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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社)바이벌’플랜] 고전 속 영웅들의 처세술



●“지나친 총명은 화를 부른다”

황하는 늘 범람했다. 중원을 지배한 몽골인들은 치수(治水)에 서툴렀다. 그들은 ‘요순’이 아니었다. 다루가치들은 무더위와 배고픔에 지친 평민들을 둑을 쌓는 일에 동원했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흉년과 수탈에 지친 백성들은 공사현장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훗날 명나라를 창업하는 주원장의 부모도 이때 목숨을 잃는다. 난세 중의 난세였다. 주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행각승으로 중국 전역을 돌며 비참한 현실을 목도한다. 그리고 조변석개하는 인심의 덧없음도 깨닫는다. 그런 그가 중국 대륙에서 이민족인 몽골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웠다.

유학자 주기와의 만남은 천재일우였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하던 이 무장은 이 유학자의 조언에 따라 성을 높이 쌓고 곡식을 비축했으며 ‘칭왕’을 미루었다. 난세를 돌파하기 위한 세 가지 지혜였다. 한족 대몽 항쟁의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주기가 제시한 3원칙은 단순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칭왕의 연기(延期)’다. 스스로 ‘왕’을 칭하는 일을 미루라는 뜻이다. 우쭐하는 마음에 총명함을 뽐내다가는 역풍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 시대 조조 휘하에 일하던 ‘양수’는 이러한 원칙을 지키지 못해 목숨을 읽고 만 인물의 전범(典範)이다.

양수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천재형 인물이었다. 당시 군주마저 우습게 여겼던 시대의 미치광이 ‘예형’마저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을 정도이다. 대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학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이런 배경을 밑천으로 조조의 후계자 그룹과도 꾸준한 교분을 이어갔다. 하지만 ‘현명한 자는 지나치고, 우둔한 자는 모자라다’는 중용의 통찰력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조조의 속내를 여러 차례 꿰뚫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더욱이 이런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기까지 했다. 조조가 무심코 던진 ‘계륵‘이라는 말에서 그의 철군 의지를 읽은 것이 대표적 실례이다.

양수는 ‘한중이 마치 먹을 것이 없는 닭갈비와 같다는 뜻이니 조조가 곧 한중에서 철군을 할 것’이라는 예측한다. 그의 예상은 적중한다. 그리고 반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죄명은 말을 함부로 옮기고 사적인 이익을 챙겼으며 제후들과 밀통했다는 것이었다.

인재들에게 한없는 포용력을 발휘하는 조조였다. 뇌물을 받아 말썽을 빚던 동향의 관료를 번번이 용서하고, 배신한 장수까지 다시 받아들이는 그였다. 하지만 자신의 의중을 꿰뚫어보며 ‘뒷담화’를 하고 다니는 위험한 ‘인재’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지나친 총명은 어리석음만 못하다. 촉한 제갈공명의 북벌을 좌절시킨 사마의는 이러한 원리를 꿰뚫고 있었다. 요동 땅을 지배하던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예는 그에게 토벌을 명령한다. 그는 적군의 주력이 기다리고 있던 주성을 지나쳐 적장인 공손강이 웅거하고 있는 양평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의 요동성을 지나쳐 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병력을 ‘길목’에 매복하고, 적의 주력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이루게 된다. 흥미로운 대목은 사마의의 이후 행보이다. 큰 공을 세운 장병들에게 겨울 한파를 막을 수 있는 두터운 방한 외투를 지급하라는 참모들의 제언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그였다.

군심을 장악하려 한다는 황제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반드시 배신을 한다는 이른바 ‘낭중지상’이어서 늘 조씨 가문의 견제를 받고 있던 그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는가를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진시황의 명을 받아 중원의 제후국들을 차례로 정복한 장군 ‘왕전’도 처세의 묘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60만 대군을 이끌고 통일전쟁에 나선 그는, 군대를 되돌려 반역을 꾀할 수 있다는 진시황의 의심을 피해가야 했다. 왕전이 내민 카드는 비루함을 가장하는 일이었다.

진시왕 영정을 상대로 출정에 앞서 수차례에 걸쳐 전답과 저택 등 재물을 줄기차게 요구해 자신이 배반할 마음이 추호도 없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한나라의 황제 유방의 동향이었던 명재상 소하가 취한 행동도 비슷한 맥락이다. 민심을 장악해 반기를 들 수 있다는 황제의 우려를 씻어내는 일이 시급했다.

백성들에게 더없이 후덕하던 소하는 이러한 의심을 지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고리대를 놓고 빚을 상환하지 못한 이들의 곤장을 쳐 일부러 원성을 자초했다. 조직이나 국가를 향한 로열티를 입증하는 일이 이들 생존의 필수조건이었던 셈이다. 물론 처세술만으로 난국을 헤쳐갈 수는 없다.

주원장이 소중히 여긴 두 번째 원칙이 바로 ‘성을 높이 쌓고 곡식을 비축하는 일’이다. 거점을 확보하고 평소 실력을 부지런히 닦으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위촉오가 경합을 하던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여몽이 대표적 실례이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강남 지역에 옮겨왔다 매형을 따라 종군해 공을 세워 발탁된 사례이다. 그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성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만 지나도 장족의 발전을 이룩해 눈을 부비고 그를 다시 바라봐야 할 정도라는 뜻이다.

훗날 맹장 관우가 지키던 형주 쟁탈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이 바로 괄목상대한 여몽이었다. 병을 칭하고 자신의 자리에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하던 육손을 임명해 관우의 방심을 부추겼다. 그리고 관우가 대병력을 이끌고 북벌에 나선 사이 형주를 기습해 형주탈환이라는 오랜 숙원을 마침내 이룬다.

여몽은 유연함도 발휘했다. 아직 무명이었을 때의 일화다. 손권이 군대 개편을 추진하자, 그는 자신의 군대를 창검기치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그의 진영에 순시를 나온 손권의 마음을 군무로 사로잡아 다른 부대를 넘겨받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인사권자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겨 휘하 부대의 덩지를 키우고, 훗날 동오의 총사령관이 되는 기틀을 이때부터 다지게 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사권을 쥔 이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한나라의 신불해가 주창한 ‘술(術)’의 원칙을 눈여겨봐야 하는 까닭이다.

신불해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요건 중에 술을 필수 요건으로 삼았다. 술로써 다스릴 때 신하들은 군주의 심의를 꿰뚫어보지 못하게 되고 자기보다 높은 자리를 넘보지 않으면서 오직 자기 직분에만 충실하게 된다고 하였다. 임직원의 입장에서는 종잡을 수 없어 보이는 인사권자의 변덕을 이해하는 요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운(時運)’이 역행하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진나라 부국강병의 토대를 놓았던 상앙이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가 사망하자 사지로 내몰리게 된 것이 대표적 실례이다. 제나라 전씨 가문의 계승자였던 맹상군의 ‘교토삼굴(狡兎三窟)’전략은 이런 맥락에서 눈여 겨 볼 만하다.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 이상 파놓는다는 뜻이다. <십팔사략>에 따르면 맹상군은 제나라의 왕족인 전씨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명민함을 발휘해 집안의 적장자로 가업을 계승하게 된다.

식객만도 무려 3000여명에 달했을 정도이다. 정치 환경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는 식객이었던 풍환의 도움으로 자신의 봉지로 돌아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게 된다.

역사는 인간관계에 울고 웃는 영웅들의 눈물의 파노라마이자, 오늘을 살고 있는 동시대인이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권력자를 중심으로 세를 이루고 조직이 운용되는 한, 수천 년 전 역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했던 인물들의 ‘처세술’이 여전히 유효한 배경이기도 하다.

박영환 기자 (blade@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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