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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창구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들려준 ‘군주론’

“그들은 태생적 마키아벨리스트”

2010년 11월 09일 11시 44분
군주는 고독하고 사악하며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할 만큼 잔인했다.

변창구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세익스피어 사극을 통해 본 지도자상’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 그가 전한 리더십의 요체를 정리했다. <편집자주>

“세익스피어는 흔들다는 뜻의 shake와 창인 sphere의 합성어입니다. 이 위대한 문인이 무인 가문 출신임을 짐작하게 하는 배경입니다.”

서울대 영문과 변창구 교수는 세익스피어 전문가다. 이 위대한 문인이 무인 가문 출신일 개연성을 이름에서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

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이 위대한 작가는 교조에 얽매이지 않는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작품이 불멸의 고전으로 지금까지도 각광받으며 영화, 드라마, 소설 등으로 리메이크되는 배경이다.

변 교수는 “인기 드라마도 2~3번 반복해 보면 스토리가 뻔해 지루하지만 세익스피어의 작품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세익스피어 자신도 18세 때 여덟 살 연상의 여인과 혼인을 할 정도로 영국 사회의 관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영국 군주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비결이기도 하다. 영국의 정치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군주들은 대부분 인자하면서도 잔인하고, 비루하면서도 원대하며, 매정하면서도 관대했다. 정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군주들의 이러한 속성을 이념적 잣대가 아니라,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본 주인공이 세익스피어였다. “나도 경들과 같이 빵을 먹고, 배고픔도 느끼고, 슬픔에 괴로워할 줄 알며, 친구도 필요하오… 이처럼 인간의 욕망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나 같은 사람을, 어찌 왕이라 칭할 수 있겠소.”

훗날 같은 할아버지를 둔 사촌 볼링브로크에 쫓겨나 목숨을 잃는 리처드 2세의 절절한 고백이다. 군주들은 숙명처럼 찾아오는 외로움을 토로하면서도, 정적들을 잡초를 뽑듯이 제거한 권력의 화신이었다.

군주는 고독하고 사악하며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할 만큼 잔인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조언이다. 헨리 5세는 이러한 원리를 본능적으로 꿰고 있는 리더였다.

그가 군주가 된 배경부터가 평범하지 않다. 14세기 영국을 통치한 강력한 군주 에드워드 3세가 왕위를 장남의 첫째 아들에게 물려준 뒤 사망하자, 권력 투쟁에 뛰어들어 왕위를 찬탈한 비정한 인물이 바로 볼링브로크(Bolingbroke)이다. 이 폭군의 아들이 헨리 5세다.

후계자 시절 부랑자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속을 썩이던 그는 왕위에 오르자 딴 사람이 된 듯 돌변한다. 저잣거리에서 사귄 부랑자 친구들과 교유를 끊고 제왕학 수련에 전념했던 것. 헨리 5세는 중국 한나라의 황제인 무제와 비견되는 뛰어난 통치자였다.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귀족 세력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프랑스를 침공한 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5년 후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까지 차지한다. 자신을 찾아온 저잣거리의 친구들을 멀리하며 제국의 구축이라는 한 가지 목표에 올인 한 그는 한비자가 말한 ‘세법술’의 대가였다.

“그 천박한 머리로는 농군들 그 자신들이 실컷 덕을 보고 있는 평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국왕이 밤잠도 못자고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지를 상상조차 못하지 뭐야.” 헨리 5세의 이 대사는 누구와도 짐을 나눠질 수 없는 군주의 비애를 엿보는 창이다. 동서양의 군주들은 비슷한 운명이었다.

동양의 군주들이 환관 정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이면에도 이러한 숙명적 고독이 있었다. 적막한 구중 궁궐에서 환관의 다리를 베고 잠이 드는 심약한 군주가 천자를 자처한 동양의 권력자였다.

세익스피어는 군주들의 이러한 내면세계를 절묘하게 포착했다.

세익스피어가 남긴 저술들은 냉혹한 현실을 정면 돌파해 나가는 뛰어난 리더십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르네상스가 유럽 대륙으로 점차 펴져 나가던 당대 영국 사회의 ‘풍향계’다.

“신하를 너무 귀하게 대우하면 반드시 군주의 자리를 갈아치우려 할 것입니다.”

세익스피어 저술들은 리더십의 교과서

영국의 군주들이 마키아벨리적 술수에 능한 이면에는 현실 정치의 냉혹함이 있다.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리처드 2세는 신왕이자 사촌인 볼링브로크가 보낸 부하들에 목숨을 잃는다. 자신의 혈육이자 권신이기도 한 사촌을 철석같이 믿은 대가로 목숨을 역사의 제단에 바친 것이 바로 리처드 2세였다.

역사는 신하들에게 배신당해 눈물로 생을 마감한 군주들의 잔혹사다. 동양의 <사기> <십팔사략> <후한서> 등은 군왕들이 후세에 남기는 비망록이다. 환관 조고에게 살해당한 진시황제의 아들 호해, 간신들에게 배신당해 죽어서도 무덤에 묻히지 못한 제환공 등이 반면교사다.

동양의 군주들이 늘 베게머리에 두고 읽은 고전이 바로 한비자였다.

“총애하는 신하를 지나치게 가까이하면 반드시 그 군주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며, 대신을 너무 귀하게 대우하면 반드시 군주의 자리를 갈아치우려 할 것입니다. 왕실의 형제들을 복종시키지 못하면 반드시 사직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한비자의 통찰이다.

그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통찰한 심안의 소유자였다. 권력의 본질을 냉철하게 꿰뚫어본 이들은 동양의 법가들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통치 원리로 표방하면서도 당근과 채찍으로 권신들을 통제하고 나라를 다스린 패도의 달인들이 한비자의 제자들이었다.

한 무제 유철은 유학을 국학으로 삼았지만, 통치는 법가의 가르침을 따랐다. 하지만 문치를 표방한 송대에 등장한 주자학을 전환점으로 동서양의 관계는 역전된다.

변 교수는 동양이 서양에 휘둘린 것도 정치학에서 윤리학을 분리하지 못한 업보였다고 진단한다.

동양은 도덕적 색채가 짙은 주자학이 정치의 기본원리로 부상하면서 도덕적 담론으로 정치 현실을 재단하는 이상주의로 흐른 데 비해, 서양은 정치 영역에서 도덕을 분리하며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익스피어 작품의 ‘촌철살인’ 명대사들

# 저 속이 빈 면류관 속에는 죽음이 왕궁을 지키고 있는데 이 죽음이라는 어릿광대 놈은 손뼉을 치며 왕의 위광을 조소하고 왕의 영화를 조소하고 있다. (리처드 2세)

# 저 경박한 선왕은 천박한 광대들과 재사 족속들을 거느리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바람에, 국왕의 위엄과 권위는 저 광대들의 바보짓과 분간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헨리4세)

# 명예가 바늘로 나를 찌르는군. 하지만 어쩌다 이 명예 때문에 부상을 입으면, 그러면 어떡하지? 명예가 떨어져 나간 다리를 복구시켜줄까? 명예란 대체 뭐야? 그냥 말 한 마디에 불과해. 묘비에 쓰인 비명 이상도 이하도 아냐. (헨리 4세)

# 짐은 이것들 전부를 책임져야 하는구나. 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냐. 국왕이라는 위대한 지위로 태어나 자신들의 복통밖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바보들에게 시중을 해야 하다니. (헨리5세)

박영환 기자 yungh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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