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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⑭ 두산그룹 박용성 회장  (고전 전문가인 신동준씨가 이코노믹리뷰에 기고한 글입니다. )


이코노믹리뷰 | 기사입력 2007-08-14 22:09 | 최종수정 2007-08-14 22:30


“경영권 탈환은 성공… 리더십 평가는 지금부터”

‘형제의 난’이후 우여곡절 끝에 다시 두산의 사령탑을 맡게 된 박용성 회장. 열정적인 모습으로 대외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왕자의 난’후유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결국 그의 경영리더십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미래에 있는데….

“박 회장이 두산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울 수만 있다면 ‘형제의 난’으로 인한 불미스런 과거는 사소한 문제로 덮여질 것이다. 두산의 앞날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원래 두산그룹의 연원은 1896년 8월 1일에 창업한 ‘박승직상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때를 포함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유지되어 온 재벌로는 두산이 유일하다. 당초 포목행상을 시작한 창업주 박승직 씨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 한창 진행 중인 고종 32년(1896)에 지금의 서울 종로 4가 일대인 배오개에 직물도매상인 ‘박승직상점’을 냈다. 그는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장안의 간판급 포목상들과 합작으로 ‘공익사’를 창립해 사장이 되었다. 당시 그는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렸다. 그는 1915년부터 한국 최초의 화장품인 ‘박가분(朴家粉)’을 개발해 큰돈을 거머쥐었다. 1933년에는 일본 ‘기린맥주’가 한국 진출을 위해 세운 ‘소화(昭和)기린맥주’의 주주로 참여키도 했다.

이후 장남 박두병 씨가 1936년에 ‘박승직상점’의 전무로 취임하면서 경영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1910년에 3남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서울고의 전신인 경성중학과 서울상대의 전신인 경성고상(京城高商)을 졸업한 뒤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사했다. 해방 직후 ‘기린맥주’가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자 그는 회사의 지배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기린맥주’를 관리한 지 3년 뒤에 회사 이름을 ‘동양맥주’, 상표를 ‘OB맥주’로 바꾸면서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산, 유일하게 100년 넘게 유지

그는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에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박승직상점’의 상호를 ‘주식회사 두산상회’로 바꿨다. 이 상호는 박두병의 두(斗)에 ‘산(山)’을 덧붙이는 게 좋겠다는 부친의 뜻에 지은 것이다. 이는 ‘쌀을 한 말씩 쌓아 올려 산을 이루듯이 한 단계 한 단계씩 부를 축적해 나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의 두산은 바로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박두병 씨의 뒤를 이은 사람은 장남 박용곤 씨였다. 1932년에 6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경동고를 나와 군대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59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바로 귀국해 이듬해 4월부터 부친의 권유로 산업은행에서 근무했다. 이는 기업CEO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젊었을 때 조직생활을 거치면서 눈칫밥을 먹고 은행업무도 잘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부친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부친은 건강이 악화하자 1981년에 장남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년 뒤에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용곤 씨는 두산의 전통에 따라 창업 유공자인 정수창 씨 등에게 그룹의 운영을 맡기고 자신은 계열사 경영에 전념하다가 1981년에 정씨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가면서 두산의 사령탑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OB구단 설립을 시작으로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한국네슬레, 경월소주, 두산정보통신 등을 잇달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이때 그는 매사를 신중히 처리하며 안전제일주의로 나갔다. 원래 그는 선천적으로 과묵하고 내성적이었던 까닭에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했으나 일단 가까워지면 깊게 터놓고 사귀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이런 스타일이 회사운영에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그룹 내부의 운영을 전적으로 아홉살 아래 둘째 동생인 박용오 그룹 부회장에게 일임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것이 훗날 두산의 사령탑을 동생에게 넘겨야 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형제의 난’의 싹은 여기서 발아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비자》‘정법(定法)’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통치술은 임무에 따라 벼슬을 주고, 명목을 좇아 내용을 따지고, 생사의 실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군주가 쥐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설령 아들이나 동생일지라도 생전에 대권을 일임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한비자의 충고를 무시하다 지휘봉을 빼앗긴 셈이다. 원래 그룹 차원의 대기업을 경영하는 방식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보위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세력은 바로 주변사람이라는 한비자의 지적은 기업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한비자》‘인주(人主)’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군주가 그의 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대신이 너무 고귀하게 되고 좌우 근신의 위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지근거리에 있는 자가 보위를 넘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둘째 동생이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셈이다. 한비자가 신하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미리 제거하라고 충고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이같이 역설한 바 있다.

“군주는 기회 있는 대로 나무를 잘라야 하고 나뭇가지가 지나치게 무성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가지가 무성하면 궁궐을 가리게 된다.”

근신의 세력 확장을 방치하면 나뭇가지에 의해 궁궐이 가려지듯이 군권이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그가 신하들에게 세력 부식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가 그룹 내부의 운영권을 둘째 동생에게 일임했다가 밀려난 것은 스스로 화를 키운 데 따른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형을 밀어내고 지휘봉을 거머쥔 박용성 회장은 《한비자》가 역설한 대권의 속성을 일찌감치 통찰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박 회장과 유사한 상황에서 실력으로 보위를 차지한 대표적인 인물로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을 들 수 있다.

“나뭇가지가 무성하면 궁궐을 가린다”

수양제(隋煬帝)에게 발탁돼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이세민의 부친 이연(李淵)은 장자 이건성(李建成)과 차자 이세민과 함께 봉기해 수나라를 멸하고 당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당시 건국의 공으로 이건성은 태자, 이세민은 진왕(秦王), 넷째 아들 이원길(李元吉)은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셋째는 이에 앞서 세상을 떠났다. 태자 이건성은 침착하고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인 데 반해 이세민은 지혜로운 데다가 용맹과 과단성까지 지닌 인물이었다. 이원길은 급하고 정열적인 성격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행동파였다.

건국 초기만 해도 아직 각지의 군웅들이 서로 왕과 황제를 자처하며 할거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당나라는 7년 동안 모두 6차례의 큰 전투를 치른 뒤에야 비로소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세민이 세운 공이 가장 컸다.

부황(父皇)인 이연은 그의 공을 높이 사‘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새로운 작호를 내렸으나 태자를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를 간파한 이세민은 이내 진왕부(秦王府)에 문학관(文學館)을 설치한 뒤 뛰어난 인재들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18학사(十八學士)’였다. 18학사에는 훗날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성세에 이름을 떨친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등 뛰어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물론 태자 이건성도 결코 용부(庸夫)는 아니었다. 그의 수하에도 수많은 인재가 존재했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현사로 불린 위징(魏徵)을 비롯해 왕규(王珪)와 위정(韋挺) 등 걸출한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정세가 안정되자 조정의 대신들과 지방의 장수들도 어느덧 태자와 이세민을 지지하는 파로 갈라져 대립했으나 모든 면에서 태자가 유리했다. 무덕(武德) 9년(626)에 양측의 생사를 가르는 충돌이 빚어졌다.

이해 여름에 북쪽의 돌궐족이 수만의 기병으로 국경을 습격하자 관례에 따라서 이세민이 출정하게 되었으나 태자는 이원길을 고집했다. 이는 차제에 이세민의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속셈이었다. 이연도 형제간의 세력경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태자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때 이원길은 출정에 앞서 진왕부의 용장인 위지경덕(尉遲敬德)과 정지절(程知節), 단지현(段志玄), 진숙보(秦叔寶) 등을 부장으로 요구하면서 진왕부에 속한 정예병을 차출하였다. 위지경덕 등이 진퇴양난에 처한 이세민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이번에 기병하지 않으면 많은 장수들이 진왕부를 이탈하여 목숨을 부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세민이 마침내 부황인 이연에게 이건성과 이원길을 성토하는 밀서를 보냈다. 내막을 모르는 이연은 세 아들을 화해시킬 요량으로 궁중 연못에 배를 띄워 놓은 뒤 사람을 보내 세 아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태자가 이원길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자 이원길이 이같이 건의했다. “궁중의 시위대에게 명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형님은 병을 핑계로 입조를 거절하고 사태를 관망하십시오.” “이미 도성의 주요한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여 방비토록 하였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 부황 앞에 나아가 모든 진상을 밝히겠다.”

결국 두 사람은 수명의 측근만을 대동하고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을 통해 입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현무문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장수 상하(常何)는 원래 태자의 심복이었으나 이미 이세민에게 넘어가 있었다. 태자는 이세민을 너무 얕잡아보는 실수를 범하고 만 셈이다. 다음날 아침 태자는 현무문을 통과하다가 문 주위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즉각 이원길에게 소리쳤다. “위험하다. 속히 말을 돌려라.”

이때 부황 이연을 태운 배가 떠 있는 호수 근처의 임호전(臨湖殿) 뒤에서 이세민이 급히 말을 타고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걸음을 멈춰라.” 태자가 움찔하는 사이 이원길이 재빨리 이세민을 향해 화살을 날렸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이때 태자는 이세민이 달려오면서 날린 화살을 맞고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진 뒤였다. 이원길은 허벅지에 이세민의 수하들이 쏜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으나 곧 땅에 누운 채로 이세민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이세민이 화살을 피하려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이원길이 앞으로 달려나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순간 위지경덕이 말에서 뛰어내려 내달리며 호통을 쳤다.

현무문의 변 vs 형제의 난

“역적아, 네가 감히 진왕을 헤치려 하다니.” 이원길이 재빨리 무덕전(武德殿)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는 순간 위지경덕의 부하들이 날린 수십대의 화살이 그의 몸에 그대로 꽂히고 말았다. 이때 태자의 시위대장 풍립(馮立)이 동궁부와 제왕부의 시위대 2000명을 이끌고 현무문으로 달려오자 사태가 급박해졌다. 당시 현무문 내에 포진한 이세민의 병력은 100여 명에 불과했다. 마침 이세민의 부인인 장손씨(長孫氏)가 친히 진왕부의 병력을 이끌고 현무문으로 달려오자 동궁부의 시위대가 공격의 방향을 돌려 진왕부를 포위했다.

이때 위지경덕이 재빨리 태자와 이원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동궁부의 시위대 앞에 나타나 소리쳤다. “태자와 제왕(齊王)이 모반을 꾸며 진왕이 폐하의 명을 받아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너희들은 죄가 없으니 모두 물러나도록 하라.”

이로써 ‘현무문의 변’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태자 이건성이 자파세력의 절대적인 우위만 믿고 방심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이세민 측은 궁지에 몰리자 태자의 심복을 매수한 뒤 결정적인 시기가 오자 가차없이 칼을 뽑아 태자 일당을 베어버리는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이것이 승부를 가른 셈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당나라 때의 사가들은 하나같이 이세민을 지혜롭고 담대한 인물로 묘사해 놓았다. 이는 이세민이 즉위한 뒤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성세를 이룬 사실과 무관치 않다. 실제로 이세민은 동궁부와 제왕부의 인재들을 휘하에 끌어모은 뒤 천하를 자신의 무릎 아래 굴복시켰다. 통치는 동기가 아닌 결과에 의해 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케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 회장이 맏형인 박 전 회장을 밀어내고 두산의 사령탑이 된 것도 이세민이 태자인 맏형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보위에 오른 것에 비유할 만하다. 실제로 박 전 회장은 성격 등에서 태자 이건성과 닮은 점이 많았다. 당시 이건성은 능력 면에서 이세민에 뒤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휘하에 수많은 인재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는 지나친 낙관론과 우유부단이 불러온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경기고·서울대, 뉴욕대서 MBA

1940년에 박두병 씨의 3남으로 태어난 박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에 뉴욕대에서 MBA를 받은 인재이다. 기업CEO로는 최고의 학벌을 자랑할 만했다. 그가 ‘형제의 난’에 따른 세간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산의 사령탑을 거머쥔 배경에는 바로 그의 이런 뛰어난 학벌에 기초한 자부심이 크게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지난 1974년에 두산그룹 기획실장을 맡으면서 경영에 참여한 박 회장은 이후 동양맥주 사장 등을 역임하는 와중에 아시안게임 유도경기위원장과 서울상공회의소 비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대외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그의 명망은 날로 높아갔다. 이는 그로 하여금 그룹의 총수 자리에 오르도록 부추기는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그룹 내 경영권을 전담할 당시 맏형인 박 전 회장은 지나치게 대외업무에 치중하면서 그룹 경영에 소홀한 면을 보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동생인 박 회장에게 물실호기(勿失好機)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박 회장은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은밀히 규합해 마침내 2005년 7월에 두산그룹의 사령탑에 올랐다. 일종의 ‘궁정쿠데타’를 성사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올해 초 동계올림픽 유치 차원에서 사면된 후 두산중공업 사내이사 자격으로 두산의 사령탑을 다시 맡게 되었으나 ‘왕자의 난’ 후유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다. 최근 이랜드 사태로 비정규직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건설업계에서는 처음으로 두산건설이 계약직 노동자를 해고한 것도 그에게는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 회장의 경영리더십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결국 그룹의 향후 모습에 따라 판결날 수밖에 없다. 그가 만일 두산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울 수만 있다면 ‘형제의 난’으로 인한 불미스런 과거는 ‘현무문의 난’이 ‘정관지치’로 잠재워진 것처럼 사소한 문제로 덮여질 것이다. 그가 사령탑으로 복귀한 두산의 앞날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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