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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더를 말한다 ⑦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코노믹리뷰 2007-04-26 10:42]


“2% 부족한 한나라 대항마 …
금의 벗고 포의로 갈아입어야”

그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10년 동안 금의(錦衣)를 입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리더로 변신하기 위해선 금의를 벗고 포의(布衣)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범여권’의 대선 주자로 변신할 수 있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는 대선 주자를 거론할 때 ‘범(汎)여권’과 ‘구(舊)여권’을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범여권’은 대선 돌풍의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나 ‘구여권’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나라당의 소위 ‘빅2’에 맞설 수 있는 대항마가 될 수 있는지 여부가 ‘범여권’과 ‘구여권’의 판별기준이 되고 있는 셈이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김근태 전 의장 및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등과 함께 오랫동안 ‘구여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손꼽혀 왔다. 그러나 정 전 의장은 최근 한미FTA협상 타결 과정에서 단식농성의 극한투쟁을 선택한 두 사람과 달리 신중한 행보를 취함으로써 ‘구여권’이 아닌 ‘범여권’으로의 진입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만일 그가 두 사람과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면 ‘범여권’의 대다수 대선 주자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구여권’의 인물로 각인되었을 공산이 컸다. 그의 발 빠른 행보는 그가 기자출신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15대 총선서 최다 득표율로 당선 정계입문
그가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게 된 것은 DJ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였다. 한승헌 변호사 등과 함께 DJ납치사건 진상규명에 나선 것이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지난 1996년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한 제15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율로 당선된 뒤 3번에 걸쳐 내리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민주당을 뛰쳐나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에는 이를 앞장서 주도키도 했다. 그는 그 공으로 원내대표에 선출된 뒤 두 번에 걸쳐 당의장을 지내는 행운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가 바로 그가 가장 득의(得意)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그가 서 있는 위치는 적잖이 불안한 게 사실이다. 몸을 담고 있는 열린우리당이 사실상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고, 그 또한 낮은 국민지지율로 인해 화제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 그가 지난 2월 ‘서민 속으로’의 기치를 내걸고 여의도를 떠나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근로자 등 이른바 ‘신(新) 소외계층’을 찾아다니는 소위 ‘민생투어’를 시작한 것도 이런 위기의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FTA협상 조건부 찬성하며 범여권 진입
그는 이 와중에 찬반여론이 첨예하고 엇갈리고 있는 한미FTA협상을 최대한 활용해 김 전 의장 및 천 전 장관과 차별되는 행보를 취함으로써 ‘범여권’으로의 진입에 일정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내가 FTA협상에 조건부 찬성을 한 것은 개방과 복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방은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 전 의장은 이제 민생투어를 마무리짓고 여의도정치로 복귀했다. 복귀시점이 절묘하게도 통합신당 및 외부인사 영입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해 있는 시점과 맞아떨어지고 있다. 민완(敏腕)기자의 전력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통상 ‘민완’은 ‘재빠른 팔’에서 나온 말로 재치 있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솜씨를 지칭한다. 이는 민첩하면서도 지혜롭다는 뜻의 ‘민혜(敏慧)’와 통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민첩할 경우 자칫 ‘민힐’로 비춰질 소지가 크다. ‘민힐’은 매사에 민첩하기는 하되 너무 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미FTA협상 타결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행보를 두고 일각에서는 ‘민혜’가 아닌 ‘민힐’로 폄하하고 있다.

사실 정 전 의장은 중요 현안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기민한 행보를 보여 두 가지 엇갈린 평가를 낳은 바 있다. 지난 2월 천 전 장관이 과감히 탈당을 결행할 때 그는 끝내 잔류를 선택했다. 당시 그의 잔류를 두고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으나 셈을 너무 복잡하게 한 데 따른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했다. 이는 당시 그가 소위 ‘탈(脫)노무현’을 기치로 탈당 불사를 외치며 노 대통령의 탈당을 압박한 뒤 이내 당 잔류로 방향을 선회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반대 측에서는 이미 집이 반이나 타버렸는데도 집의 규모가 큰 것을 아까워한 나머지 전 주인을 내쫓은 뒤 집을 고쳐 주인행세를 할 생각으로 잔꾀를 부렸다는 혹평을 내놓았다.

당시 그가 보여준 행보는 확실히 이런 혹평을 낳을 만한 소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향후 보다 사려 깊은 행보를 촉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한미FTA협상 타결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는 나름대로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의 행보에 늘 ‘민혜’와 ‘민힐’이라는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가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여권’이 아닌 ‘범여권’의 대선 주자로 부상키 위해서는 현재보다 훨씬 신중한 ‘민혜’의 처신을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탈당파는 열린우리당을 배제한 가운데 우선 신당창당을 통한 ‘소통합’을 이룬 뒤 외부로부터 유력한 대선 주자를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대통합’을 내세우며 후보 중심의 새 판 짜기를 시도하고 있다.

‘소통합’ 측에서는 정 전 의장에게 선행조건으로 탈당을 요구하고 있고, ‘대통합’ 측에서는 유력한 후보로의 등장 가능성을 암시하며 탈당을 만류하고 있다. ‘소통합’측에 가담하자니 탈당의 시기와 명분이 마땅치 않고, ‘대통합’ 측에 남자니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구여권’의 인물로 낙인 찍힐 공산이 크다. 그가 범여권의 모든 대선 주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소위 ‘원탁회의’를 제의하고 나선 것은 진퇴양난의 이런 상황을 돌파코자 하는 고육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 활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현재 범여권은 ‘소통합’과 ‘대통합’ 측을 막론하고 전가의 보도인 충청-호남의 연합전선 구축을 통한 ‘영남포위’ 전략으로 막판 역전을 노리고 있다. 정 전 의장은 호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민혜’의 처신을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포스트DJ’의 기대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지리(地利)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천시(天時)이다. 그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하에서 10년 동안 승승장구하면서 금의(錦衣)를 입었다. 많은 국민들이 노 대통령의 통치리더십에 극단적인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 또한 사죄의 차원에서 금의를 벗고 포의(布衣)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다. 그가 여의도를 떠나 소위 ‘민생투어’를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다.

처신 잘하면 ‘포스트DJ’기대주 발돋움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고 참회하는 자세로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다 진지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에 성공할 경우 그 또한 능히 손 전 지사 및 정운창 전 서울대 총장과 더불어 범여권 내 ‘빅3’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여권 내 ‘빅3’의 등장은 제갈량이 유비(劉備)에게 제시한 삼분지계(三分之計)의 21세기형 버전에 해당한다. 정 전 의장은 어렸을 때부터 《삼국지》를 탐독했다. 그는 《삼국지》의 세 인물 중 유비를 가장 존경한다. 그는 그 이유를 이같이 밝히고 있다.

“난세의 조조는 확실히 뛰어난 바가 있으나 나는 현덕(玄德)을 좋아한다. 비록 독하고 모질지 못해 제갈량(諸葛亮)의 삼분지계를 수용하는 선에 머물고 말았으나 그는 ‘포용과 통합’의 상징이었다. 그의 이런 행보는 현대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다.”

장차 유비와 마찬가지로 ‘포용과 통합’을 기치로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취지를 드러낸 셈이다. 그의 이런 언급은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대립과 분열’의 난세로 진단한 데 따른 것이다. 그는 ‘포용과 통합’의 의미를 이같이 풀이하고 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은 나름대로 큰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독재’와 ‘투쟁을 위한 투쟁’이라는 우를 범했다. 이제는 30년 간에 걸친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와 10년 간에 걸친 참여과잉으로 인한 내부모순을 정비하고 남북분단으로 인한 민족모순을 치유할 시기이다. 먼저 내부통합이 이뤄져야 한다. 지도자의 뛰어난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포용과 통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북통합에 있고, 그에 앞서 남한 내의 내부통합이 필요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고통치권자의 탁월한 통치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그가 내세우는 ‘포용과 통합’은 본질적으로 손 전 지사 및 정 전 총장이 내세우는 ‘중도개혁’내지 ‘탈이념적 중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정 전 의장 자신은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중도’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중도진보’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통일부 장관 시절에 보여준 그의 친북(親北) 행보에 주목해 ‘중도’를 가장한 ‘진보’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중도진보’는 한나라당 대선 주자들이 내세우는 ‘중도보수’와 취지 면에서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가 굳이 ‘중도진보’를 내세운 데에는 통일부장관을 지낸 경력을 최대한 살려 자신을 남북통합시대의 미래지향적 지도자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경제리더십’이 최대의 화두로 등장해 있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빅2’를 ‘수구보수’로 몰아세우면서 자신을 남북통합형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작업이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잘못했다가는 역풍을 맞아 자신이 오히려 ‘범여권’이 아닌 ‘구여권’의 인물로 낙인 찍힐지도 모를 일이다. ‘중도진보’의 이념적 지표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북통합형 지도자 부각 쉽지 않을 듯
나아가 사실(史實)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유비를 ‘포용과 통합’의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일찍이 20세기 초에 활약한 기인(奇人) 리쭝우(李宗吾)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린 바 있다. 그 또한 유비를 높이 평가했으나 그 이유는 정 전 의장과 사뭇 다르다. 그는 유비를 ‘포용과 통합’의 상징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하에 둘도 없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인물로 간주했다.

리쭝우는 자신의 명저 《후흑학(厚黑學》에서 난세에는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인물만이 천하를 거머쥘 수 있다고 단언한 바 있다. ‘면후심흑’은 후안무치의 뻔뻔함과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감춤)의 흑심(黑心)을 품은 인간을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조는 ‘심흑’, 유비는 ‘면후’의 달인(達人)이었다. 그는 유비를 이같이 평가해 놓았다.

“유비의 특징은 ‘면후’에 있다. 그는 상황에 따라 조조를 비롯해 여포(呂布)와 유표(劉表), 손권, 원소(袁紹) 등에게 붙어 이쪽저쪽을 오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남의 울타리 속에 얹혀살면서 이를 전혀 수치로 생각지 않은 것은 물론 울기도 잘했다. 훗날 나관중(羅貫中)은 《삼국연의》를 지으면서 그의 이런 특징을 두고 ‘유비는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봉착하면 사람들을 붙잡고 한바탕 대성통곡을 해 즉시 전패위공(轉敗爲功: 패배를 성공으로 뒤바꿔 놓음)을 이뤘다’고 꼬집었다. ‘유비의 강산(江山)은 울음에서 나왔다’는 속담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본래 영웅의 모습이다. 그와 조조는 쌍벽을 이뤘다. 두 사람이 술을 먹으며 천하의 영웅을 논한 것이 그 실례이다. 한 사람의 속마음은 가장 시커멓고 또 한 사람의 얼굴 가죽은 한없이 두꺼웠다. 그러니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리쭝우가 유비를 조조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평가한 것은 바로 유비의 ‘면후’가 절인(絶人)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조조의 ‘심흑’보다 더 교활한 게 유비의‘면후’이다. 이는 유비가 서촉을 차지할 때 구사한 간교하기 그지없는 휼계(譎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휼계를 낸 책사는 바로 《삼국연의》가 제갈량과 더불어 천하의 책사로 묘사한 방통(龐統)이었다. 당시 방통은 유비에게 이같이 건의한 바 있다.

“지금 은밀히 정병(精兵)을 선발한 뒤 밤낮으로 달려가 익주(益州)의 성도(成都)를 쳐야 합니다. 익주자사 유장(劉璋)은 군사를 모르는 데다 평소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으니 대군을 이끌고 가 급습하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상책입니다. 유장의 휘하장수 양회(楊懷)와 고패(高沛)는 지금 강병을 대동한 채 익주의 관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장에게 수차례에 걸쳐 장군을 형주(荊州)로 돌려보낼 것을 간했다고 합니다. 장군이 사람을 보내 형주에 긴급한 사정이 있어 구원하려 한다고 전하면서 군장을 꾸려 돌아가는 모습을 취하면 두 사람 모두 장군의 회군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경기(輕騎)로 장군을 전송할 때 그들을 사로잡은 뒤 곧바로 성도로 향하십시오. 이것이 중책입니다. 마지막으로 백제성(白帝城)으로 물러나 형주와 연계하면서 서서히 익주를 도모하는 계책이 있습니다. 이는 하책입니다. 만일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커다란 곤경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자 유비가 이같이 대답했다.

“상책은 너무 급하고 하책은 너무 완만하오. 중책이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으니 가히 취할 만하오.”

방통이 제시한 상책과 하책은 유장과 곧바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을 뜻한다. 상책은 속전(速戰), 하책은 지구전(持久戰)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부 군사로 시간을 어느 정도 벌면서 유장을 항복시키는 중책이 가장 타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유비는 중책을 취해 유장의 휘하장수인 양회와 고패를 연회에 초청해 죽인 뒤 곧바로 그 군대를 거두어 성도로 진격했다. 휼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천하삼분지계’를 성사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사 《삼국지》와 《자치통감》이 아닌 《삼국연의》를 읽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유비를 닮고자 하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게 없다. 큰 뜻을 품고 있는 만큼 자신의 행보를 둘러싼 평가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신속히 ‘포의’로 갈아입고 ‘범여권’의 대선 주자로 자연스럽게 변신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그는 민완 기자출신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민첩할 경우‘민힐’로 비춰질 수도 있다.
‘민힐’은 매사에 민첩하기는 하되 너무 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난세의 조조는 확실히 뛰어난 바가 있으나 나는 현덕(玄德)을 좋아한다. 비록 독하고 모질지 못해 제갈량(諸葛亮)의 삼분지계를 수용하는 선에 머물고 말았으나 그는 ‘포용과 통합’의 상징이었다. 그의 이런 행보는 현대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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