니 백록(百祿)이 모여드네”라고 했다. 이는 관정과 맹정이 잘 조화된 지극한 정치를 말한 것이다.

자산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공자는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같이 말하기도 했다.

“그는 고인(古人)의 자혜(慈惠)를 이은 사람이었다.”

자산은 공자사상의 형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공자는 생전에 그를 만나지는 못했으나 깊이 사숙(私淑)했다. 자산이 공자에게 끼친 사상적 영향은 《논어》가 4개장에 걸쳐 공자가 자산을 극찬한 대목을 수록해 놓은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우유부단은 위정자의 치명적 약점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위정자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우유부단(優柔不斷)에 있다. 김 전 의장이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극히 치명적이다. 실제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관용이 열린우리당 내에서 친노세력의 발호와 사이비 개혁세력의 득세를 불러왔고, 이는 참여정권의 오만을 부추겨 마침내 지금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고금동서의 역사를 개관할 때 지도자에게 ‘우유부단’만큼 나쁜 것은 없다. 안타깝게도 김 전 의장은 바로 이런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대권에 대한 욕심을 거두고 뛰어난 최고통치권자를 만나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는 신도(臣道)의 길을 걸을 요량이면 이는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범여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의 일원으로 거론되어 왔다. 대권을 거머쥐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는 보다 과감한 군도(君道)의 길을 걸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2월 당대표로 있던 시절에 전당대회를 치른 뒤 이를 무사히 치른 사실 자체에 감격해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못했다. 천하대사를 읽는 그의 식견에 의문이 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많은 의원들의 탈당 러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의 해체까지 점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와해 직전에 있는 열린우리당의 대표가 되어 전당대회를 무사히 치른 사실에 자못 감격해 한 나머지 기자들 앞에서 이같이 소회를 밝혔다.

“성원이 안 돼 당이 난관에 부딪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지난 며칠 밤 오금이 저렸다. 전당대회장인 체육관이 텅 비는 꿈을 꿔 자다가 깨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대로 해석할 경우 그가 얼마나 소심한 인물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지난해 6월 당의장에 취임할 때 ‘독배’를 마시겠다는 각오로 임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대표를 마친 뒤 기자들 앞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런 소어(笑語)로 대신한 바 있다.

“독배를 실제로 마셔보니 참으로 썼다.”

그가 비록 우스갯소리로 이같이 말하기는 했으나 당시 그의 각오는 처절한 바가 있었다. 의장직 사퇴서를 양복 안주머니에 늘 넣고 다닌 것이 그 실례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한 성실한 인물이다. 비록 지도력 부재라는 지적을 받기는 했으나 당의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향후 그의 행보는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그는 대선에 임하는 자신의 기본입장을 이같이 피력한 바 있다.

“민주주의 가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현재 나의 지지율은 매우 낮지만 모든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것을 기약해 줄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으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식의 무모한 대선 행보는 결코 취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고고한 선비정신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축록전(逐鹿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자칫 삼국시대 당시의 원소(袁紹)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를 일이다.

본래 원소는 명문 출신인 데다가 용자(容姿)가 수려하고 나름대로 관인(寬仁)한 풍모까지 갖춰 그야말로 천하인의 신망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대의 모든 인사들이 원소에게 끈을 대기 위해 안달을 했다. 그야말로 모든 점에 한 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조조에게 무참히 패해 분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삼국지》‘위서?원소전’에 그 해답이 나온다.

“원소는 위용(威容)과 기관(器觀: 그릇과 식견)이 있어 당세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관대해 보였으나 내심 능력 있는 사람을 미워했고, 일을 꾸미기만 좋아할 뿐 결단력이 없었다.”

이 기록은 일면 높이면서도 일면 폄하하는 소위 ‘일포일폄(一褒一貶)’의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삼국지》의 이런 평가는 포(褒)보다는 폄(貶)에 무게를 두었다고 보아야 한다. 원소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호모무결(好謀無決)’에 있었다. 일을 꾸미기만 좋아할 뿐 결단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난세를 구제코자 하는 사람으로 가장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호모무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의장의 트레이드 마크인 ‘선량’과 ‘관용’이 난세에서는 오히려 족쇄로 작용할 소지가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도자의 결단력 부족은 마치 전쟁터에 군사들을 이끌고 가 마침내 적군이 코앞에까지 닥치는 데에도 가장 좋은 상황이 도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전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휘하 장졸들의 궤멸을 의미한다. 난세의 상황에서 통치자가 결단력을 결여하면 수많은 인민들이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설령 잘못된 결단을 내릴지언정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제2공화국 당시 장면(張勉) 총리는 도처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나 자칫 나라가 전복될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데도 이를 만연히 대처하다가 끝내 패퇴하고 말았다. 그는 훗날 권좌에서 물러난 뒤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라는 자서전을 통해 이같이 변명한 바 있다.

“국민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는 것은 민주당의 기본정책이었다. 국민이 혼돈을 미워하고 자유의 부산물을 미워하게 될 때 건전한 자유는 가능한 것이다.”

그의 말은 원론적으로 보면 나무랄 수 없다. 전 국민이 혼돈을 미워하여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게 될 때 사실 ‘건전한 자유’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나라가 결단나게 되는 것은 어찌할 것인가. 모든 통치행위는 당시의 상황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국민 전체의 삶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소위 ‘족식(足食)’의 문제가 일차적으로 해결되어야만 한다. ‘족식’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예절도 알고 문화도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 및 자유와 같은 이념도 그 이후에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족식’의 당장 급한 상황에서 민주와 자유 자체가 국민들의 삶을 보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래 원소는 소위 ‘풍도(風度)’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지녔다. ‘풍도’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통치자에게는 ‘신언서판’보다도 더욱 중요한 덕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결(決)’이다. ‘결’은 난세의 상황에서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풍도’가 뛰어난 인물을 들라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들 수 있다. 그는 뛰어난 외교가이자 재상이었다. 저우언라이를 삼국시대의 인물에 비유하면 제갈량에 가장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의 뛰어난 ‘풍도’는 강력한 결단력을 지닌 마오쩌둥(毛澤東)이 있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풍도’ 면에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결단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결합이 오늘의 중국을 만든 결정적인 배경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이 죽은 후 현대 중국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을 들라면 덩샤오핑(鄧小平)을 들 수 있다. 덩샤오핑의 경우는 사실 ‘풍도’ 면에서 보면 볼품이 없었다. 그는 ‘풍도’면에서 볼 때 결코 정상에 오를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존의 자리에 올라 소위 ‘카이팡(開方)’을 강력히 밀어붙임으로써 현대 중국사에서 마오쩌둥을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이는 바로 그의 결단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경우 ‘풍도’는 저우언라이에 미치지 못하지만 결단력만큼은 뛰어났던 것이다. 이는 삼국시대 당시 사마의(司馬懿)의 모습을 닮은 것이기도 하다. ‘풍도’ 면에서 볼품이 없었던 사마의는 칭병(稱病)하여 몸을 낮추고 있다가 당대의 권신인 조상(曹爽)의 전횡이 극에 이르렀을 때 일거에 반격을 가해 조씨 일당을 궤멸시킨 뒤 권력을 틀어쥐었다.

덩샤오핑 역시 소위 ‘샤팡(下方)’으로 인해 한때 시골의 공장에서 공원으로 근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때를 기다리며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장칭(江靑)을 위시한 사인방(四人幇)의 전횡이 극에 이르렀을 때 일거에 사인방을 때려눕히고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리더는 신언서판과 결(決)을 겸비해야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무리 뛰어난 ‘풍도’를 갖춘 인물일지라도 ‘결’을 갖추지 못할 경우 난세에서는 결국 패배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신언서판’과 ‘결’을 동시에 구비한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김 전 의장의 행태를 보면 여러 면에서 원소와 사뭇 닮아 있다. 그는 지나치게 ‘올바른 정치’라는 명분에 얽매여 있다. 그가 현재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는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범여권의 대통합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4·25재보선에서 드러났듯이 열린우리당의 해체가 대세로 굳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것은 김 전 의장이 하기에 달려 있다. 나름대로 결단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난세에 ‘선량’과 ‘관인’을 시종 자신의 미덕으로 삼고자 하면 군도(君道) 대신 신도(臣道)를 취하는 게 타당하다. 신도의 길을 걸으면서 대선 레이스에 참여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가 끝내 본선에 나서게 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최소한 이번 대선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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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⑦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코노믹리뷰 2007-04-26 10:42]


“2% 부족한 한나라 대항마 …
금의 벗고 포의로 갈아입어야”

그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10년 동안 금의(錦衣)를 입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리더로 변신하기 위해선 금의를 벗고 포의(布衣)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범여권’의 대선 주자로 변신할 수 있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는 대선 주자를 거론할 때 ‘범(汎)여권’과 ‘구(舊)여권’을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범여권’은 대선 돌풍의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나 ‘구여권’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나라당의 소위 ‘빅2’에 맞설 수 있는 대항마가 될 수 있는지 여부가 ‘범여권’과 ‘구여권’의 판별기준이 되고 있는 셈이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김근태 전 의장 및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등과 함께 오랫동안 ‘구여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손꼽혀 왔다. 그러나 정 전 의장은 최근 한미FTA협상 타결 과정에서 단식농성의 극한투쟁을 선택한 두 사람과 달리 신중한 행보를 취함으로써 ‘구여권’이 아닌 ‘범여권’으로의 진입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만일 그가 두 사람과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면 ‘범여권’의 대다수 대선 주자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구여권’의 인물로 각인되었을 공산이 컸다. 그의 발 빠른 행보는 그가 기자출신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15대 총선서 최다 득표율로 당선 정계입문
그가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게 된 것은 DJ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였다. 한승헌 변호사 등과 함께 DJ납치사건 진상규명에 나선 것이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지난 1996년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한 제15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율로 당선된 뒤 3번에 걸쳐 내리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민주당을 뛰쳐나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에는 이를 앞장서 주도키도 했다. 그는 그 공으로 원내대표에 선출된 뒤 두 번에 걸쳐 당의장을 지내는 행운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가 바로 그가 가장 득의(得意)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그가 서 있는 위치는 적잖이 불안한 게 사실이다. 몸을 담고 있는 열린우리당이 사실상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고, 그 또한 낮은 국민지지율로 인해 화제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 그가 지난 2월 ‘서민 속으로’의 기치를 내걸고 여의도를 떠나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근로자 등 이른바 ‘신(新) 소외계층’을 찾아다니는 소위 ‘민생투어’를 시작한 것도 이런 위기의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FTA협상 조건부 찬성하며 범여권 진입
그는 이 와중에 찬반여론이 첨예하고 엇갈리고 있는 한미FTA협상을 최대한 활용해 김 전 의장 및 천 전 장관과 차별되는 행보를 취함으로써 ‘범여권’으로의 진입에 일정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내가 FTA협상에 조건부 찬성을 한 것은 개방과 복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방은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 전 의장은 이제 민생투어를 마무리짓고 여의도정치로 복귀했다. 복귀시점이 절묘하게도 통합신당 및 외부인사 영입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해 있는 시점과 맞아떨어지고 있다. 민완(敏腕)기자의 전력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통상 ‘민완’은 ‘재빠른 팔’에서 나온 말로 재치 있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솜씨를 지칭한다. 이는 민첩하면서도 지혜롭다는 뜻의 ‘민혜(敏慧)’와 통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민첩할 경우 자칫 ‘민힐’로 비춰질 소지가 크다. ‘민힐’은 매사에 민첩하기는 하되 너무 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미FTA협상 타결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행보를 두고 일각에서는 ‘민혜’가 아닌 ‘민힐’로 폄하하고 있다.

사실 정 전 의장은 중요 현안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기민한 행보를 보여 두 가지 엇갈린 평가를 낳은 바 있다. 지난 2월 천 전 장관이 과감히 탈당을 결행할 때 그는 끝내 잔류를 선택했다. 당시 그의 잔류를 두고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으나 셈을 너무 복잡하게 한 데 따른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했다. 이는 당시 그가 소위 ‘탈(脫)노무현’을 기치로 탈당 불사를 외치며 노 대통령의 탈당을 압박한 뒤 이내 당 잔류로 방향을 선회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반대 측에서는 이미 집이 반이나 타버렸는데도 집의 규모가 큰 것을 아까워한 나머지 전 주인을 내쫓은 뒤 집을 고쳐 주인행세를 할 생각으로 잔꾀를 부렸다는 혹평을 내놓았다.

당시 그가 보여준 행보는 확실히 이런 혹평을 낳을 만한 소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향후 보다 사려 깊은 행보를 촉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한미FTA협상 타결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는 나름대로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의 행보에 늘 ‘민혜’와 ‘민힐’이라는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가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여권’이 아닌 ‘범여권’의 대선 주자로 부상키 위해서는 현재보다 훨씬 신중한 ‘민혜’의 처신을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탈당파는 열린우리당을 배제한 가운데 우선 신당창당을 통한 ‘소통합’을 이룬 뒤 외부로부터 유력한 대선 주자를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대통합’을 내세우며 후보 중심의 새 판 짜기를 시도하고 있다.

‘소통합’ 측에서는 정 전 의장에게 선행조건으로 탈당을 요구하고 있고, ‘대통합’ 측에서는 유력한 후보로의 등장 가능성을 암시하며 탈당을 만류하고 있다. ‘소통합’측에 가담하자니 탈당의 시기와 명분이 마땅치 않고, ‘대통합’ 측에 남자니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구여권’의 인물로 낙인 찍힐 공산이 크다. 그가 범여권의 모든 대선 주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소위 ‘원탁회의’를 제의하고 나선 것은 진퇴양난의 이런 상황을 돌파코자 하는 고육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 활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현재 범여권은 ‘소통합’과 ‘대통합’ 측을 막론하고 전가의 보도인 충청-호남의 연합전선 구축을 통한 ‘영남포위’ 전략으로 막판 역전을 노리고 있다. 정 전 의장은 호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민혜’의 처신을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포스트DJ’의 기대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지리(地利)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천시(天時)이다. 그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하에서 10년 동안 승승장구하면서 금의(錦衣)를 입었다. 많은 국민들이 노 대통령의 통치리더십에 극단적인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 또한 사죄의 차원에서 금의를 벗고 포의(布衣)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다. 그가 여의도를 떠나 소위 ‘민생투어’를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다.

처신 잘하면 ‘포스트DJ’기대주 발돋움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고 참회하는 자세로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다 진지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에 성공할 경우 그 또한 능히 손 전 지사 및 정운창 전 서울대 총장과 더불어 범여권 내 ‘빅3’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여권 내 ‘빅3’의 등장은 제갈량이 유비(劉備)에게 제시한 삼분지계(三分之計)의 21세기형 버전에 해당한다. 정 전 의장은 어렸을 때부터 《삼국지》를 탐독했다. 그는 《삼국지》의 세 인물 중 유비를 가장 존경한다. 그는 그 이유를 이같이 밝히고 있다.

“난세의 조조는 확실히 뛰어난 바가 있으나 나는 현덕(玄德)을 좋아한다. 비록 독하고 모질지 못해 제갈량(諸葛亮)의 삼분지계를 수용하는 선에 머물고 말았으나 그는 ‘포용과 통합’의 상징이었다. 그의 이런 행보는 현대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다.”

장차 유비와 마찬가지로 ‘포용과 통합’을 기치로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취지를 드러낸 셈이다. 그의 이런 언급은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대립과 분열’의 난세로 진단한 데 따른 것이다. 그는 ‘포용과 통합’의 의미를 이같이 풀이하고 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은 나름대로 큰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독재’와 ‘투쟁을 위한 투쟁’이라는 우를 범했다. 이제는 30년 간에 걸친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와 10년 간에 걸친 참여과잉으로 인한 내부모순을 정비하고 남북분단으로 인한 민족모순을 치유할 시기이다. 먼저 내부통합이 이뤄져야 한다. 지도자의 뛰어난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포용과 통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북통합에 있고, 그에 앞서 남한 내의 내부통합이 필요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고통치권자의 탁월한 통치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그가 내세우는 ‘포용과 통합’은 본질적으로 손 전 지사 및 정 전 총장이 내세우는 ‘중도개혁’내지 ‘탈이념적 중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정 전 의장 자신은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중도’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중도진보’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통일부 장관 시절에 보여준 그의 친북(親北) 행보에 주목해 ‘중도’를 가장한 ‘진보’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중도진보’는 한나라당 대선 주자들이 내세우는 ‘중도보수’와 취지 면에서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가 굳이 ‘중도진보’를 내세운 데에는 통일부장관을 지낸 경력을 최대한 살려 자신을 남북통합시대의 미래지향적 지도자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경제리더십’이 최대의 화두로 등장해 있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빅2’를 ‘수구보수’로 몰아세우면서 자신을 남북통합형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작업이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잘못했다가는 역풍을 맞아 자신이 오히려 ‘범여권’이 아닌 ‘구여권’의 인물로 낙인 찍힐지도 모를 일이다. ‘중도진보’의 이념적 지표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북통합형 지도자 부각 쉽지 않을 듯
나아가 사실(史實)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유비를 ‘포용과 통합’의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일찍이 20세기 초에 활약한 기인(奇人) 리쭝우(李宗吾)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린 바 있다. 그 또한 유비를 높이 평가했으나 그 이유는 정 전 의장과 사뭇 다르다. 그는 유비를 ‘포용과 통합’의 상징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하에 둘도 없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인물로 간주했다.

리쭝우는 자신의 명저 《후흑학(厚黑學》에서 난세에는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인물만이 천하를 거머쥘 수 있다고 단언한 바 있다. ‘면후심흑’은 후안무치의 뻔뻔함과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감춤)의 흑심(黑心)을 품은 인간을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조는 ‘심흑’, 유비는 ‘면후’의 달인(達人)이었다. 그는 유비를 이같이 평가해 놓았다.

“유비의 특징은 ‘면후’에 있다. 그는 상황에 따라 조조를 비롯해 여포(呂布)와 유표(劉表), 손권, 원소(袁紹) 등에게 붙어 이쪽저쪽을 오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남의 울타리 속에 얹혀살면서 이를 전혀 수치로 생각지 않은 것은 물론 울기도 잘했다. 훗날 나관중(羅貫中)은 《삼국연의》를 지으면서 그의 이런 특징을 두고 ‘유비는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봉착하면 사람들을 붙잡고 한바탕 대성통곡을 해 즉시 전패위공(轉敗爲功: 패배를 성공으로 뒤바꿔 놓음)을 이뤘다’고 꼬집었다. ‘유비의 강산(江山)은 울음에서 나왔다’는 속담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본래 영웅의 모습이다. 그와 조조는 쌍벽을 이뤘다. 두 사람이 술을 먹으며 천하의 영웅을 논한 것이 그 실례이다. 한 사람의 속마음은 가장 시커멓고 또 한 사람의 얼굴 가죽은 한없이 두꺼웠다. 그러니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리쭝우가 유비를 조조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평가한 것은 바로 유비의 ‘면후’가 절인(絶人)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조조의 ‘심흑’보다 더 교활한 게 유비의‘면후’이다. 이는 유비가 서촉을 차지할 때 구사한 간교하기 그지없는 휼계(譎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휼계를 낸 책사는 바로 《삼국연의》가 제갈량과 더불어 천하의 책사로 묘사한 방통(龐統)이었다. 당시 방통은 유비에게 이같이 건의한 바 있다.

“지금 은밀히 정병(精兵)을 선발한 뒤 밤낮으로 달려가 익주(益州)의 성도(成都)를 쳐야 합니다. 익주자사 유장(劉璋)은 군사를 모르는 데다 평소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으니 대군을 이끌고 가 급습하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상책입니다. 유장의 휘하장수 양회(楊懷)와 고패(高沛)는 지금 강병을 대동한 채 익주의 관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장에게 수차례에 걸쳐 장군을 형주(荊州)로 돌려보낼 것을 간했다고 합니다. 장군이 사람을 보내 형주에 긴급한 사정이 있어 구원하려 한다고 전하면서 군장을 꾸려 돌아가는 모습을 취하면 두 사람 모두 장군의 회군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경기(輕騎)로 장군을 전송할 때 그들을 사로잡은 뒤 곧바로 성도로 향하십시오. 이것이 중책입니다. 마지막으로 백제성(白帝城)으로 물러나 형주와 연계하면서 서서히 익주를 도모하는 계책이 있습니다. 이는 하책입니다. 만일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커다란 곤경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자 유비가 이같이 대답했다.

“상책은 너무 급하고 하책은 너무 완만하오. 중책이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으니 가히 취할 만하오.”

방통이 제시한 상책과 하책은 유장과 곧바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을 뜻한다. 상책은 속전(速戰), 하책은 지구전(持久戰)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부 군사로 시간을 어느 정도 벌면서 유장을 항복시키는 중책이 가장 타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유비는 중책을 취해 유장의 휘하장수인 양회와 고패를 연회에 초청해 죽인 뒤 곧바로 그 군대를 거두어 성도로 진격했다. 휼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천하삼분지계’를 성사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사 《삼국지》와 《자치통감》이 아닌 《삼국연의》를 읽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유비를 닮고자 하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게 없다. 큰 뜻을 품고 있는 만큼 자신의 행보를 둘러싼 평가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신속히 ‘포의’로 갈아입고 ‘범여권’의 대선 주자로 자연스럽게 변신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그는 민완 기자출신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민첩할 경우‘민힐’로 비춰질 수도 있다.
‘민힐’은 매사에 민첩하기는 하되 너무 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난세의 조조는 확실히 뛰어난 바가 있으나 나는 현덕(玄德)을 좋아한다. 비록 독하고 모질지 못해 제갈량(諸葛亮)의 삼분지계를 수용하는 선에 머물고 말았으나 그는 ‘포용과 통합’의 상징이었다. 그의 이런 행보는 현대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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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⑥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이코노믹리뷰 2007-04-12 13:30]


난세에 불어오는‘鄭風’
태풍의 눈인가, 찻잔속 태풍인가

‘경제 리더십’ 못지 않게‘교육 리더십’이 중요 이슈가 될 2007 대선. 정운찬 전 총장은 경제와 교육, 두 마리 토끼를 갖고 있다. 게다가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충청권 출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갖고 있는 카드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데….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학자지만 조실부모하고 조모 밑에서 어렵게 생장했다. 그의 생장과정을 보면 유방이나 조조에 가깝다

“서울대 총장 시절, 이명박 전 시장을 가끔 만난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매우 독선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결심해 뛰기 시작하면 결코 이 전 시장도 두렵지 않다”

이 번 대선에서는 ‘경제 리더십’ 못지 않게 ‘교육 리더십’이 중요이슈가 될 공산이 크다. 공교롭게도 정 전 총장은 경제학을 전공한 대학총장 출신이다. 그가 1% 안팎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시종 범여권의 제1순위 영입대상으로 거론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관측통들은 정 전 총장의 강점으로 ‘교육 리더십’을 포함해 크게 3가지 요소를 들고 있다.

첫째 경제전문가이다. 그는 미국의 명문대학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지낸 최고의 엘리트 경제학자이다. 둘째 교육전문가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교육 리더십’이 중요이슈로 등장할 공산이 큰 만큼 국립서울대 총장을 지닌 그의 이력은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정 전 총장으로서는 일종의 천시(天時)를 만난 셈이다. 셋째 충청출신이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드러났듯이 충청권의 향배는 승패의 관건이다. 충청 출신인 정 전 총장으로서는 지리(地利)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대권 향배 가를 충청권 출신
그렇다면 정작 가장 중요한 인화(人和)는 어떤 수준일까. 정 전 총장이 올해 초부터 범여권의 영입대상 1순위로 거론된 데에는 기본적으로 그의 인간적인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정치자문역을 맡고 있는 민주당 김종인 의원은 그의 매력을 이같이 요약한 바 있다.

“첫째 그는 겸손하며 물욕이 없다. 둘째 주변이 깨끗하고 복잡하지 않다. 셋째 특정 이익집단과 무관하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의 품격이 높아질 것이다.”

그의 주변에서는 그를 위해 조건 없이 뛸 사람이 수없이 많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단순한 ‘마당발’이 아니라 한번 맺은 인연을 깊고 길게 가져가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대권을 장악키 위해서는 현재 구축돼 있는 인화의 외연(外延)을 보다 확대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그는 나름대로 인화의 기본 틀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범여권의 적잖은 사람들은 정 전 총장이 지니고 있는 이런 장점을 근거로 그를 향후 돌풍의 주역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정 전 총장은 아직까지 정치참여에 관한 구체적인 속셈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범여권 인사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 크게 2가지 차원으로 나눠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소위 ‘상이한 고건 학습효과’를 들 수 있다. 정 전 총장은 자신과 유사한 이미지를 지녔던 고 전 총리가 기존 정치권에 휘둘려 도중하차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범여권 인사들은 정 전 총장이 고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반짝 인기에 편승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듯하다. 이들이 볼멘 목소리로 “본인이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야 밀어줄 것이 아니냐. 계속 뜸만 들이면 자칫 고 전 총리처럼 될 수 있다”는 협박에 가까운 불만을 털어놓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다른 하나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의 대선전략’이다. 정 전 총장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정치구도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가 최근 서울대 국제대학원의 강의에서 참여정부를 신랄하게 공격한 대목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직도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운운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지나간 얘기일 뿐이다. 세계경제의 선두주자인 ‘강소국 대한민국’이라는 새 비전 앞에 하나로 뭉쳐야 한다. 연말 대선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크다고 다 이기는 게 아니다.”

그는 ‘평화개혁세력’의 통합을 주장해 온 범여권은 물론 ‘산업화 세력’으로 대변되는 한나라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취지를 밝힌 셈이다. 범여권의 인사들에게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동행할 수 없다는 기본입장을 피력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범여권 인사들은 기존의 정치 틀을 유지한 가운데 반(反)한나라당 세력을 결집하면 능히 승산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정 전 총장의 기본구상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미 ‘무능한 진보’로 비판받고 있는 구여권의 인사들이 ‘반한나라당’을 내세우는 것은 명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역효과를 낼 우려마저 있다. 노 대통령의 색채를 완전히 탈색하지 못한 상황에서 범여권이 ‘환골탈태’를 고창(高唱)하는 것은 자칫 유두분면(油頭粉面 :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얼굴에 분을 칠함)한 노기(老妓)의 호객행위로 비춰질 공산이 크다. 열린우리당은 태생적으로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수파’가 버티고 있는 한 소위 ‘노무현당’으로 잔명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정가 관측통들은 대략 1학기 강의가 끝나고 범여권의 이합집산이 일단락되어 정계개편의 큰 틀이 짜이는 6∼7월께 정 전 총장이 정치참여를 전격 선언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나라당 경선이 막바지로 치닫는 시점에 전격적인 정치참여 선언이 나올 공산이 큰 셈이다. ‘정운찬 발’ 정계개편의 대지진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참여선언은 어느 정도의 폭발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현재 그의 리더십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대선후보가 갖춰야 할 대중성과 인지도 등이 뒤떨어져 있고, 지나치게 순정(純正)을 강조한 나머지 대사를 그르칠 소지가 크다는 것 등이 그 이유이다. 한때 학자출신으로 유력한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이홍구와 이수성 전 총리의 실패 사례에 비춰볼 때 이들의 지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 전 총장은 학자출신의 정치 초년생에 가깝다. 더구나 그가 참여코자 하는 것은 총선도 아닌 대선이다. 원래 학자 출신에게 미덕으로 통하는 양심과 순수함은 천하를 놓고 다투는 축록쟁웅(逐鹿爭雄)의 대선전에서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긍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조그마한 일에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쉽게 의기소침해지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에 나오듯이 교전을 하기 전에 으레 유장(儒將) 출신 적장(敵將)을 인격적으로 매도하는 전술을 구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난세에 청류(淸流)를 자처하며 자긍심이 강한 인물일수록 조그마한 일로 인해 어이없이 무너지기 십상이다. 사서에는 이런 사실(史實)이 매거(枚擧)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이 실려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춘추시대 진헌공(晉獻公)의 태자인 신생(申生)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춘추좌전》‘노장공 28년’조에 따르면 진헌공은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부친의 첩인 제강(齊姜)과 간통하여 태자 신생을 낳았다. 얼마 후 진헌공은 융국(戎國)으로부터 두 여자를 맞이해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얻었다. 중이는 훗날 제환공(齊桓公)의 뒤를 이어 사상 2번째로 패자(覇者)가 된 진문공(晉文公)이다.

이후 진헌공은 또다시 여융(驪戎) 군주의 딸인 여희(驪姬)를 아내로 삼아 해제(奚齊)를 낳았다. 진헌공이 여희를 총애한 나머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인으로 삼자 여희는 이내 해제를 태자로 삼고자 했다. 당시 진헌공은 자색이 뛰어난 우인(優人:어릿광대) 시(施)를 총애했다. 그는 영리한 데다가 구변 또한 뛰어나 진헌공의 총애를 한 몸에 입었다. 이에 시는 마음대로 궁중출입을 하던 중 마침내 여희와도 사통케 되었다. 하루는 여희가 우인 시에게 물었다.

“내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우인 시가 대답했다.

“먼저 태자 신생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신생은 사람이 성실하고 순수합니다. 또한 특별히 긍지가 높고 자중(自重)하여 차마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못합니다. 순수한 사람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긍지가 높아 자중하는 사람은 너무 고지식한 나머지 스스로를 사지(死地)로 몰아가고, 차마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자책(自責)하기 마련입니다. 그를 불의(不義)한 사람으로 모욕하면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여희가 반문했다.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치욕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욕하기 쉽습니다. 크게 모욕하면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의 명성에 심한 모욕을 가하면 그의 긍지와 자존심은 크게 손상받을 것입니다. 옛말에 ‘지나친 순수함은 우둔함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의 순수함은 그로 하여금 쉽게 모욕을 느끼도록 만들고, 그의 자존심은 재난을 피하는 방법을 스스로 차단하고 말 것입니다.”

이에 여희는 우선 신생을 무함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신생이 여희의 무함으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주변에서 이같이 간했다.

“군주에게 전말을 소상히 밝혀야만 합니다.”

신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하면 여희의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오. 게다가 군주는 이미 늙어 그런 일을 원치 않을 것이오. 나 또한 그리 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소.”

“그렇다면 외국으로 망명할 것입니까.”

“군주가 아직 그 죄의 원인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있는데 죄를 뒤집어쓰고 외국으로 나간들 누가 나를 받아들이겠소.”

결국 신생은 목을 매 자진하고 말았다. 신생은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고 긍지가 높았다. 이런 사람은 모욕을 당하면 쉽게 좌절하고 만다. 궤계(詭計)가 난무하는 난세에는 시정(市井)에서 잔뼈가 굵은 잡인(雜人)에게 이용당할 소지가 큰 것이다. 조선조에서 남산골 선비들을 낮잡아 ‘샌님’ 내지 ‘딸깍발이’로 부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우인 시가 ‘치욕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욕하기가 쉽고, 크게 모욕하면 자긍심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바로 자긍심이 강한 ‘샌님’과 ‘딸깍발이’의 최대 약점을 지적한 것이나 다름없다.

강한 자긍심이 최대 약점될 수도
조선조 철종(哲宗) 때 안동 김씨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하전(李昰銓)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래 그는 헌종(憲宗)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왕족 중 가장 기개 있는 인물로 명망이 높아 유력한 후계자 물망에 올랐으나 안동 김씨의 견제로 낙마한 바 있었다. 당시 안동 김씨 세력은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과 完완창군(昌君)이시인(李時仁)의 아들인 이하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하응은 재주와 지략이 뛰어났음에도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무뢰한과 어울리며 탕자를 가장했다. 안동 김씨 세도가들은 그를 치지도외(置之度外)했다.

이에 반해 이하전은 시종 안동 김씨의 감시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자긍심으로 인해 안동 김씨가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그는 과시(科試)를 보면서 힘이 센 자를 데리고 들어가 안동 김씨 자재들과 다투는 우를 범했다. 그는 낭패를 당하자 이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과장 밖으로 나가 ‘하늘이여, 원통하다’고 울부짖으며 자신의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안동 김씨 세력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하전을 제거키 위해 혈안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이하전은 모반을 도모했다는 무고(誣告)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천하의 대권을 거머쥐고자 하는 사람에게 긍지 높은 자존심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소지가 큰 것이다. 초한전(楚漢戰) 때 누대의 명문가 출신인 항우(項羽)가 일개 농민 출신인 유방(劉邦)에게 패퇴하고, 삼국시대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청류 명문가 출신 원소(袁紹)가 탁류(濁流)의 본류인 환관 집안 출신 조조(曹操)에게 참패를 당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정 전 총장은 항우·원소와 유방·조조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정 전 총장은 비록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딴 엘리트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조실부모(早失父母)한 까닭에 조모 밑에서 어렵게 생장했다. 그는 귀족적 이미지가 강하다는 지적에 대해 이같이 반박한 바 있다.

“나는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다. 서울로 올라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평일에 밥을 먹은 적이 없다. 거의 매일 죽과 수제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옥수수가루 등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의 생장과정을 보면 오히려 유방·조조에 가깝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간고(艱告)의 세월을 산 것이다. 그는 내심 자신을 대선레이스가 본격화하기도 전에 중도하차한 고 전 총리 등과 비교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뒷받침한다.

“나는 과단성이 있는 사람이다. 승산 없는 싸움은 결코 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자수성가한 그의 인생역정에 비춰볼 때 그의 말이 허투(虛套)로 들리지 않는다. 사실 대선에 임하는 그의 각오 또한 남다른 바가 있다. 그는 최근 <월간조선> 4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대선을 보는 자신의 생각을 이같이 밝혔다.

“서울대 총장 시절 이명박 전 시장을 가끔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매우 독선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결심해 일단 뛰기 시작하면 결코 이 전시장도 두렵지 않다.”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신중히 생각하되 일단 결단한 뒤에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평소의 행보가 약여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런 행보는 기왕의 학자출신 대선 주자와는 현격히 다른 것이다. 현재 이 전 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가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으나 이는 비정상적인 상황 하의 지지율에 불과할 뿐이다. 여러 정황에 비춰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의 최대 적은 바로 정 전 총장이 될 공산이 크다. 정 전 총장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과 현실에 괴리가 있는 건 사실이나 현실을 추상화한 이론은 튼튼하다. 이론을 튼튼히 하면 현실에 나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경제는 단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중장기도 있는 만큼 이론으로 잘 무장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넓고 길게 볼 수 있다.”

자신이 준비된 인물임을 은연 중 강조한 셈이다. ‘정풍(鄭風)’의 폭발력에 대한 관측통들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으나 그의 정치참여 선언을 기점으로 정치권에 일대 폭풍이 몰아칠 공산이 크다. 관측통들은 장차 그가 막강한 ‘브레인 트러스트’를 형성해 현재 ‘제3지대’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손학규 전 지사와 함께 범여권 내에서 양강구도를 형성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의 앞날은 서울대 총장과 탁월한 경제학자의 이력에서 우러나오는 ‘교육 리더십’과 ‘경제 리더십’을 얼마나 현실과 밀도 있게 접목시켜 나갈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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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⑤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이코노믹리뷰 2007-03-27 22:36] (고전전문가인 신동준씨가 이코노믹리뷰에 기고한 손학규전 경기지사의 리더십 분석 칼럼입니다. )


飛龍의 고육책인가
보따리장수의 궁여지책인가

탈당이 과연‘비룡재천’의 고육책이 될지, 아니면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궁여지책이 될지는 전적으로 그의 행보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한나라당의 관계는‘계륵(鷄肋)’에 비유할 수 있다.
버리기는 아까우나 이내 버려도 아무 탈이 없는 관계인 셈이다.

한나라당이 자랑하는‘빅3’ 중 한 사람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마침내 탈당을 결행했다. 나흘간에 걸친 ‘산사(山寺)구상’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무능한 진보’와 ‘수구 보수’를 혁파키 위한 ‘중도개혁’ 세력의 결집이다. 그는 백범기념관에서 가진 탈당 기자회견에서 “현 상태로는 정당의 건강한 자기혁신과 미래지향적인 정치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그 이유를 이같이 밝혔다.

“한나라당은 원래 민주화세력과 근대화세력이 30년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 만든 정당의 후신이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은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지난 14년 동안 몸을 담고 있었던 친정에 거친 독설(毒舌)을 퍼부은 셈이다. 그는 자신의 탈당행보를 두고 최근의 인기드라마 ‘주몽’을 예로 들어 주몽의 고구려 건국 행보에 비유했으나 설득력이 부족하다. 탈당 시기 등을 감안할 때 “정치의 기본 틀을 바꾸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그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탈당을 선택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것이다.

중도개혁 세력 정치세력화 가능할까
그럼에도 정작 문제는 손 전 지사의 행보를 단순히 궁여지책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다는 데 있다. 우선 그의 탈당을 계기로 대선 정국이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의 경선이 반쪽짜리로 치러질 공산이 커졌다.

이는 한나라당의 집권가도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아직도 한나라당은 압도적인 국민지지율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빅2’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경선을 무사히 치를 경우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아무리 열린우리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새롭게 단장하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위기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손 전 지사가 기대하는 중도개혁 세력의 정치세력화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탈당 직전에 손 전 지사는 국민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2위인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크게 밀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일각에서 손 전 지사의 ‘리더십 부재’를 운위한 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그의 성향이 한나라당의 보수성향과 잘 부합하지 않는 사실과 결코 무관치 않다. 이는 최근 한 논객이 한나라당 내에 머물고 있던 손 전 지사를 두고 ‘금의야행(錦衣夜行)’으로 평가한 사실을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금의야행’은 말 그대로 ‘밤에 비단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이는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로 원문에는 ‘의수야행(衣繡夜行)’으로 되어 있다.

일찍이 초한전(楚漢戰) 당시 항우는 유방에 앞서 진(秦)제국의 도성인 함양(咸陽)으로 쳐들어가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하여 모든 궁전을 불사른 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부하 한 사람이 이같이 간했다.

“이곳 진나라 땅은 사방이 험한 산으로 막히고 땅이 기름지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잿더미로 변한 함양에 더 이상 머물기가 싫었던 항우는 속히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고 싶은 나머지 이같이 일갈했다.

“부귀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리하면 과연 그 누가 나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한서(漢書)》는 《사기》의 이 대목을 그대로 옮기면서 ‘의수(衣繡)’를 ‘의금(衣錦)’으로 바꿔 놓았다. 이것이 훗날 바뀌어 ‘금의야행’이라는 성어로 굳어진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 있는 손 전 지사의 존재의미를‘금의야행’으로 표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에 머무는 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 전 지사의 탈당은 ‘금의야행’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의사인 셈이다.

원래 손 전 지사로서는 경선 룰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지 않는 영남을 중심으로 한 당내 보수세력의 협조를 기대키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10% 미만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손 전 지사는 이 전시장과 박 전 대표 등의 소위 ‘빅2’에게 결코 위협요인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손 전 지사가 ‘빅2’로부터 끊임없는 구애를 받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빅2’의 입장에서 볼 때 손 전 지사를 자신들의 ‘러닝메이트’로 삼을 경우 보수세력의 표를 확고히 다진 가운데 중도세력의 표까지 유인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원래 손 전 지사는 비록 일반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지지도 조사에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전문가 그룹인 기자들과 중소기업인의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늘 1위를 차지해 왔다. 그는 비록 젊은 날에 극좌이론에 함몰된 것이 사실이나 훗날 이를 모두 학문과 경국(經國)의 이론으로 승화시킨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치인에 가깝다. 그는 지난 2000년에 펴낸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에서 이같이 술회한 바 있다.

“나는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시절에 급진적인 이념과 사고를 지녔다. 정부홍보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경제도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망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북한까지도 정부가 선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악독하고 처참한 사회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의 통치리더십과 관련한 혜안은 지난 대선 때 이회창 후보는 촛불시위에 참석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는 오히려 미군을 위문하러 간 대목에서 약여하게 드러나고 있다.

폭넓은 시야와 탁월한 분석능력을 겸비한 ‘안보리더십’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좌우를 넘나들며 다양한 삶을 체득한 손 전 지사의 역정을 고려할 때 그가 지닌 경륜은 매우 소중할 수밖에 없다.

특히 교육자 집안 출신인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회창 후보와 같은 귀족적인 냄새가 전혀 없다. 기자들을 포함한 전문가들이 그를 두고 ‘꿈과 현실이 조화를 이룬 인물’로 평가하며 선호하는 대선 주자 1위로 꼽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본래 모습에 가까운 장(場)을 찾아낼 경우 얼마든지 새로운 상황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엘리트지만 귀족적인 냄새는 안나
만일 손 전 지사가 중도개혁 세력의 세 결집에 성공할 경우 이번 대선은 기본적으로 보수-중도개혁-진보의 대결구도로 치러질 공산이 크다.

이는 한나라당-중도개혁 세력 중심의 범여권-민주노동당 및 친노계열 간의 대결을 의미한다. 현재 적잖은 사람들은 손 전 지사가 중도개혁을 기치로 제3의 길을 선택할 경우 중도를 선호하는 여러 세력들의 화학적 대결집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나라당 수뇌부가 손 전 지사의 이탈을 계기로 자칫 보수-중도개혁-진보의 대결구도가 형성될까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우려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지난 1997년의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는 조순 씨와의 통합을 계기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으나 결전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박찬종 씨의 반발을 막지 못해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2002년의 대선에서 이 후보는 또다시 주변의 만류에 귀가 솔깃한 나머지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연대를 포기함으로써 충청권의 이탈을 막지 못해 패배를 자초하고 말았다. 손 전 지사의 탈당 행보는 한나라당 수뇌부로 하여금 과거의 악몽을 상기토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엄밀히 볼 때 이번 대선 정국은 손 전 지사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이 이론과 실천, 보수와 개혁, 좌파와 우파, 이상과 현실, 지조와 타협이 하나로 통합돼 있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현재 그의 지지율은 극히 낮지만 ‘중도개혁’의 상징으로 부상한 그가 흡인해낼 수 있는 잠재적인 지지층은 결코 간단치 않은 것이다. 그가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대권을 거머쥘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손 전 지사와 한나라당의 결별은 일찍이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이는 ‘계륵(鷄肋)’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버리기는 아까우나 이내 버려도 아무 탈이 없는 관계를 뜻한다.

삼국시대 당시 조조(曹操)는 서촉(西蜀)의 유비(劉備)를 제압한 뒤 이내 서촉에서 발원하는 장강(長江)을 따라 강남으로 쳐내려가 손권(孫權)마저 굴복시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서촉의 관문인 한중(漢中)으로 쳐들어갔으나 의외로 유비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중을 포기하고 철수하자니 애석하기 그지없고, 한중을 차지하기 위해 전진하자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조조는 이내 결단하여 한중의 군사를 모두 거두어 장안(長安)으로 철군키로 했다. 그는 드디어 철군의 결심이 서자 야간의 군호(軍號)를 ‘계륵’으로 정했다. 《삼국지》무제기(武帝紀)의 주(注)에 인용된 ‘구주춘추(九州春秋)’는 ‘계륵’이라는 군호가 결정된 당시의 배경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위왕(魏王) 조조가 환군할 생각으로 군호를 ‘계륵’으로 정했다. 관속(官屬)들은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이때 행군주부(行軍主簿) 양수(楊修)가 곧 행장을 수습해 돌아갈 준비를 하자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묻기를, ‘어떻게 환군할 것을 알았소’라고 했다. 이에 양수가 대답키를,‘무릇 계륵이란 것은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맛이 없는 것이오. 이는 한중을 비유한 것이오. 군호를 보고 대왕이 환군코자 하는 것을 알게 되었소’라고 했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조조의 심중을 헤아린 양수가 이내 죽음을 당한 것으로 그려져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삼국시대 당시 조조는 버리기 아까운 한중을 과감히 포기하고 철군을 결정했다. 그의 이런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손 전 지사 역시‘계륵’에 해당하는 한나라당을 과감히 이탈하는 결정을 내린 셈이다.

손 전 지사에게 한나라당은 계륵?
그의 결단은 《주역》건괘(乾卦)의 구사(九四) 효사(爻辭)에 비춰볼 때 시의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주역》은 비룡(飛龍)이 되기 직전 단계에 있는 용이 모습을 ‘혹약재연(或躍在淵) 진무구(進无咎)’로 표현해 놓았다.

‘혹약재연’은 용이 연못 위로 뛰어오르거나 연못 속으로 물러나기를 거듭하면서 하늘로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연못 속으로 깊이 숨지도 못하는 불안한 상황을 지칭한 것이다. ‘진무구’는 전진을 결행해도 허물이 없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공자는 이같이 풀이했다.

“현자(賢者)의 지위가 오르내림이 무상한 것은 사악(邪惡)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진퇴(進退)가 일정치 않은 것 또한 무리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군자의 진덕수업(進德修業)은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는데 있다. 그래서 ‘무구’라고 한 것이다.”

‘혹약재연’의 ‘혹(或)’은 위로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래로 지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가운데로 인간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을 말한 것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의혹(疑惑)이 뒤따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과 맺은‘계륵’의 관계는 바로 ‘혹약재연’에 비유할 수 있다. ‘진무구’는 어떤 길을 선택할지라도 험로(險路)를 걸을 수밖에 없으나 큰 허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고래로 ‘비룡재천(飛龍在天)’으로 나아간 모든 인물은 결정적인 시기에 결단을 유예(猶豫)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주역》은 이를 ‘진무구’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비룡재천’을 꿈꾸고 있는 손 전 지사 역시 나름대로 ‘진무구’의 노선을 선택한 셈이다. 실제로 그는 탈당 기자회견에서 ‘진무구’를 선택한 자신의 심경을 이같이 밝힌 바 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심정으로 새로운 정치질서 창조의 길에 저 자신을 던지고자 한다.”

이는 한나라당을 새 정당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던 당초의 의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자인한 것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현을 위해 온 몸을 내던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의지는 탈당 직전에 언급한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이 말은 뜻을 이루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정진한다는 불가(佛家)의 화두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통상 ‘백척간두, 갱진일보(更進一步)’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이미 충분히 향상했으나 다시 더욱 분발하여 앞으로 나아가다’의 뜻으로 불가 화두의 원의에 가깝다. 우리말의 ‘백척간두’가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로 올라가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과는 정반대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으나 단지 시기의 선택을 놓고 고민했다는 뜻으로 이 말을 한 셈이 되었다.

현재 손 전 지사의 탈당에 대한 찬반여론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비룡재천’의 뜻을 세운 사람에게 탈당에 따른 비난은 큰 문제가 아니다. 잠룡(潛龍)이 그 모습을 드러낸 현룡(見龍)이 된 뒤 ‘비룡’이 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은 법이다.

‘비룡재천’의 관건은 결정적인 시기에 결단을 내리는 데 있다. 결단을 유예할 경우 ‘비룡재천’의 기회를 다시 만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손 전 지사의 탈당은 일단 ‘비룡재천’의 기회를 잡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평가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질서 실현 여부 미지수
현재로서는 손 전 지사가 범여권의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가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이는 그가 탈당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조’를 화두로 내세운 사실을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겠다’며 기존의 정당과 정파를 ‘낡고 무능한 집단’으로 싸잡아 비판한 그가 그들에게 구애의 손짓을 보내는 것은 곧 탈당의 취지를 무색케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반 정황을 감안할 때 대략 그는 일단 시민사회세력과 손을 잡는 방식을 통해 중도개혁 세력의 입지를 서서히 확보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탈당 직전에 중도개혁성향의 제3정치세력인 ‘전진코리아’의 창립대회에 참석해 “새로운 정치질서의 출현을 위해 그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역설한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말한 ‘새로운 정치질서’는 말할 것도 없이 중도개혁 세력의 대통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손 전 지사가 기대하는 ‘새로운 정치질서’가 그의 구상대로 실현될지 여부를 점치기가 힘들다. 그가 ‘드림팀’의 일원으로 언급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모두 현재까지는 손 전 지사의 이런 구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걸림돌이다.

잠재적인 우군인 범여권의 반응이 환영일색인 것만도 아니다. 나아가 소위‘이인제 학습효과’등을 감안할 때 10% 미만의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한 그의 탈당이 중도개혁 세력 결집의 기폭제로 작용키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관측 또한 만만치 않다.

그의 탈당이 과연‘비룡재천’의 고육책이 될지, 아니면‘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궁여지책이 될지 여부는 전적으로 그가 앞으로 어떻게 행보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 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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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④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코노믹리뷰 2007-03-15 17:48](고전 전문가인 신동준씨가 이코노믹리뷰에 기고한 대권주자 리더십 분석 시리즈 '다시 리더를 말한다' 의 하나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신동준씨는 한겨레신문, 조선일보 등에서 정치부 기자생활을 했으며, 지금은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때 장학퀴즈를 석권한 수재이기도 한데, 참고로 신동준씨의 주장은 이코노믹리뷰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

“수신제가는 이뤘는데 치국평천하는 과연…”

강력한 대권주자 중 한 명인 박근혜 전 대표. 여론지지도는 이명박 전 시장보다 뒤지고 있으나 당심(黨心)만큼은 앞서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신뢰’와‘원칙’을 내세워 수신제가에는 성공한 것 같은데, 과연 사생활이 깨끗한 지도자는 응당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사상 최초로 부녀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수신제가 차원의 덕목인 ‘신뢰’와 ‘원칙’ 이외에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차원의 덕목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더불어 한나라당의 자랑이다.

현재 박 전 대표 측은 비록 여론지지도에서는 이 전 시장에게 뒤지고 있으나 당심만큼은 이 전 시장을 10% 넘게 앞서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는 2∼3주 간격으로 실시하는 대의원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 전 시장 측도 결코 경선 승리를 낙관할 수만도 없다. 이 전 시장 측이 일반인들의 참여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신실한 사람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 지녀
사실 박 전 대표 측이 당심의 우위를 주장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박 전 대표는 신실(信實)한 사람을 능히 알아보는 특유의‘지인지감(知人之鑑)’을 지니고 있다. 그는 사람을 쓸 때 섣불리 판단하거나 선입견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당사자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관찰한 뒤 나름대로 판단이 섰을 때 비로소 손을 내민다. 또한 일단 신뢰를 보낸 사람에게는 결코 도중에 그 신뢰를 거둬들이는 일이 없다.

박 전 대표가 구사하는 용인술의 특징은 대략 ‘신뢰’와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박 전 대표가 주변에 자신이 ‘신뢰’하는 인재를 포진시켜 수시로 자문을 받고, ‘원칙’에 입각해 자신에게 불리할지도 모를 조기경선에 동의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박 전 대표가 배신자에 대한 응징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신뢰’와 ‘원칙’에 대한 신념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괴한의 피습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와중에 “대전은요?”라고 물은 뒤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대전으로 내려가 역전승을 일궈 냄으로써 한나라당을 배반한 염홍철 전 시장을 응징한 것이 그 실례이다.

박 전 대표가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부친이 최측근이었던 김재규의 돌연한 배신으로 급서하고 자신 또한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등의 뼈저린 경험이 이런 용인술의 근인(根因)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곧 ‘신뢰’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교언영색(巧言令色)’과 ‘면종복배(面從腹背)’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그의 한 측근은 “얄팍한 수를 쓰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는 이들의 속셈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말로 그 특징을 요약한 바 있다.

용인술은 신뢰·원칙…선덕여왕과 흡사
이제마(李濟馬)의 사상론(四象論)에 비춰볼 때 박 전 대표의 이런 용인술은 그가 전형적인 소음(少陰)체질인 사실과 무관치 않다. 소음체질은 본래 ‘당여(黨與)’에 능하다. ‘당여’는 사석에서의 담론을 즐기며 주변에 자신이 신뢰하는 인물을 포진시키는 일련의 행보를 말한다.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 형의 인물은 대개 소음인이다. 이들은 머리가 총명하고 판단력이 빨라 조직을 만드는 데 장기를 발휘한다. 박 전 대표가 바로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당여’에 능한 대표적인 인물로 삼국시대의 제갈량(諸葛亮)을 들 수 있다. 제갈량은 ‘지감’에 뛰어나 사람의 현부(賢否)를 잘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사적인 자문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병법에 조예가 깊었던 마속(馬謖)을 곁에 두고 늘 병법과 관련한 사담을 즐기며 총애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그는 마속이 군령(君令)을 어겨 패배를 자초했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리며 소위 ‘읍참마속(泣斬馬謖)’을 단행했다. 자신이 내세운 ‘원칙’을 어긴 데 따른 가차없는 응징을 가한 것이다. 그가 오장원(五丈原)에서 진몰(陣沒)하기 직전에 위연(魏延)의 배반 가능성을 예상하고 강유(姜維)에게 미리 대비책을 일러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시대 당시 진수(陳壽)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이런 행보를 두고 이같이 평해 놓았다.

“공명(孔明)의 위정(爲政)과 형벌은 준엄했지만 촉나라 백성은 아무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공평하고 상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는 제갈량이 뛰어난 인재에 대해서는 늘 자신의 곁에 두고 자문을 구하는 등 한없는 ‘신뢰’를 보내지만 일단 자신이 내세운 ‘원칙’을 어길 경우 가차없이 베어버린 것을 칭송한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주변에 자신이 대표로 있던 시절에 기용한 인물을 포진시켜 끝없는 ‘신뢰’를 확인시키면서 ‘원칙’에 입각해 조기경선의 결단을 내린 것도 제갈량의 이런 행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의 신분으로 지존의 자리에 올라 ‘신뢰’와 ‘원칙’의 용인술을 구사한 인물로 신라시대 중기의 선덕여왕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재위 16년 동안 안팎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해내 마침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는 점에서 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 등이 모두 그녀의 치세 하에서 입신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선덕여왕이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한 기본철학이 바로 ‘신뢰’와 ‘원칙’ 이었다.

선덕여왕이 보위에 오를 당시만 하더라도 신라의 귀족들은 물론 중국의 당나라조차 여왕의 존재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삼국사기》‘선덕왕본기 12년조’에 따르면 당시 신라 사신을 맞은 당태종(唐太宗)은 거만하게도 이같이 말한 바 있다.

“너의 나라는 부인을 군주로 삼은 까닭에 주위 나라들이 무시하고 있다. 이는 군주 없이 적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내가 장차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신라왕을 삼고자 하나 그가 홀로 가서 신라왕 노릇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보호하고자 한다.”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명군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당태종도 군사출동을 간청하는 선덕여왕의 ‘걸사(乞師)’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 군왕에 대한 폄하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은 당시까지 여황제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당태종 사후 그의 후궁 출신이 전무후무한 여황제인 즉천무후(則天武后)로 즉위해 당태종 자신도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복의 대업을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당태종은 선덕여왕을 얕볼 입장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신라는 선덕여왕이 보위에 오를 당시 안팎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이 선왕 때 잃은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연계해 신라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때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 등을 적극 활용해 이 위기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훗날 김춘추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도록 만드는 디딤돌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는 박 전 대표가 지난 2004년 초 탄핵역풍 속에서 난파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을 떠맡아 그해 5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이끌어냄으로써 한나라당을 기사회생시킨 일에 비유할 수 있다. 당시 한나라당의 의원 및 당원들은 박 전 대표로부터 크고 작은 은덕을 입은 셈이다. 만일 한나라당이 올해 말에 치러지는 대선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이는 박 전 대표의 전공(前功)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가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선덕여왕과 사뭇 닮아 있다.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 중 결국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설령 결혼을 했을지라도 남편이 일찍 죽어 이후 재혼치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리더십 면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선덕여왕의 리더십을 두고 《삼국사기》는 ‘관인명민(寬仁明敏)’으로 규정해 놓았다. 이는 너그럽고 인자하면서도 현명하다는 뜻이다. 선덕여왕의 ‘관인명민’한 리더십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소위 ‘지기삼사(知幾三事)’의 고사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선덕여왕이 재위 당시 당나라에서 보낸 족자를 보고 이내 3가지 기미(機微)를 알아차린 것을 말한다. 모란꽃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울자 백제 군사가 여근곡(女根谷)에 쳐들어온 것을 알았고, 임종 전에 본인이 언제 죽을지를 미리 알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당부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는 물론 설화이기는 하나 그녀의 ‘관인명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크게 공감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박 전 대표 역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인명민’하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원래 ‘관인명민’은 무사무욕(無私無欲)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욕(私欲)이 앞서는 사람은 인색한 까닭에 결코 관인(寬仁)할 수 없다. ‘관인’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까닭에 암우(暗愚)할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의 ‘무사무욕’한 행보는 그의 에세이집인 《결국 한 줌, 결국 한 줌》의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은 결코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그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바라보게 한다. 모든 만남은 이별로서 끝이 나고 모든 소유는 상실로서 끝이 난다. 이승은 영혼을 닦는 유일한 도장이라고나 할까.’

박 전 대표는 관세음보살과 같이 사물을 관조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무사무욕’에 입각한 순정(純正)한 구도자의 자세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여승(女僧) 묘심화가 《대한민국과 결혼한 박근혜》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소회가 뒷받침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하얀 연꽃이 핀 줄 알았다”
‘박 의원을 처음 만났을 때 하얀 연꽃이 핀 줄 알았다. 어쩌면 하얀 목련 같기도 하고, 그러나 여자라는 느낌은 없었다. 성의 구별을 초월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랬다. 처음 보는 순간 박 의원은 관세음보살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 미혼으로 있는 박 전 대표를 보고 묘한 동질감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구도(求道) 의지를 투영시켜 구세(救世)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의 현현(顯現)으로 간주했을 공산이 크다.

원래 불가에는 수많은 보살이 있으나 관세음보살만큼 중생제도(衆生濟度)의 취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보살은 없다. 관세음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발로키테슈 바라(Avalokite vara)’이다. 이는 우주 삼라만상을 자유자재한 입장에서 관조(觀照)하여 살핀다는 뜻으로 ‘관자재(觀自在)’가 원의에 가깝다. 그러나 ‘관세음’ 역시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관자재’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보면 관세음보살의 ‘중생제도’ 행보와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이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뒷받침한다.

‘곧 사라질 그것들을 위해 정신을 쏟다보니 정말 세상에 온 나그네의 참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닦고 잠시 머물다 가는 그 동안이라도 이 세상을 사람들이 살기에, 아니 머물기에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다 가는 인생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이는 온 세상의 중생이 제도될 때까지 헌신할 것을 다짐한 관세음보살의 서원(誓願)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의 대권 도전은 관세음보살의 서원을 현실 속에 구현코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실제로 박 전 대표의 대권 행보는 이런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결국 한 줌, 결국 한 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위대한 일, 명예와 공이 따르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는 우선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속적인 권력과 공명(功名) 등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무사무욕’의 자세가 약여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가 얼마나 이상적인 통치관을 갖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맹자는 이같이 설파한 바 있다.

‘군자에게는 3가지 낙(樂)이 있다. 부모구존(父母俱存: 양친 모두 생존해 있음)·형제무고(兄弟無故: 형제가 아무 탈이 없음)가 일락( 一樂)이고,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음)·부부작어인(俯不 於人: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음)이 이락(二樂)이고, 득천하영재이교육(得天下英才而敎育: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함)이 삼락(三樂)이다. 군자에게는 이 세 가지 ‘낙’이 있을 뿐이다.’

박 전 대표가 언급한 내용은 맹자가 말한 ‘군자삼락’ 중 이락(二樂)에 해당한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용인술이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차원의 덕목일 뿐이다. ‘수신제가’의 덕목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인의 장막’에 갇혀 있지는 않는가
격동의 세월인 난세에는 힘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통치가 요망된다. 춘추전국시대에 법가(法家)와 병가(兵家) 등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역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많은 국민들은 여론조사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강력한 ‘경제리더십’을 원하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이 지지율에서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게 그 증거이다. 이는 결코 ‘앙불괴어천·부부작어인’ 등의 개인적인 덕목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는 최근 개그맨 유재석 씨를 예로 들어 이같이 언급한 바 있다.

“유씨의 인기 비결은 무엇보다 가식이 없고, 진실되고, 사생활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진실되게 국민을 대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면 강력한 리더십을 가질 수 있고 나라의 선진화도 앞당길 수 있다.”

과연 박 전 대표가 주장하듯이 사생활이 깨끗한 지도자는 응당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미·일·중·러 등 4강국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과연 이런 자세로 4강국과의 외교협상을 제대로 전개할 수 있을까. ‘사생활이 깨끗한 리더십’은 개인 차원의 수제(修齊)논리를 치평(治平)의 논리로 확대 해석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특히 박 전 대표의 이런 논리는 ‘신뢰’와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참모와의 관계를 주군과 가신의 관계로 변질시킬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적잖은 문제가 있다. 실제로 박 전 대표는 대표 시절에 주변으로부터 이런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신뢰하는 몇몇 사람에 둘러싸여 그들을 중심으로 일을 하는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

‘관인명민’의 리더십을 발휘한 선덕여왕도 재위 기간 중 자신의 등극에 반대하거나 주저했던 많은 사람들을 적극 포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 바 있다. 당태종이 노골적으로 선덕여왕을 폄하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박 전 대표가 ‘인의 장막’에 가려 있다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넓은 도량으로 사방의 인재들을 두루 포용할 필요가 있다. 선덕여왕의 협애(狹隘)한 ‘관인(寬仁)’이 아닌 즉천무후의 굉활(宏闊)한 ‘관인’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대권주자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가 장차 사상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수신제가 차원의 덕목인 ‘신뢰’와 ‘원칙’ 이외에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차원의 덕목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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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③ 이명박 전 서울시장

[이코노믹리뷰 2007-02-27 21:09](기자출신의 신동준씨가 이코노믹리뷰에 기고한 리더십 관련 글입니다. 신동준씨는 한겨레와 조선일보 정치부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지금은 21세기 정치연구소 소장을 지내고 있습니다. 순자, 맹자, 춘추좌전 등을 편역한 국내에서 몇 손가락안에 꼽히는 고전 전문가이기도한 그가 분석한 이명박 리더십을 한번 음미해보시죠 .) 

天時만난 경제 리더십 …
‘후보검증’관문 통과가 관건

“정주영과 이명박의 만남은 춘추시대 말기 월왕 구천과 범리를 떠오르게 한다. 범리의 계책으로 천하를 제패한 구천은 패업에 도취한 나머지 범리를 제거코자 했다.”

“이 전 시장의 용인술은 ‘아무나 쓰지는 않지만 누구나 쓴다’는 말로 요약된다. 사람을 들이기 전에 철저히 검증하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함께 일해 보자는 말로 일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는 용인술의 요체를 꿴 것이다.

“최고 통치권자에게는 국가대사와 세계정세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복잡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안목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주장 속에는 전 국민을 격동시키는 역동적인 비전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유 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 측이 최근 소위 ‘후보검증’ 논란에 휩싸여 적잖이 곤혹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최근의 그에 대한 ‘후보검증’ 공세는 전방위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의 지지율이 연일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데 따른 후유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두주자에 대한 강한 견제심리가 작동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전 시장 측이 드러내고 있는 불만 역시 일종의 '행복한 비명'에 가깝다.

현재 한나라당 내에서는 범여권이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큼 장차 외부 인사를 영입해 후보로 내세울지라도 한나라당 후보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 시장 측이 ‘후보검증’ 논란에 시종 차분한 대응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후보 검증’ 처음 제기한 사람은 노 대통령

당 초 이 전 시장에 대한 ‘후보검증’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는 올해 초의 신년회견에서 직설어법을 구사해 “실물경제를 좀 안다고 경제를 잘하는 게 아니다”며 이 전 시장을 정면으로 겨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이 전 시장의 고공행진을 돕는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부동산문제를 포함한 노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가 워낙 극명하게 드러난 데 따른 것이었다.

이 전 시장의 지지율이 지난해 말부터 연일 고공행진을 한 데에는 바로 노 정권의 경제실패가 이 전 시장의 '경제전문가' 이미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 사실과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최 근의 여론흐름을 보면 경제문제가 이슈화되면 될수록 노 정권의 실정과 이 전 시장의 ‘경제전문가’ 이미지가 더욱 대비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될 경우 이 전 시장에 대한 지지구조가 더욱 확고해질 공산이 크다. 이는 노 정권의 경제실패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 전 시장 측 역시 노 정권의 경제실패를 집중 부각시켜 이 전 시장의 ‘경제전문가’ 이미지를 극대화하려는 속셈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내 경선은 물론 올해 말의 대선에서도 ‘경제리더십’을 둘러싼 대선주자들 간의 불꽃 튀는 설전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 전 시장으로서는 일종의 천시(天時)를 만난 셈이다.

이 전 시장은 천시뿐만 아니라 인화(人和)도 얻은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지난 1999년에 《신화는 없다》는 자서전을 펴낸 바 있다. 이 책에는 한 가난한 노점상 소년이 고학으로 고려대에 입학해 6·3시위의 주동자가 되어 감옥에 갔다가 현대건설에 들어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회장이 된 후 정계에 성공적으로 입문하기까지의 역정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 책을 보면 오늘의 이 전 시장은 고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전 시장이 인화를 얻은 구체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경제실패 집중 부각시켜 지지율 올려

이 전 시장과 정 전 회장의 만남은 춘추시대 말기에 천하를 제패했던 월왕(越王) 구천(句踐)과 범리를 연상시킨다. 이 전 시장이 학창시절의 수옥(囚獄) 경력에도 불구하고 현대건설에 무난히 입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는 정 전 회장의 지감(知鑑)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범리가 월왕 구천의 신임을 얻어 핵심 가신(家臣)으로 등용된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월 왕 구천은 일시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격파하고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를 장악했으나 이내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부왕 합려의 패사(敗死)를 설원(雪寃)코자 한 오왕 부차(夫差)와의 회계(會稽) 대회전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구천은 부차의 시종이 되어 수년 동안 간고(艱苦)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때 구천은 범리의 계책을 받아들여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끝에 은밀히 세력을 길러 마침내 부차를 제압하고 장강 일대를 제패하게 되었다. 이는 정 전 회장이 태국 건설현장에서 커다란 손실을 보았다가 이후 이 전 시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아파트 건설을 전담하는 한국도시개발주식회사 등을 설립해 비약적인 발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제압한 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던 진(晉)나라와 자웅을 겨뤄 마침내 천하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이룬 패업에 도취한 나머지 자신의 패업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대부 문종(文種)과 범리를 제거코자 했다. 《사기》 ‘월왕구천세가’에 따르면 당시 이를 눈치 챈 범리는 재빨리 구천의 곁을 떠난 뒤 이름을 ‘치이자피’로 바꿔 큰 재부(財富)를 쌓았다. 당시 범리의 말을 듣지 않은 문종은 끝내 구천 곁에 남아 있다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정 전 회장이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에 만족치 않고 마침내 대권에 뜻을 품고 국민당을 창당할 당시 이 전 시장이 전정 회장과 결별한 뒤 독자행보를 걸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신화는 없다》에 따르면 당시 이 전 시장은 정 전회장의 정계진출을 적극 만류하며 김영삼 후보를 도와줄 것을 권했다고 한다.

결국 전 정회장의 대권도전은 좌절된 데 반해 이 전 회장은 정치1번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에 김영삼 대통령의 민자당 후보로 나와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범리가 정치인에서 경제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과 달리 이 전 시장은 당대의 경제인에서 일약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 무난히 성공한 셈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전 시장의 경제인으로서의 화려한 역정은 현대그룹 및 한국경제의 초고속 성장과정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여기에는 오너로서의 정 전 회장과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이 전 시장의 초상이 뚜렷이 각인돼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계입문 이후의 역정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정 전 회장은 수십 년 동안 정치권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여러 차례 대권에 도전했던 김영삼 및 김대중 후보에게 무모하게 도전장을 냈다가 이내 좌절하고 말았다.

현 재 이 전 시장은 비록 정치권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고는 하나 또 하나의 신화를 쓰기 위해 험난한 대권고지에 도전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전 시장은 정 전 회장과 달리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이는 전 세계 CEO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가 박 전 대표를 누르고 경선에 승리한 뒤 마침내 본선에서마저 범여권 후보를 제압하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 여부가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전 시장에게는 이를 낙관케 하는 몇 가지 뛰어난 장점이 있다. 우선 그가 철저히 일 중심의 인사원칙을 고수하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캠프에 합류한 정치권 인사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짧게 “열심히 잘 하자”는 말로 환영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만을 말하는 정 전회장의 리더십을 배운 듯하다.

아무나 쓰지 않지만 누구나 쓴다

이 전 시장의 캠프 사람들은 그가 보여주는 용인술(用人術)을 두고 ‘아무나 쓰지는 않지만 누구나 쓴다’는 말로 그 특징을 요약하고 있다. 사람을 들이기 전에 철저히 검증하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함께 일해 보자는 말로 일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는 용인술의 요체를 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춘추시대 초기에 활약한 관중(管仲)은 주군인 제환공(齊桓公)을 첫 패자(覇者)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제환공에게 이같이 건의한 바 있다.

“먼저 현자(賢者)를 몰라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자를 알았다고 해도 그를 등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현자를 등용할지라도 아무런 임무를 주지 않으면 등용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등용하여 임무를 주었을지라도 그를 믿지 않으면 결코 패업(覇業)을 이룰 수 없습니다.”

관중은 바로 용인술의 극치인 ‘지용임신(知用任信)’의 이치를 밝힌 것이다. 관중은 본래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을 쓸 때 믿지 못할 자는 아예 선발하지 않고, 일단 선발한 후에는 전적으로 일을 맡기면서 신뢰했다. 제환공이 관중의 도움을 얻어 첫 패업을 이룬 것도 이런 용인술과 무관치 않았다.

‘지용임신’의 원칙은 원인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현장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전 시장이 실무와 현장 중심으로 사람을 기용하면서 일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찾아서 하는 개척 정신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지용임신’의 용인술은 이 전 시장이 지닌 여러 덕목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용임신’의 원칙이 주효키 위해서는 반드시 일을 잘한 사람을 포상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토록 고취하는 방책이 필요하다. 한비자(韓非子)는 이를 소위 ‘신상진능(信賞盡能)’으로 표현했다. 이 전 시장은 묵묵히 일하면서 성과를 내는 사람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칭송하거나 캠프에 새로 합류한 신참자와 함께 행사에 참여하는 등의 용인술을 구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최근에 펴낸 《온 몸으로 부딪쳐라》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회의에서 너무 결론이 빤하게 흐르면 CEO는 일부러라도 딴죽을 걸어야 한다. 핵심 인재에게만 신경 쓰고 중위권 그룹에 신경 쓰지 않는 리더는 일류 감독이 아니다.”

이 는 ‘신상진능’ 원칙의 현대적 적용으로 볼 수 있다. 능력 위주의 ‘지용임신’ 원칙과 경쟁원리를 도입한 ‘신상진능’의 원칙은 이 전 시장이 지닌 뛰어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대권도전에 성공할 경우 이는 ‘지용임신’ 및 ‘신상진능’ 원칙의 개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 시장에게는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우선 그의 통치에 관한 기본 입장이 너무 소략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신화는 없다》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통 치라는 개념 아래에서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공복(公僕)이라는 말은 이론일 뿐이다. 통치 아래에서 공직자들은 국민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경영개념을 도입한 정치는 그렇지 않다. 자치지역 혹은 국가를 위해 더 많이 벌고, 벌어들인 것을 국민이라는 고객에게 환원해야 한다는 인식을 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통치를 일종의 억압개념으로 파악한 것부터 잘못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통치를 기업경영으로 환원시키는 단순논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이는 국가기관을 사회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는 서양의 개인주의적 접근방법에서는 가능한 것이기는 하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 전래의 역사문화적 전통과는 괴리된 인식이다. 동양에서는 국가를 사회의 일부분으로 상정한 적이 없다.

통치는 기업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여 국민이라는 고객에게 환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고 통치권자에게는 자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대사와 세계정세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보다 복잡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안목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주장 속에는 전 국민을 격동시키는 역동적인 비전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신화는 없다》에서는 통치차원의 비전은 잘 보이지 않고 ‘경제전문가’도 아닌 ‘경영전문가’의 이미지만이 크게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통치차원의 비전은 잘 안 보여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비록 세계 경제 10대국에 들어간다고는 하나 그 내막을 보면 속빈 강정에 가깝다. 국내적으로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고 국외적으로는 기술과 노임 면에서 일본 및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 상황에 안주했다가는 IMF 못지 않은 위기상황이 초래될 공산이 큰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전 시장이 내세우는 ‘경제리더십’에는 남북운하개통과 같은 토목공사 차원의 마스터플랜만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그 의 ‘경제리더십’에 대해 박 전 대표가 “경제전문가가 아니라 경제지도자가 필요하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나,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반드시 경제를 직접 해봐야 경제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며 직격탄을 날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실제로 이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전 시장의‘경제리더십’은 아직 정밀하게 검증받은 바가 없다. 과연 그가 ‘경제대통령’의 자격이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인 것이다.

이 전 시장이 최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제시한 소위 ‘MB독트린’ 역시 같은 차원의 지적을 면키 어렵다. 그는 북핵문제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을 촉구하면서 북한이 핵을 폐기할 경우 적극적인 대북지원에 나서 1인당 국민소득을 10년 내에 3000달러로 높이겠다는 추상적인 제안을 하는 데 그쳤다. 국가안보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차기 대권주자의 비전으로는 너무 허술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경제리더십’ 및 ‘안보리더십’ 등에 관한 정밀한 검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전 시장이 과연 경선에서 승리한 뒤 본선에서마저 범여권 후보를 누르고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을지 여부는 일련의 ‘후보검증’ 관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통과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 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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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LG CNS사장, 재기의 마술사

(커버 4) 쓸쓸한 퇴장...화려한 재기

유순신이 말하는 재기 방정식

"신재철을 보면 정답이 보인다"

박영환 기자(blade@ermedia.net) (직 장인들의 운명은 평탄치 않습니다. 승승장구하다가도 한번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오랜 칩거끝에 마지막에 웃는 역전의 용사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현대의 직장인들뿐일까요. 고전은 우리에게 "충신은 하사받은 마차가 헐기도 전에 내쳐지고, 애첩은 미모가 시들자마자 버림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오래전부터 전해왔지요.

신재철 LG CNS사장은 이런 맥락에서볼때 이례적인 존재입니다. 납품비리로 무관의 생활을 무려 2년이다 했으나, LG CNS의 사장으로 지난해 화려하게 복귀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신사장의 복귀에 돋보기를 들이댄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 기사와 관련해서는, 당사자인 신재철 사장의 반론이 있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그는 잡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고 말했는 데, 물론 잘못된 부분은 전적으로 기자의 책임입니다. )

" 급작스럽게 물러나셔야 했는 데, 억울하지는 않으셨어요. 납품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이 결국 문제를 일으킨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하 직원들이 저지른 실수 또한 내 책임입니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헤드헌팅 업체인 유앤파트너스(YOU&PARTNERS)의 유순신 사장.

지난 13일 삼성동에 위치한 이 회사 집무실에서 만난 유 사장은 지난 2005년 한 구직자와 나눈 대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60세를 바라보고 있던 이 전직 최고경영자는ꡐ납품 비리ꡑ라는 유탄을 맞고 뜻하지 않게 옷을 벗어야 했다. 검찰 수사는 그의 명성을 허물어 버렸다.

자 신의 명성에 일대 오점을 남긴 사건. 이 경우 누구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대개는 책임을 부하 직원들에게 돌리면서 전 직장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여나가기 마련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비리 기업인이라는 낙인이 한번 찍히면 재기는 영 어려워진다.

하 지만 그는 자신의 책임을 오히려 순순히 시인했다.ꡒ설사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더라도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역시 가장 강력한 무기는 ꡐ진실ꡑ이라는 평범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진리를 새삼 재확인 하게 됐습니다. ꡓ

당 시 이 구직 인터뷰에 응했던 전직 최고 경영자가 바로 신재철 현 LG CNS사장이다. 한국IBM의 최고 경영자로 7년간 근무하며 이 회사를 탄탄한 토대위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컴퓨터를 납품하며 담당 직원들이 발주처에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며, 그는 시련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2년여의 실직자 생활을 거쳐야 했다. 이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의 한국 자회사에서 CEO로만 10년 가까이 근무했던 신 사장은 지난 2004년부터 야인 생활을 했다. 그에게는 납품 비리 기업인이라는 ꡐ꼬리표ꡑ도 늘 따라다녔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인들이 대개 선택하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분 노를 속으로 삭이면서 외부 행사나 모임 등에 발길을 뚝 끊고 두문불출하는 것이 그 하나다. 체면을 중시하는 국내 기업인들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거나, 직장에서 좌천될 경우 지인들과의 연락을 끊고 여러 모임에도 일절 나오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최악의 자충수이다.

자칫하면 외부 인맥의 도움을 스스로 차단하고, 본인도 자신감을 잃고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유 사장은 지적한다. 하지만 신재철 LG CNS 사장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쉬는 동안에도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석했다. 또 아내와 유럽여행을 하며 격무에 지친 몸을 돌보았다.

업계와의 인연의 끈도 놓지 않았다. 강남에 조그만 사무실을 내고 업계 후배들을 상대로 컨설팅을 자청했다. 조급하게 복귀를 서두르지도 않았다. 유 순신 사장은 그에게 여러 차례 현업 복귀를 권했으나, 그는 이러한 제안을 고사했다. 아직까지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변하는 정보통신업계에서 무려 2년간 야인 생활을 했지만, 업계에서는 그를 잊지 않았다. 그는 재작년 LG CNS의 사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재기 성공 방정식 몸에 익혀라

그 는 성공적인 재기의 교과서이자 전범(典範)이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흔하지 않은 사례다. 한때(女帝) 여제 소리를 듣던 휴렛 팩커드의 칼리 피오리나나, 애플컴퓨터의 존 스컬리 등은 실적 부진에 더해 파워 게임에서 밀려 현직에서 물러난 뒤 아직까지도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들은 분식회계를 주도한 엔론의 전직 경영자들과는 달리, 도덕성면에서 질타를 받은 적도 없고, 한때 시장에서도 촉망받는 경영자들이었으나, 한번 낙마하고 나니 재기가 쉽지 않았다. 시장은 냉혹하다. 한번 실패한 경영자에게 러브콜을 보내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ꡒ 칼리 피오리나는 주주나 동종업계에 실패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혁신적인 기업이 아니라면, 재계보다는 정치권에서 그녀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ꡓ 유 사장의 분석이다. 하물며 납품 비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인물을 뽑으려고 할까.

신 사장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무엇보다, 그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을 잘 깨닫고 있었다.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대표적 실례이다. 유 사장은 그와 대비되는 국내 5대 그룹 출신의 한 전직 최고 경영자를 반면교사의 사례로 들었다.

이 전직 최고경영자는 자신의 후임자로 7~8세나 어린ꡐ새파란ꡑ인사가 내정이 되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잡 인터뷰에서 이 그룹이 위치해 있는 여의도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다 보면 과거에 얽매이고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감정을 소모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 는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의 임직원들과도 만나지 않았으며, 사적인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자학을 하거나, 전 직장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금물이다.ꡒ30년 동안 경력을 쌓았는데 얼마나 고마운 회삽니까.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같이 협력할 수 있는 회사로 가고 싶습니다.ꡓ

유 사장은 그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객관적인 상황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재기에 성공하는 해외 경영자들은 결코 자괴감에 빠지지 않았으며, 때로는 자신을 축출한 인사에 대해서도 과감히 먼저 손을 내밀 줄 알았다. 씨티그룹의 제이미 디몬 전 회장이 대표적이다.

유 사장은, 자신을 내친 회사에 분노를 표출하는 전직 CEO와 인터뷰를 하면서 역설적으로 폭넓은 시야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쉬는 동안 건강을 추스르는 한편, 인문서적을 읽고 사회공헌활동에도 나서 보라고 조언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숲속에 있다보면 숲이 보이지 않는다.

세 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부지런히 사람들과 교유하며 세상 흐름을 파악하는 한편, 자신이 활동했던 업계와의 끈도 놓지 말아야 한다. 분노를 느끼거나 자괴감에 빠져 있기에는 세상 변화가 너무 빠르다. 무엇보다,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위기를 반전의 기회로 적극 활용해 나가야 한다. 유 사장이 구직자들에게 주변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널리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배경이다.

ꡒ기회는 항상 옵니다. 가정일도 적극적으로 돕는 한편, 조직생활에 매여 있다보니 소원했던 사람들도 부지런히 만나세요. 그리고 앞으로 20년 동안은 무엇을 할 것인지 포부를 밝히세요. ꡓ

무 엇보다, 꾸준한 ꡐ평판(reputation)관리ꡑ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평판은 자신의 경력이자 직장 생활의 성적표이다. 업무 능력이 뛰어나도, 직장에서 같이 일하기 어려운 인력으로 낙인이 찍히면 불이익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조직 내 간부 사원은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부하직원들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또 후배 직원들은 자신의 조직 로열티에 대한 윗선의 평가를 꾸준히 신경 써야 한다고 그녀는 지적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신 사장의 이러한 위기 탈출의 방정식이 세계적인 경영 월간지인 《하버드비즈니스 리뷰》가 최근호(The Tests of A Leader)에서 밝힌 재기에 성공한 유명 경영자들의 여러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고수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하나로 통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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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전총리, 전장서 예를 찾다

다시 리더를 말한다 ② 고건 전 총리

[이코노믹리뷰 2007-02-15 07:42] (송 양지도. 전쟁터에서 도를 찾다가 결국 적에게 패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인 송양을 비꼬는 고사성어입니다. 고건 전 총리도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한때 주변의 높은 기대를 모았으나, 결국 후보 대열에서 스스로 탈락하고 말았지요. 혹시 적군이 강을 다 건널때까지 기다리던 송양의 우를 되풀이한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직접 쓴 기사는 아니고, 고전연구가인 신동준씨가 풍요로운 고전 지식을 활용해 저술한 글이지요.


신동준씨는 한겨레와 조선일보 등에서 정치부 생활을 오래 했는 데,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전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성악설로 널리 알려진 순자를 국내에 평역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분석한 고건 전총리의 리더십을 한번 보시죠:)



“시대 거부한‘愼獨 리더십’…
臣道의 길을 이탈하지 못했다”

“고 전 총리는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결단을 내린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의 행보는 현실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역대 대통령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행보와 대조를 이룬다”

다산 정약용
“고 전 총리는 다산 정약용의 저서《목민심서》에서‘현명한 사람은 청렴을 이롭게 여긴다’는 뜻의‘지자이렴(知者利廉)’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때문에 그가 취한 행보는 《중용》에서 말하는‘신독(愼獨)’에 가깝다.”

조조“난세에 천하를 놓고 다툴 때는‘신독(愼獨)의 리더십’이 어울리지 않는다. 조조처럼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재능만 있으면 과감히 발탁해 쓰는 유재시거(惟才是擧)의 용인술이 필요하다.”

최근 범여권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거론되던 고건(高建) 전 총리가 문득 대선 불출마를 선언해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유력한 대권후보로 거론된 인물이 중도에 불출마선언을 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특히 고 전 총리는 지난해 중반기까지만 해도 줄곧 각종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려온 까닭에 그를 잠재적인 대통령 감으로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던진 충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대선 경쟁은 기병술이 동원되는 野戰
본래 대선 경쟁은 온갖 기병술(奇兵術)이 동원되는 야전(野戰)에 비유할 수 있다. 야전을 지휘하는 장수는 결코 일시적인 승패에 희비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전투를 하다 보면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대병(大兵)을 잃고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크고 작은 전투에서 줄지어 승리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상승무적(常勝無敵)의 기세를 자랑할지라도 마지막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승리를 거머쥐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대선의 최종 회전에서 승리키 위해서는 먼저 출마자 스스로 필승의 신념을 지니고 도중의 모든 난관을 기필코 돌파해 나가겠다는 남다른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 전 총리는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결단을 내린 적이 없었던 듯하다. 이러한 관측이 맞는다면 고 전 총리의 행보는 현실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역대 대통령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행보와 커다란 대조를 이루는 셈이다.


큰 틀에서 보면 고 전 총리의 하마(下馬) 선언은 기본적으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그의 조심스런 행보와 무관치 않다. 고 전 총리가 존경한 역사적 인물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라고 한다. 정조(正祖)의 총임(寵任)을 받았던 다산은 순조(純祖) 연간에 노론의 견제에 걸려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무수한 역저(力著)를 남겼다. 고 전 총리가 주목한 다산의 저서는 공직자의 직무수행 교범이라고 할 수 있는 《목민심서(牧民心書)》였다. 그는 《목민심서》에서 ‘현명한 사람은 청렴을 이롭게 여긴다’는 뜻의 ‘지자이렴(知者利廉)’이라는 구절을 찾아내 자신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 전 총리가 취한 행보는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신독(愼獨)’에 가깝다. ‘신독’은 말 그대로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신중한 사려와 행보를 취하는 군자의 기본자세를 말한다. ‘신독’을 두고 다산은 《중용자잠(中庸自箴)》에서 ‘신독은 성(誠)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성’은 ‘성신(誠信)’을 뜻한다. ‘중용’이 곧 ‘성’이고, ‘성’은 곧 ‘신독’에 의해 이뤄진다는 게 다산의 논리였다.



40년 화려한 官歷…깨끗한 사생활
고 전 총리는 다산의 이런 논리를 적극 수용한 듯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확실히 ‘중용’에 입각한 ‘신독’의 길이었다. 그가 제3공화국 이래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선을 포함한 서울시장을 2번 역임하고 총리직을 중임하는 등 40여 년에 달하는 고위 관직 생활 중 단 한 번도 금전과 여인 등으로 인한 스캔들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독’을 삶의 기본철학으로 삼은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조 중기의 명신인 김집(金集)을 들 수 있다. 그의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다. 김집은 조선조 예학(禮學)의 조종인 김장생(金長生)의 아들로 효종 때 이조판서가 되어 북벌(北伐)을 계획하다가 김자점(金自點) 등의 방해로 이내 관직을 사임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조선조 예학의 태두가 된 인물이다. 김집과 고 전 총리는 평생 ‘신독’을 기본철학으로 삼아 여기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그러나 ‘신독’은 비록 군자의 길이기는 하나 원래 청관(淸官)에게 어울리는 신도(臣道)의 길이다. 난세에 천하를 놓고 다투는 소위 ‘축록전(逐鹿戰)’은 신도가 아닌 군도(君道)의 길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역대 대선전은 말 그대로 ‘군웅축록(群雄逐鹿)’의 각축전이었다. ‘축록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물의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재능 있는 자를 과감히 발탁하는 소위 ‘유재시거(惟才是擧)’의 용인술(用人術)이 필요하다. 이는 평생을 ‘신독’의 청관으로 살아 온 고 전 총리에게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愼獨의 행보… 조조의 리더십과 상반돼
군웅축록’의 난세에 ‘유재시거’의 용인술을 절묘하게 구사한 대표적인 인물로 조조(曹操)를 들 수 있다. 그는 형수를 취하고 뇌물을 받은 소위 ‘도수수금(盜嫂收金)’의 인물일지라도 재능만 있다면 과감히 발탁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쟁천하(爭天下)의 요체가 오직 재능만 있으면 과감히 발탁하는 소위 ‘유재시거’에 있다는 사실을 통찰한 데 따른 것이었다. ‘유재시거’는 《목민심서》의 ‘지자이렴’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신독’의 행보를 취해 온 고 전 총리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원래 ‘도수수금’은 《사기》‘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찍이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치러 갔다가 대패하여 정신 없이 도주하던 중 흩어진 군사를 간신히 수습해 형양(滎陽) 땅에서 진평(陳平)을 아장(亞將)으로 삼아 한왕(韓王) 한신(韓信) 밑에 예속시킨 바 있다. 이때 휘하 장수인 주발(周勃)과 관영이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진평을 이같이 헐뜯고 나섰다.


진평은 집에 있을 때는 형수와 사통했고, 위(魏)나라를 섬겼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하여 초나라에 귀순했고, 초나라에 귀순하여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도망하여 우리 한나라에 귀순한 자입니다. 그는 여러 장수들로부터 금품을 받으면서 금품을 많이 준 자는 후대하고, 금품을 적게 준 자는 박대했습니다. 진평은 반복 무상한 역신(逆臣)일 뿐입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곧 진평을 천거한 위무지(魏無知)를 불러 질책했다. 그러자 위무지가 유방에게 이같이 대꾸했다.


신이 응답한 것은 그의 능력이고, 대왕이 물은 것은 그의 행동입니다. 지금 만일 그에게 미생(尾生) 및 효기(孝己)와 같은 행실이 있다 할지라도 승부를 다투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초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대항하고 있는 까닭에 신은 기모지사(奇謀之士: 기이한 계책을 내는 뛰어난 책사)를 천거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계책이 나라에 이로운지만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도수수금’이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의 ‘미생’은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나는데도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남의 장소인 다리 밑에서 한없이 기다리다 물에 빠져 죽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효기’는 뛰어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던 은(殷)나라의 중흥군주인 고종(高宗)의 아들이다. 위무지는 잘못된 천거를 나무라는 유방에게 아무리 효성과 신의가 뛰어난 인물일지라도 난세를 타개한 지략(智略)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일갈(一喝)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방은 위무지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도 못내 안심이 안 되어 당사자인 진평을 불러 반복무상한 행보를 하게 된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진평이 이같이 응답했다.


당초 신은 위왕(魏王)을 섬겼으나 위왕은 신의 말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왕을 떠나 항왕(項王:항우)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항왕은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면서 오직 항씨 일가와 처남들만을 총신(寵信)했습니다. 설령 뛰어난 책사가 있다 한들 중용될 여지가 없기에 저는 초나라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대왕이 사람을 잘 가려 쓴다는 얘기를 듣고 대왕에게 귀의케 된 것입니다. 신은 빈손으로 온 까닭에 여러 장군들이 보내준 황금을 받지 않고서는 쓸 돈이 없었습니다. 만일 신의 계책 중 쓸 만한 것이 있으면 저를 채용하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황금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잘 봉하여 관청으로 보내고 저를 사직시키십시오.”


이에 유방이 진평에게 사과하고 후한 상을 내린 뒤 호군중위(護軍中尉)에 임명해 제장들을 지휘케 했다. 그러자 제장들이 더 이상 진평을 헐뜯지 못했다. 유방이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데에는‘유재시거’의 대원칙에 입각해 진평을 과감히 기용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삼국시대의 조조가 동탁(董卓)과 이각, 장수(張繡) 등에게 차례로 몸을 의탁하며 반복무상한 행보를 보인 책사 가후를 자신의 군사(軍師)로 과감히 발탁한 것은 유방의 ‘유재시거’ 행보를 흉내낸 것이다. 조조의 이런 선택은 전적으로 옳았다. 북방의 맹주 자리를 놓고 원소(袁紹)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을 벌인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가후의 계책이 결정적인 승인(勝因)으로 작용한 사실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공직생활 내내 ‘신독’의 행보를 보여 온 고 전 총리에게는 ‘유재시거’와 같은 과감한 인사를 기대키가 쉽지 않다. 고 전 총리가 오랫동안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참모들을 적극 활용해 이를 하나의 대세로 연결시키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고 전 총리는 비록 관원의 최고직위를 뜻하는 극품(極品)의 자리를 2번이나 역임하는 등 화려한 관력을 보유키는 했으나 극상(極上)의 자리인 군위(君位)와는 인연이 멀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본래 군위는 지존무비(至尊無比)인 까닭에 품계가 없다. 아무리 극품의 자리에 여러 차례 오를지라도 군위에 비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선이 있을 때마다 극품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들이 대권에 강한 의욕을 내비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동양 3국의 역대 인물 중 고 전 총리와 유사한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을 고르라면 단연 5대10국(五代十國)의 시대에 활약한 풍도(馮道)를 들 수 있다. 풍도는 특이하게도 불과 채 10년도 안 되는 왕조가 명멸하는 와중에 재상을 연거푸 역임했다. 이는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제3공화국에서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고위직을 역임한 고 전 총리의 관력 역시 전무후무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풍도는 당(唐)제국이 무너진 후 60여 년 동안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된 소위 5대10국(五代十國)의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당시 황하 중하류 북쪽에서는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등 5왕조가 명멸했다. 장강 중하류 남쪽에서는 오(吳)와 남당(南唐), 오월(吳越), 초(楚), 민(??), 남한(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 형남(荊南), 북한(北漢) 등 10국이 난립했다. 남쪽은 여러 나라가 난립해 병존한 데 반해 북쪽에서는 5왕조가 차례로 명멸한 점에 차이가 있다. 이들 왕조를 흔히 ‘5대10국’으로 통칭한다.


5대10국 시대에 활약한 풍도와 닮아
당시 5대10국 중 가장 짧은 왕조는 후한으로 만 4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이는 중국사는 물론 전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짧은 왕조에 속한다. 후량은 만 7년, 후주는 만 9년, 후진은 만 10년밖에 존재하지 못했다. 가장 긴 후당의 경우도 겨우 만 14년에 불과했다.


10년 안팎의 5왕조가 난립한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로 5년마다 되풀이 된 6공화국 역대 정권의 파행(跛行)과 사뭇 닮아 있다. 그러나 5왕조는 6공화국보다 오히려 나은 면이 있었다. 5왕조는 최고 권력자의 교체로 끝난 데 반해 6공화국은 하부 인사들까지 일거에 교체되는 격변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5왕조가 왕조교체로 명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면 평온을 유지한 데에는 풍도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고 전 총리가 전대미문의 ‘탄핵정국’ 속에서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끈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풍도는 5왕조에서 8성(姓)의 11명에 달하는 천자를 잇달아 섬기면서 고위 관리로 30년, 재상으로만 20여 년을 지냈다. 이는 고 전 총리가 총리직을 포함한 고위관원으로 40여 년을 살아온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풍도가 여러 왕조에 걸쳐 오래도록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청렴한 자세와 뛰어난 자질 때문이었다. 만 4년짜리 왕조가 명멸하는 미증유의 혼란 속에서 그나마 백성들이 큰 어려움 없이 난세를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풍도와 같은 현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명대 말기의 이탁오(李卓吾)는 ≪장서(藏書)≫의 마지막 장에서 풍도를 이같이 평한 바 있다.


맹자는 사직이 소중하고 군주는 가볍다고 말한 바 있다. 풍도는 이 말을 참으로 잘 이해한 사람이다. 백성들이 창끝과 살촉을 맞는 고통에서 벗어난 것은 바로 풍도가 백성들을 편안하게 부양하는 데 힘쓴 결과이다.”


풍도는 자신이 다섯 왕조를 두루 섬겼다는 지적을 받을지언정 차마 무고한 백성이 날마다 도탄에 빠져 있게 할 수는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탁오가 풍도를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풍도가 백성의 존망을 자신의 영욕(榮辱)보다 위에 둔 데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풍도는 평생을 두고 정당치 못한 재화는 집안에 쌓아 두지 않았다. 또한 질박하고 검소한 옷과 음식에 만족했다. 특히 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했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출신 가문을 따지지 않고 재능 있는 사람을 누구보다 아꼈다. 고 전 총리 역시 청렴한 삶을 살아오면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풍도는 훗날 자서전인 《장락로자서(長樂老自序)》에서 자신은 집안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키 위해 헌신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여러 면에서 풍도와 유사한 삶을 살아온 고 전 총리가 훗날 자서전을 쓰면 《장락로자서》와 유사한 내용을 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한 번도 국민들의 박수 속에 퇴임하는 대통령을 가져보지 못했다. 특히 5년 단임제를 채택한 이후 정권교체의 시기가 빨라져 마치 5대10국 당시에 단임 왕조가 명멸하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풍도를 닮은 고 전 총리가 당선될 경우 나라를 보다 안정되면서도 중도 통합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갈 공산이 컸다.


그러나 풍도가 비록 지존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을지라도 5대10국의 난세에 찬연한 빛을 발했듯이 고 전 총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는 하나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고 전 총리가 앞으로도 계속 국가원로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 갈 것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 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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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리더십 분석



①노무현 대통령의 통치리더십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공언했듯이 소위 ‘역발상’의 대가이다. 신년 벽두부터 아무도 예상치 못한 4년 연임제의 개헌을 문득 제의하고 나선 것이 그 실례이다. 노 대통령은 전에 문득 한나라당에 대연정(大聯政)을 제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제의는 노 대통령이 소위 ‘역발상’을 통해 최고 통치권자의 자리에 오른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발상’은 어디까지나 득천하(得天下)의 방략에 불과할 뿐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역발상으로 치천하(治天下)에 성공한 제왕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일찍이 전한(前漢)제국 초기에 육가(陸賈)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게 이같이 헌책(獻策)한 바 있다.

“마상(馬上)에서는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필히 마하(馬下)로 내려와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자칫 후대의 사가에 의해 득천하에 필요한 마상(馬上)의 전술(戰術)과 치천하에 필요한 마하(馬下)의 치술(治術)을 구분치 못한 대통령으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마상의 전술은 군웅(群雄)이 천하의 우이(牛耳: 주도권)를 놓고 다툴 때 쓰는 것으로 현대의 선거전에 비유할 수 있다. 원래 출마(出馬)한 적장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기습전(奇襲戰)과 복병전(伏兵戰), 공성전(空城戰) 등 다양한 기병술(奇兵術)이 필요하다. 특히 세가 불리할 때 이런 기병술이 필수적이다. 여기에는 ‘역발상’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병술을 구사한 인물로 삼국시대의 조조(曹操)를 들 수 있다. 조조는 짐짓 약병(弱兵 : 짐짓 미약한 모습을 보임)으로 적장의 교만을 부추겨 방심케 만들거나, 요병(耀兵 : 무력시위)으로 적을 지레 겁먹게 만들거나, 의병(疑兵 : 허수아비 등을 이용한 거짓 용병)으로 적이 착각토록 만들거나, 기병(奇兵 : 예상외의 용병)으로 적이 예상치 못한 시점을 택해 출기불의(出其不意 : 뜻밖에 나섬)로 적의 허점을 찌르거나 하는 등의 기막힌 기병술을 구사했다. 이는 상식을 뛰어 넘는 ‘역발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 등의 기막힌 역발상을 통해 단일후보가 된 뒤 충청도민에게는 ‘행정수도이전’을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수도권 주민에게는 ‘불편하고 시끄러운 것의 이전’을 내세워 표를 긁어모았다. 그는 역발상의 기병술로 득천하에 성공한 셈이다.

이회창 후보, 정병술(正兵術)만 고집하다 낙마
당시 대병(大兵)의 위용을 과신한 이회창 후보는 승패의 분수령이 충청 회전(會戰)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제휴마저 뿌리친 채 정병술(正兵術)만을 고집하다가 참패를 자초했다. 그는 비록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영남을 근거로 대병을 모아 권토중래(捲土重來)의 호기를 맞이했으나 결국 노 후보의 기습공격을 받고 낙마(落馬)하고 만 것이다.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지라도 ‘역발상’의 당사자인 자신의 주착(籌策)에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그러나 청와대에 입성 한 노 대통령은 응당 역발상의 유혹을 단호히 끊고 만민을 위해 고루 덕을 베푸는 황도무친(皇道無親)의 대정(大政)을 펼쳐야만 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치천하에 임하면서도 시종 역발상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최고 통치권자의 ‘역발상’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 최고 통치권자가 국가대사를 결정할 때 늘 좌우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들은 뒤 신중한 사려를 거쳐 결단을 내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천하를 거머쥔 뒤에는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말 위에서 호령할 일이 없는 법이다. 쟁천하(爭天下)의 회전(會戰)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말 위에서 내려와 천하에 임해야만 한다. 더 이상 싸울 대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말 위에서 진두지휘할 경우 공연히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노 대통령의 출신배경과 입신과정은 여러 면에서 한고조 유방(劉邦)과 닮아 있다. 유방 역시 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자랑하는 천하의 웅걸(雄傑) 항우(項羽)를 패퇴시키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출신배경·입신과정 한고조 유방과 닮아
진시황의 급서로 군웅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당시 천하인은 모두 항우의 천하평정을 의심치 않았다. 당시 항우는 누대에 걸쳐 장군을 배출한 명족 출신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각종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당대 최고의 무용(武勇)을 자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싸움은 일개 농부 출신인 유방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항우가 자신의 출신배경과 무용을 과신한 나머지 소위 대세론에 입각해 姑息的(고식적)인 방법으로 천하를 차지하려고 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이를 두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항우본기’에서 항우의 패망원인을 이같이 분석한 바 있다.

‘항우는 패왕(覇王)의 업을 이룬다는 명목을 내세워 오직 힘만으로 천하를 정복하려고 했다.’

항우는 여러 면에서 이회창 후보와 닮았다. 당시 이 후보는 대선예비전으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의 대승에 도취한 나머지 무명의 노 후보가 적장으로 발탁된 것을 보고 고식적인 대세몰이에 안주한 나머지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이는 삼국시대 당시 천하의 효장(驍將) 관우(關羽)가 오나라의 어린 장수 육손(陸遜)을 업신여기다가 패퇴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후보는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병가의 기본원칙을 무시함으로써 두 번에 걸쳐 통한의 분루를 삼켜야만 했다.

유방은 젊은 시절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유방은 현재의 역장(驛長)에 해당하는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법을 어겨 처형을 당하게 되자 이내 비적(匪賊)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진시황의 죽음을 계기로 천하가 혼란스럽게 되자 이를 틈타 한 지역의 반군(叛軍)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는 노 대통령이 젊은 시절 상고를 졸업한 뒤 별다른 직업을 갖지 못하다가 토방 속의 독공(獨功)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세인의 이목을 끈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원래 평민 출신인 유방은 귀족 출신인 항우와 달리 민심을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진제국의 도성인 함양(咸陽)을 점거했을 때 장로들을 불러 놓고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한 사실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 3개의 조항으로 이뤄진 ‘법삼장’은 진제국의 혹법(酷法) 하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신민들에게는 해방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민심 잡는 법 숙지한 ‘5공 청문회’ 스타
이는 노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여의도로 입성한 뒤 마침 세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모은 소위 ‘5공 청문회’에서 거침없는 논변과 격정적인 몸짓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어 열렬한 지지층을 확보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민심을 잡는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막강한 항우를 패퇴시키고 천하를 거머쥔 유방은 보위에 오른 뒤 자신과 전혀 다른 출신배경을 가진 유자(儒者)들을 크게 경멸했다. 《사기》‘고조본기’에 따르면 유방은 건국공신인 역이기( 食其)를 공개적인 석상에서 ‘우유(愚儒)’로 비난하는가 하면 유자들이 쓰는 유관(儒冠)에 방뇨키도 했다. 이는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후 ‘잘 배운 사람’ 운운하며 서울의 강남 지역민과 조선일보, 삼성그룹, 서울대 출신 등을 특권층으로 몰아가며 적대감을 드러낸 것과 닮아 있다.

유방과 노 대통령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이런 모습은 별다른 기반도 없이 자력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사람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들만을 탓할 것도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력으로 입신양명한 자들의 공업(功業)이 굉대(宏大)한데도 불구하고 세인들의 이들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비록 충절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것도 한미한 가문출신인 이성계의 전력(前歷)을 천시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전대의 명족 출신이 한미한 출신의 개업과 개국을 있는 그대로 평가한 적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세인들이 자력으로 입신양명한 사람을 추앙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역대 모든 왕조의 개국조가 소위 하나 같이 위보(僞譜)를 만들어 조상을 미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보를 만들어 조상을 미화하는 전래의 방안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당사자 스스로 자신이 이룬 굉대한 공업에 대한 만족감으로 한미한 출신 및 전력으로 인한 허전함을 메우거나, 자신의 전력에 대한 세인들의 낮은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그리 쉽지 않은 데 있다. 당사자의 자부심과 세인의 인색한 평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갭이 존재키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자칫 예상치 못한 화난(禍難)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대표적인 예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주원장 역시 유방과 마찬가지로 탁발승과 비적 등의 행각을 벌이다가 ‘역발상’을 통해 원대 말기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일약 몸을 일으켜 천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원래 그는 천하에 보기 드문 추남(醜男)이었다. 그러나 영정(影幀)에 그려진 그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로 현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위보(僞譜)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성이 주씨인 점에 착안해 사대부들이 공자 다음으로 존숭한 남송대의 주희(朱熹)를 자신의 조상으로 꾸미려고 시도키도 했다.

자격지심 때문에 폭군이 된 명태조 주원장
주원장은 보위에 오른 뒤 자신의 한미한 출신배경과 불미한 전력으로 인해 늘 자신의 출신 및 전력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병적인 반응을 보였다. 명나라 개국 초에 빚어진 수많은 筆禍事件(필화사건)은 모두 이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력을 연상시키는 모든 글을 보면 곧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여겨 당사자를 가차없이 혹형으로 다스렸다. 그가 후대에 폭군으로 비난받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원장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한미한 출신배경과 불미한 전력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인해 세인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전력을 연상시키는 글만 보면 병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는 유방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점이다.

유방은 주원장과 달리 재위 도중에 육가(陸賈)를 비롯한 유자들의 간언을 전격 수용했다. 당시 육가는 유방을 계도하기 위해 12편에 달하는 책을 지어 시간을 두고 한 편씩 유방에게 바치며 군왕의 길을 가르쳤다. 유방은 열린 마음으로 육가의 가르침을 흔쾌히 받아들여 이내 군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주원장과 달리 보위에 오른 뒤 이내 육가 등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역발상’의 유혹에서 벗어난 셈이다.

이는 스스로를 구시대의 평민이 아니라 새 시대에 부응하는 명족의 일원으로 간주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방의 일거수일투족은 군신(群臣)들의 모범이 되었다. 황제는 일상적인 업무에 간섭하지 않고 대신 이를 직접 처리하는 대신들을 선임하고 감독한다는 군도(君道)의 대원칙이 성립된 것은 바로 유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원칙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수천 년 동안 그대로 이어졌다.

유방과 주원장의 엇갈린 행보는 두 사람의 이질적인 성정과 무관치 않았다. 유방은 음습(陰濕)한 습기를 띠고 있는 주원장과 달리 밝은 면의 양성(陽性)의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스스로 이룬 공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유방은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도량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이 희대의 폭군이라는 오명을 얻은 데 반해 유방이 후대인의 칭송을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 역시 성정 면에서 주원장보다는 유방에 가깝다.

전형적 소양체질… 책략 부족하나 소신 뚜렷
일찍이 구한말의 위대한 사상가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는 사람의 체질을 사상론(四象論)에 입각해 4개의 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유방과 노 대통령은 전형적인 소양(少陽)체질에 속한다. 이에 반해 주원장은 장막 뒤에서 계책을 짜는 데 능한 책사 유형의 소음(少陰)체질에 속한다.

소양인은 소음체질에 비해 책략이 부족하기는 하나 소신이 뚜렷하고 일 처리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현우(賢愚)를 아주 잘 파악한다. 노 대통령의 확신에 찬 조리 있는 언변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양인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발 벗고 나서기 때문에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원한을 살 여지가 많다. 자신의 재주에 대한 신념이 지나치고 사사로움에 치우친 나머지 자칫 경박한 사람으로 몰릴 위험이 크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격정을 여과 없이 토로하면서 코드 인사를 계속하는 것도 이런 체질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소양인은 특히 자기가 현재 지니고 있는 부와 명예 등을 가볍게 보는 까닭에 이를 노리는 밑의 사람들로부터 늘 모함을 당할 소지가 크다. 소양인이 자주 폭발적인 슬픔에 잠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소양인이 남의 일에 희생적이고 대의명분 앞에서 비분강개하는 전형적인 무인(武人)의 기질인 데 따른 것이다. 눈물을 잘 흘리는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고 운운하며 걸핏하면 지존의 자리인 대통령직을 내걸고 승부수를 던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성정을 지닌 사람이 가장 주의할 대목은 신중한 대처를 요하는 외치분야이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심경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바람에 대미관계와 북핵문제 등에서 우리의 입지가 협소해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에 터져 나온 ‘평화의 바다’ 파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말 ‘교수신문’의 설문조사에서 전국 각 대학의 교수들이 지난 한 해의 의미를 한마디로 압축한 사자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를 선택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 대통령에 대해 충정 어린 고언에 해당한다.

원래 ‘밀운불우’는 《주역》의 《소축괘》(小畜卦)와 《소과괘》(小過卦)의 괘효사(卦爻辭)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비를 만들기 위한 전 단계로 구름이 꽉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를 전혀 만들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상을 말한다. 현재까지 《주역》에 관한 최고의 주석가로 알려진 삼국시대 위나라의 王弼(왕필)은 이를 두고 이같이 풀이해 놓았다.

“《소과괘》에서는 음기가 위에서 성한 기세를 하고 있음에도 전혀 베풀지 못하고 있어 ‘밀운불우’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소축괘》에서는 오히려 양기가 강한 까닭에 음기가 위로 더 올라가지 못해 ‘밀운불우’라고 한 것이다.”

《소과괘》의 ‘밀운불우’는 음기의 인물이 군주의 자리에 앉아 아래의 신민(臣民)들과 제대로 호응하지 못하는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 주원장의 등극이 이에 해당한다. 《소축괘》의 ‘밀운불우’는 덕이 매우 작아 대덕(大德)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덕(小德)에 그치고 있는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

현재 노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최하의 지지도를 기록 중인 것은 시종 민심과 괴리된 코드인사와 오기정치를 계속한 데 따른 후과로 보아야 한다. 노 대통령은 이제라도 특단의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개헌 등으로 불리한 국면을 반전시키려는 역발상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다행히 노 대통령은 유방과 같이 밝은 면의 성정을 지니고 있다. 《소과괘》의 ‘밀운불우’처럼 주원장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아니면 《소축괘》의 ‘밀운불우’처럼 유방의 길을 따를 것인지는 전적으로 노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노 대통령이 결심하기에 따라서는 잔여 임기 1년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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