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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복케 하는 자를 경계하라”

史記 전문가에게 듣는 불황시대 인간경영론




바닷물을 모두 마셔보아야 짠맛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비나 비무극, 엄숭은 군주를 잘못된 길로 인도해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지금도 이런 인물들은 한국 사회에 많은 편입니다.



#1. 수년 전 경영권 분쟁을 겪은 A회장은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답답해진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복동생은 가문에서 늘 ‘애증’의 대상이었다. 동복형제들은 알짜 계열사를 주고 분가시키자고 제안했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경영 현안을 챙기는 요직에 동생을 배치했다. “동생이기 이전에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서였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뜻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격이었다”고 가슴을 쳤지만 만시지탄이었다. 그의 동생은 이 그룹을 서서히 장악해 나갔다. A회장은 다른 회사를 인수해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 

#2. 제이미 다이먼 JP모간 체이스 회장은 요즘 월가에서 가장 잘나가는 ‘경영자’이다. 투자은행의 몰락을 불러온 금융위기는 그의 경영 스타일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왔다. 과학적 리스크 관리가 주특기인 그는 하지만 수년 전 샌디 웨일 씨티그룹 회장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상품 판매 전략을 둘러싼 오너 딸과의 이견 다툼이 축출의 빌미가 되었다. 당시 “건강상의 사유로 사퇴한다”는 발표는 월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 기자간담회를 끝으로 회사를 떠난 그는 1년 이상 체육관을 다니며 샌드백을 두들기며 분노를 삭여야 했다. 그는 훗날 이 백수 시절을 회고한 바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국내 중견그룹의 A회장, 그리고 제이미 다이먼 JP모간 체이스 회장의 ‘수난사’는 믿었던 인물들에게 배신을 당하며 눈물을 흘린 이들의 비망록이다. 경영자들은 늘 불안을 달고 살기 마련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불안의 바이러스를 한국 사회 전역으로 퍼뜨리고 있다. 
업무를 게을리한다며 부하 여직원의 책상을 옮겼다 몸싸움으로 까지 번졌다는 한 줄의 기사는 경제위기 시대 직장인들의 자화상을 엿보는 창이다. ‘그는 과연 신뢰할 만한 인물일까?’ 불신은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의심은 꼬리를 문다. 지난 17일 오후, 사마천의 《사기》 완역에 나선 김영수 고전 전문가를 만나 인간경영의 통찰력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Q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도 군주나, 동문수학한 친구들을 배신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건가요. 
‘간성(姦性)’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진시황을 도와 중국 대륙을 통일한 이사는 동문수학한 한비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뛰어난 장수이던 방연은 스승 귀곡자 밑에서 함께 수학한 손빈을 간첩으로 몰아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Q 손빈이나 한비자가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회음현에 있는 명장 한신의 묘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지만, 어머니의 묏자리를 ‘명당’에 쓸 정도로 야심이 많던 그는 불운했습니다. 
유방에게 토사구팽당한 그의 묘소 또한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당대의 승패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죠. 사람들이 현실에 집착하는 배경입니다.


Q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입신양명에 흔들리지 않는 이들은 거의 없습것 같습니다.. 
‘오욕칠정(五慾七情)’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사기에 등장하는 간신들은 이 욕구가 무척 강렬했죠. 세상이 혼란스럽거나, 조직이 흔들릴 때면 어김없이 그들은 전면에 등장합니다. 현 정부 들어 ‘법간(法姦)’까지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군주의 기쁨, 슬픔, 분노를 파고듭니다. 


Q 대법관의 촛불 집회 재판 개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장 위험한 유형의 간신이 바로 ‘지식인’들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간신으로 통하는 명대의 재상 엄숭은 학문이 도저한 인물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엄숭 같은 간신의 망령들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군자가 여럿 모여도 모자라지만 망치는 일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Q 학문 수련에 정진한 지식인들이 더 위험한 이유가 있습니까. 
엄숭은 권력의 작동 원리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권력자이자 후원인인 하언과, 황제의 사람됨을 깊숙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풍족히 지내고 싶지 않은 이들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 액션 플랜을 정교하게 집행할 수 있는 이들은 드뭅니다. 도덕이나 명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한 거죠. 


Q 엄숭은 입으로는 아부를 하면서도 가슴속에는 칼을 품고 있는 ‘구밀복검’형의 인물이었죠. 
엄숭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벼슬길에서 물러났으나 재진출할 길이 요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동향 사람 ‘하언’입니다. 엄숭은 마치 입속의 혀처럼 굴면서 이 대쪽 같은 고위 관리의 환심을 샀습니다. 엄숭은 하언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진출합니다. 


Q 한 길 사람 속을 파악하기가 그렇게 힘든 거군요. 
공자도 늘 고심하던 문제였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또 제후국을 떠돌며 많은 군주와 그 신하들을 만났던 그에게는 절박한 문제였던 셈이죠. 엄숭도 늘 입바른 소리를 하던 하언을 중상모략하고, 날조된 유언비어를 끊임없이 퍼뜨렸습니다. 하언은 엄숭의 모략으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Q 모 기업은 한때 신입사원을 채용하며 역술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관상이나 사주를 보십니까. 
30대 초반에 그 허구성을 깨달았습니다. 제 경우는 상대방이 어려울 때 하는 행동을 보고, 또 상황이 좋을 때 하지 않는 행동을 보는 편입니다.


Q 리더들은 늘 불안을 달고 삽니다. 후삼국의 궁예처럼 ‘독심술’이라도 익혀야 하는 걸까요. 
공자는 상대방이 행동하는 바를 보고, 그 일을 하게 된 연유를 살피며, 편안히 여기는 바를 깊이 헤아리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말에 사기성이 농후한데 달변인 자, 행동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고집만 센 자, 뜻은 어리석으면서 지식만 많은 자들을 경계하라고 강조했습니다. 


Q 사마천도 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을 통해 ‘인물 판별’의 노하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요리사이던 역아는 어린 아들을 죽여 그 고기를 군주인 제환공에 바쳐 환심을 산 인물입니다. 사람고기만 먹어보지 못했다는 제환공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아들을 바친 거지요. 또 수조는 정무를 처리하느라 연로한 부모를 찾아보지 못한 관리였습니다. 제환공이 이들의 충정에 감복할 만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Q 군주를 감복케하는 이들을 경계하라는 뜻인가요. 요즘 세태와 잘 맞지 않는 듯합니다만. 
춘추시대 제환공은 자신의 목숨을 노린 관중을 재상에 등용할 정도로 배포가 큰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제환공을 떠받들던 역아나 수조는 군주가 병들어 눕자 바로 본색을 드러냅니다. 와병 중인 제환공이 굶어죽는 것을 방조합니다. 어린 아들까지 바치고, 부모조차 찾지 않고 내보이던 충심은 결국 ‘거짓’이었던 거죠.


Q 춘추시대를 제패한 제환공 같은 뛰어난 군주가 왜 하찮은 인물들에게 휘둘린 걸까요. 
역아나 수조는 군주들의 허한 심리를 파고드는 ‘심리학’의 달인들이었습니다. 권력의 무게중심이 흔들리자 재빨리 말을 갈아타고 부귀영화를 꾀한 겁니다. 관중과 포숙, 그리고 습붕 등 명신들의 보필을 받으며 춘추시대를 제패한 이 군주도 그렇게 쓸쓸하게 가고 말았습니다. 그도 오욕칠정에 흔들리는 인간이었던 거죠. 


Q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군주들은 30세 전후에 권좌에 올라 30년간 재위에 있다 60세경 생물학적인 수명을 마감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수명이 길어지긴 했지만, 연로한 경영자들은 이 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Q 제환공이 사망한 지 200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마천의 통찰력이 지금도 유효합니까. 
바닷물을 모두 마셔보아야 짠맛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비나 비무극, 엄숭은 군주를 잘못된 길로 인도해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이기심은 인간 본성의 한 단면입니다. 법과 제도로 억제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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