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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고달픈 존재, 남자 (이요원. 저는 아직도 얼굴에서 풋내가 나는 이 어린 여자배우의 생기발랄한 처녀적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년전 그녀는 한 드라마에서 청바지에 티만 걸쳐도 화사한 20대의 학생으로 출연했습니다. 그리고 이경영씨가 분한 40대 남자와 불륜에 빠지죠.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당시 모 언론사에서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실제로 중년 남자와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답변 내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녀는 아마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40대 남자들의 뒷 모습은 너무 쓸쓸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읽혔습니다. 
남자에게 40대란 나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나이, 현 업무에 불만이 많으면서도 막상 그 일을  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는 나이, 이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  권춘오 편집장의 서평글을 읽어보시죠.




[이코노믹리뷰 2006-01-06 10:18]


《남자들, 쓸쓸하다》
박범신 지음/푸른숲/206쪽/9,000원

시 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시침과 초침이 반대로 돌면서 자신이 점점 젊어지고 현재의 모든 것들은 소멸되어 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시간을 딱 멈출 수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어느 순간으로 되돌리고 싶은가?

고단한 삶에 피곤한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그 순간은 한창 혈기왕성하고 야망과 비전,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고 모든 기회의 문이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던 그 때가 아닐까? 그 때는 책임져야 할 처자도 없었을 것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복잡하고 힘든 관계와도 아무 상관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이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이것은 헛된 꿈일 뿐,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작가 박범신이 자신의 연재글을 모아 엮은 《남자들, 쓸쓸하다》(푸른숲)는 ‘오늘날 불쌍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신세로 추락하고 있는 남자들,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사회 구조 안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중년 남자들의 현주소와 사회의 구석자리에서 불안한 헛기침밖에 날리지 못하는 쓸쓸한 남자들의 초상을 진솔하게 다룬다.

우리 사회에서 과거 남자들이 누렸던 권력은 거의 다 무너졌다. 오늘날의 아버지는 한때 권력자로 길러졌고 권력자로 행세했지만, 이제 거대 자본주의, 세계화의 파고에 밀려 경쟁에 내몰리고 쫓겨나고, 페미니즘의 폭발적 확장과 신문화의 조류로 인해 발 디딜 곳도 없고 그나마 쉴 수 있는 곳에서조차 구석진 자리에 웅크려야 하는 슬픈 짐승이 되었다.

저자는 “여성이 야만적 시대의 폭압에 의해 ‘여성으로 만들어져왔던 것’처럼, 남성 또한 오랫동안 남성으로 ‘만들어져’왔다”고 말한다.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소극적이어서는 안 되고, 경쟁에 져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남자답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인간적인 허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자다운 척’하는 방법을 배우며, 그 과정에서 눈물겹다 못해 측은지심이 들 만큼의 노력을 기울인다.

남자의 탄생에서부터 사회적인 죽음을 눈앞에 둔 현재의 모습까지 이 땅의 중년 남자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교육받고, 생활의 무게에 짐 지워져왔는지, 중년 남자와 함께 남은 생을 꾸려가야 하는 여자들에게 남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15가지 이야기로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가 풀어내는 한 남자의 슬픈 이야기를 보자.

한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결혼할 때 직장이 없었고 여자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남자는 꿈을 좇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직장, 여자=살림’이라는 보편적 삶의 공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양가의 압력에 남자는 아무 직장이나 얻었고 여자는 좋아하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양가는 이제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열심히 일했다.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이 ‘자기의 길’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꿈’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과장이 될 때까지 그래도 때가 오면 직장 때려치우고 자기의 길로 되돌아갈 것을 꿈꾸었으나 부장이 되고 나선 그마저 포기했다.

저자는 ‘권력자의 전설’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남자가 감내하고 책임져야 하는 현실은 그대로며, 이로 인해 진실로 남자다운 남자를 찾아보기 힘든 세상, 남자들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힘들고 피곤하고 서서히 생명이 고갈되어 간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수상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처자를 가지는 자는 운명을 볼모 잡힐 것이다. 처자는, 선이든 악이든 대사업에 옴짝달싹 못 하게 눌러 붙어 방해가 되므로.” 스콜라 철학에 반대하여 관념으로서의 우상을 제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한 지식의 기반으로 세상을 해석하고자 했던 경험론의 대가인 베이컨의 이 발언은 분명 경험에서 절절히 우러나온 말일 것이다. 저자 또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 “만약 덮고 있던 이불 속에서 쏙 빠져나가듯 무탈하게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족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다.”

저자의 이 한숨 섞인 자조는 이 시대 우리 아버지, 우리의 남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얼마 전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명진출판)란 책이 유독 남자들의 시선을 끈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남자가 이상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 그럼에도 남자가 가해자로서 설 자리가 없는 세상에서, 맨살로 돌아누운 많은 남자들이 진정한 인간의 풍경을 완성해가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저자는 그것을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본다. 남자나 여자를 편가르지 않고 같은 인간이라는 동류항으로 묶으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게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랑도 가족도 모두 남자에게는 버거운 짐이 될 뿐이다.

자, 오늘밤 돌아누운 아버지나 남편의 뒷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라. 경쟁의 전투복을 벗은 초라하고 외롭고 쓸쓸한 등짝이 보일 것이다. 그 등짝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건 어떤가. 시작은 원래 그렇게 작은 것부터 하는 것이니 말이다.

권춘오
네오넷 코리아 편집장(www.summa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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